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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이 브랜드', 어떻게 무너졌나..

조회수 2019. 10. 13. 11: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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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의 대한민국은 IT 열풍, 그리고 벤처기업 열풍이 한창이었다. 그리고 무선호출기(삐삐), 휴대전화 등의 이동통신기기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팬택(Pantech)은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타고 혜성같이 등장한 대한민국 1세대 통신 벤처기업 중 하나다. 1991년 직원 6명, 자본금 4000만 원으로 팬택을 창업한 박병엽 대표는 무선호출기, 산업용 무전기 등을 자체 개발, 내수 및 수출 시장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펼쳤다.



1997년부터는 CDMA 방식의 휴대전화 단말기를 개발 완료해 본격 양산을 시작했다. 전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모은 휴대전화기인 모토로라의 ‘스타택’ 시리즈를 OEM 방식으로 생산해 공급하기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당시 대한민국 전체 경제를 뒤흔들었던 IMF 구제금융사태의 여파 속에서도 꾸준한 기술 개발 및 해외시장 개척을 통해 팬택은 파고를 이겨 나갔다. 그런 팬택의 몰락은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우수한 기술력, 과감한 인수합병으로 영향력 확대

팬택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던 까닭은 기술 개발에 힘쓴 탓도 있지만 과감한 인수합병도 한 몫을 했다. 중견기업이었던 팬택이 삼성전자나 LG전자, 모토토라와 같은 대기업들과 대등한 경쟁을 하기 위해서는 일단 몸집을 불려야 한다고 경영진이 판단했기 때문이다.



2002년에는 (구)현대전자의 통신사업부였던 현대큐리텔을 인수하여 ‘팬택앤큐리텔’을 설립했으며, 2005년에는 SK 그룹의 단말기 생산업체인 스카이텔레텍을 인수, 합병했다. 당시 휴대전화 시장에서 프리미엄 브랜드로 인기가 높았던 스카이 브랜드를 고급형 제품군으로, 그리고 큐리텔 브랜드를 보급형 제품으로 포지셔닝하여 전방위 시장 공략을 하겠다고 팬택은 강조하기도 했다.

스카이는 프리미엄 브랜드로 인기가 높았다

참신한 신제품도 다수 선보였다. 국내 최초의 33만화소 카메라폰, 국내 최초의 슬라이드 방식 휴대폰, 당시로선 드물었던 동영상 촬영기능 휴대폰, 세계 최초의 지문인식폰 등이 큐리텔과 스카이 브랜드로 출시되어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무리한 욕심이 부른 첫 번째 위기

하지만 무리한 사업확장은 곧 극심한 자금난으로 이어졌다. 하나의 그룹 내에 사업영역이 유사한 3개의 브랜드(팬택, 큐리텔, 스카이)가 공존한 탓에 중복투자도 심했고, 효율 또한 높지 않았다. 한때 프리미엄 제품 취급을 받았던 스카이 브랜드 제품의 품질 역시 예전만 못하다는 혹평을 받기도 하는 등, 인수합병의 효과가 전혀 발휘되지 못하고 있었다.

팬택 본사 건물로 쓰던 서울시 상암동 빌딩

결국, 스카이텔레텍을 인수한지 불과 1년만인 2006년, 팬택은 채권단에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을 요청했으며, 이듬해인 2007년, 워크아웃이 시행되어 팬택의 대표인 박병엽 부회장은 자리에서 물러나고 팬택은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팬택 계열이 안고 있는 채무는 1조 5000억원에 달할 정도로 컸기 때문에 더 이상 희망은 없어 보였다.

스마트폰 열풍 타고 화려하게 부활한 팬택

이런 팬택이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 건 2010년을 전후해 불어 닥친 스마트폰 열풍이었다. 2010년 한해에만 팬택은 ‘시리우스’, ‘미라크’, ‘이자르’, ‘베가’, ‘베가X’ 등의 스마트폰을 출시, 다양한 취향의 소비자들을 동시에 공략하는 강행군을 했다. 이는 업계 1위였던 삼성전자조차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의 행보였으며, 초기 스마트폰 시장에서 시행착오를 겪던 LG전자, 모토로라 등의 입장에선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과감한 마케팅이기도 했다.

