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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때 무너진 기업들은.. "지금 뭐하나?"

조회수 2019. 5. 21. 09:0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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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가 영화로 재현됐다. <국가부도의 날>은 ‘국가 부도’까지 일주일을 남겨두고 잇속을 챙기려는 사람, 부도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 등 다양한 군상의 이야기를 그렸다. 하지만 노력에도 불구하고 1997년 11월 21일, 대한민국은 IMF에 긴급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다음 달 3일 임창열 당시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과 미셸 캉드쉬 IMF 총재는 550억 달러를 지원하기로 약속하는 ‘IMF 구제금융안’에 서명을 했다. 실제론 195억 달러가 지원됐다.

출처: 동아일보
(97년 11월 22일자 동아일보)
출처: 동아일보
(97년 12월 4일자 동아일보.)

그냥 돈을 빌려줄 리 없었다. IMF의 조건은 가혹했다. 우선 11%에 불과하던 금리가 25%까지 치솟았고, 부채비율이 높은 기업에 대한 강도 높은 구조조정이 실시됐다. 정부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미 굴지의 기업들이 무너지면서 중소기업도 함께 도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외환보유액은 200억 달러 수준으로, 금고가 빈 상태. 손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구조조정 칼날에 기업들이 하나 둘 무너졌고, 구조조정과 명예퇴직이 일상 용어가 되면서 많은 사람이 길거리로 내몰렸다. IMF의 상흔은 많은 국민들의 삶에 그리고 여러 기업에 여전히 남아있다. 그때 쓰러진 기업들은 현재 어떤 모습일까.

한보그룹 

97년 1월, 재계 14위 한보그룹 주력 계열사 한보철강이 부도를 맞았다. 굴지의 기업이 쓰러졌다는 충격도 잠시, 이른바 ‘한보 사태’로 불리는 정경유착과 비리가 국민들을 더 아연실색하게 했다. 한보그룹은 90년부터 당진제철소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당시 업계에선 급하게 대규모 제철소를 짓는 한보에 대해 우려의 시선을 보냈지만, 프로젝트는 탄탄대로를 달렸다.


당진제철소가 들어선 부지는 당초 공유수면 매립기본계획에 포함된 곳이 아니었다.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고 대형 선박이 드나들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보가 요청한 뒤 9개월 만에 매립 허가가 났다. 자금 조달도 원활했다. 91년 정태수 당시 한보그룹 회장은 “총 사업비 1조1786억원 가운데 4590억원을 자체 조달하겠다”고 밝혔지만, 주 자금원으로 내세웠던 수서지구 아파트 건립이 무산되면서 사실상 자금조달 능력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한보의 로비를 받은 서울시가 수서 등 택지개발 예정 지구를 특정 조합에 공급한 이 비리 사건은 훗날 ‘수서사건’으로 불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행권에서 5조7000억원의 대출을 받았다.

출처: 동아일보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이 비자금 조성 등의 혐의로 조사를 받기 위해 대검찰청 청사에 들어서는 모습(좌)과 한보그룹 사옥으로 쓰였던 서울 대치동 은마아파트 상가.)

대출 상환 능력을 상실한 한보그룹은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보 사태 조사 과정에서 정∙관계, 금융권 인사 여럿이 비리로 얽혀 있음이 드러나 10여 명이 구속됐다. 정 회장 역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고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현철 씨는 특혜 대출 사건의 ‘몸통’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이후에도 한보와 정 전 회장 이름이 간간이 언론에 나왔다. 2002년 대장암 진단을 받고 집행정지로 풀려난 정 회장은 2004년 5월 “정상화 방안을 마련해 철강을 되찾겠다"라고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7년 동안 주인을 찾지 못하고 부유하던 한보철강은 그해 현대제철에 인수됐다. 90대가 된 그의 이름은 요즘도 고액 상습체납자 명단이 공개될 때마다 세간에 오르내리고 있다.


흔히 한보 도산은 IMF 외환위기의 신호탄으로 해석된다. 이후 대외 경제 여건 악화와 금융 경색 등으로 줄줄이 기업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한보 사태는 외환 위기의 요인 중 하나인 정경유착, 대기업의 문어발식 확장 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라 볼 수 있다.

삼미그룹

다음 타자는 삼미였다. 대일목재공업으로 시작해 ‘특수강’으로 잘 나갔던 삼미(당시 재계 26위) 역시 바람 앞의 촛불처럼 스러졌다.


삼미의 위세는 한때 사옥으로 쓰였던 ‘삼일빌딩’이 보여준다. 서울 종로구에 있는 삼일빌딩은 70년대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맞은편에는 항상 손가락으로 꼭대기인 31층까지 손가락으로 헤아려보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안타깝게 2차 오일쇼크 타격으로 84년 삼일빌딩을 팔아야 했지만, 삼미는 다시 일어섰다. 80년대 후반 자동차 산업 호황으로 특수강에서 다시 사세를 불렸다. 하지만 두 번째 위기엔 오뚝이처럼 일어나지 못했다. 북미지역 특수강공장 인수와 함께 불어닥친 특수강 경기 불황으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결국 97년 3월 자금난을 겪다 주력기업 ㈜삼미와 삼미종합특수강㈜에 대해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2004년 삼미 슈퍼스타즈 이야기를 다룬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이 개봉했을 때, 삼미그룹이 단체 관람을 주문했다는 기사가 났다. 삼미 슈퍼스타즈는 프로야구 원년팀으로, 삼미가 경영위기 때문에 85년 청보에 넘긴 팀이다. 삼미 직원들이 영화를 본다는 건 97년 법정관리로 뿔뿔이 흩어진 삼미가 아직 건재하단 이야기인가.

출처: 네이버영화
(영화의 실제 주인공 감사용 씨는 삼미특수강 직원으로 근무하며 아마추어 야구단으로 활동하다 삼미 슈퍼스타즈 프로야구단 창단과 함께 구단에 입단했다. 프로야구 첫해 삼미의 성적은 15승 65패. 감사용 투수는 통산 1승 15패 1세이브를 기록했다.)

‘삼미’란 이름만 남았을 뿐, 주인은 바뀌었다. 창업주 일가가 아닌, ㈜삼미를 인수한 기업이 삼미그룹을 운영하고 있다. 2003년 부산을 기반으로 한 삼림종합건설 컨소시엄이 ㈜삼미를 인수했다. 다음 해 삼림건설은 삼미건설로 이름을 변경했다. 현 삼미그룹은 서울에 본사를 두고, 울산과 인천에 철강 가공공장에서 특수강 강판을 생산하고 있으며, 해외 사무소를 설치해 무역 및 버스 운수사업을 하고 있다.

진로그룹

2015년, 10여 년간 해외 도피생활을 하던 장진호 전 진로그룹 회장이 중국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한때 재계 24위 그룹을 운영하던 황태자의 비참한 말로였다. 장 회장은 수천억 원대 분식회계, 비자금 횡령 등의 혐의로 1심에서 징역 5년 6월을 선고받고, 그해 2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나자 다음 해인 2005년 캄보디아로 출국했다.

출처: 동아일보
(장진호 회장.)

‘두꺼비술’로 불리며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는 소주에 