팬택의 스마트폰 대표 브랜드가 된 ‘베가’ 시리즈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팬택은 2010년, LG전자를 제치고 국내 스마트폰 제조업체 중 시장 점유율 2위에 오르는 성과를 냈다. 2011년 4분기까지 18분기 연속 영업 흑자를 기록하는 등, 기업 운영 환경도 크게 개선되었다. 이에 힘입어 한동안 이어오던 워크아웃도 2011년 말에 졸업합에 따라 팬택은 다시 본 궤도에 오르는 듯 했다. 박병엽 부회장 역시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

짧았던 영광, 다시 나락으로

하지만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스마트폰 시장이 급격히 커짐과 동시에 각 제조사들의 기술력이 상향 평준화 되었고, 경쟁은 더욱 극심해졌다. 비슷한 제품 여럿이 공존하는 시장에서 대기업들에 비해 브랜드 파워가 약하다는 점은 팬택의 큰 약점이었다. 또한, 국내 스마트폰 시장의 보조금 경쟁이 치열해진 점도 자금력이 약한 팬택 입장에선 힘겨운 상황이었다.



또한, 워낙 신제품 투입 주기가 짧다 보니, 개발 기간 중 충분한 검증을 받지 못한 몇몇 제품이 품질 면에서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특히 ‘베가 레이서’, ‘베가 LTE’ 등의 전략 제품은 열정적인 마케팅에 힘입어 높은 판매량을 기록하긴 했지만, 이용 중 갑자기 전원이 꺼지거나 배터리가 너무 빨리 소모되는 등의 문제를 지적 받으며 팬택의 이미지를 실추시켰다. 이후에 나온 ‘베가 R3’나 ‘베가 아이언’ 등의 후속 모델들은 전작의 단점을 상당부분 개선했으나 이미 적잖은 소비자들이 등을 돌린 상태였다.



2012년을 기점으로 팬택은 또 다시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위기감이 고조된다. 2013년에 들어 삼성전자로부터 대규모 투자를 유치하고 상당수 직원들에게 무급 휴직을 실시하는 등, 안간힘을 썼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에 더해 스마트폰 시장에서 불법 보조금 경쟁을 한다는 이유로 정부는 2014년 3윌부터 거의 2개월 동안 이동통신 3사에 영업정지 처분을 내렸고, 같은 해 10월에는 단말기 보조금의 상향선을 제한하는 내용을 담은 ‘이동통신단말장치 유통구조 개선에 관한 법률(일명 단통법)’까지 시행되면서 스마트폰 시장은 극심한 침체를 겪게 된다. 경쟁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덩치가 작은 팬택이 입은 타격은 더 컸다.

출처: 동아일보DB
2015년 5월 27일, 팬택은 사실상 폐업을 알리는 신문광고를 발행한다

결국, 2014년 8월, 팬택은 다시 워크아웃을 신청하고 법정관리 상태가 된다. 이미 자력으로 회생이 불가능할 정도의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에 회사를 매각할 계획도 세웠다. 하지만 부채 규모만 1조원을 넘는 팬택을 인수할 만한 상대를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법원이 매각공고를 냈지만, 인수자격을 갖춘 상대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2015년 5월, 팬택은 회생절차를 포기하고 사실상 문을 닫는 것을 알리는 신문 광고까지 발행했다.

관 뚜껑 열고 나온 팬택이 피어 올린 마지막 불꽃

모두가 끝났다고 생각했던 2015년 6월, 국내 광디스크 저장장치 업체인 옵티스와 통신 솔루션 전문업체인 솔리드가 합작해 설립한 컨소시업에서 팬택을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우여곡절을 거쳐 같은 해 10월, 옵티스-솔리드 컨소시엄은 팬택의 인수를 완료함에 따라 팬택은 법정관리를 탈출했다. 팬택이 기사회생한 것이다.

스카이 아임백(IM-100)은 야심작이었으나 팬택의 마지막 작품이 되고 만다

부활한 팬택은 이듬해인 2016년 6월, 1년 7개월만의 신제품인 ‘스카이 아임백(Sky IM-100)’을 출시했다. 과거에 호평을 받았던 스카이 브랜드를 되살림과 동시에 팬택이 다시 돌아왔음(I’m back)을 강조한 야심작이었다. 대기업들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기 위해 40만원대의 보급형 사양을 갖췄으며, 무선 충전 및 무선 스피커 기능을 탑재한 액세서리를 기본으로 제공하는 등, 여러모로 신경 쓴 제품이었다.



스카이 아임백은 개성적인 디자인 및 독특한 구성에 힘입어 초기 물량이 매진되는 등의 좋은 출발을 보였다. 하지만, 낮은 성능에 불만을 재기하는 소비자도 적지 않았으며, 아직도 팬택의 미래 및 사후지원에 의문을 가진 사람들도 많았기에 초반의 호조를 계속 이어가지 못했다. 결국, 후속모델을 내지 못하고 팬택의 마지막 스마트폰이 되고 만다.



2017년 5월, 막다른 골목에 몰린 팬택은 스마트폰 사업을 중단하고 IoT 관련 사업에 집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 역시 지지부진하여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했으며, 그동안 팬택이 쌓아온 각종 특허 역시 여러 회사에 나뉘어 팔리기 시작했다. 결국 같은 해 10월, 솔리드는 팬택을 특수목적 법인인 케이앤에이홀딩스에 매각한다고 발표했다. 매각 대금은 불과 1,000만원에 불과했다. 케이앤에이홀딩스는 향후에도 팬택을 통해 신규 사업을 모색한다고 발표하긴 했지만, 업계에선 사실상 팬택이 청산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보고있다.

한 발짝 남겨두고 이루지 못한 기적

1990년대 IT 열풍, 벤처 열풍이 불었을 때, 많은 언론과 지식인들은 아이디어와 기술력만 있으면 누구라도 정상에 우뚝 설 수 있다며 장밋빛 전망을 내놓곤 했다. 그리고 팬택은 이를 증명하는 대표주자 중 하나였다. 실제로 팬택은 뛰어난 기술력과 거침없는 열정을 통해 유수의 대기업들과 어깨를 겨룰 만한 IT 기업 중 하나로 떠오르기도 했다. 몇 번의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이 역시 정면돌파를 통해 극복하기도 했다.



하지만, 스마트폰 시장이 레드오션화 되면서 상대적으로 덩치가 작고 돈줄이 부족했던 기업들은 점차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또다시 빚을 내고 회사를 인수해 덩치를 키우는 무리수가 이어지게 되었고, 결국 팬택은 주저앉고 말았다. 비즈니스 도중에 발생한 몇 번의 실수 역시, 대기업 입장에선 작은 생체기에 불과했지만 팬택으로선 치명상이었다.



행운의 여신 역시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불과 창업 수년만에 IMF 금융위기를 겪었으며, 전작의 문제점을 개선한 신제품을 내놓을 무렵 이동통신사들의 영업정지 사태를 맞이해야 했다. 그 외에 두번째 워크아웃의 위기를 겪을 무렵 단통법이 시행되어 시장이 꽁꽁 얼어붙기도 하는 등의 불운이 이어지기도 했다.



팬택의 비전과 기술력은 충분했다. 하지만 이를 익히 실현할 기초체력이 턱없이 부족했으며, 맞서 싸워야 할 상대들은 하나같이 글로벌 수준의 공룡들이었다. 영화나 소설이었다면 마땅히 응원 받아 성공을 거둘 조건이 충분했지만, 그런 드라마틱한 기적이 현실에서도 재현되기를 바라는 건 무리였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은 기원한다. 기적의 바로 한 발짝 앞까지 왔다가 쓰러진 팬택이라는 도전자의 이름이 오랫동안 기억되기를.

글 / IT동아 김영우(pengo@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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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비즈 임현석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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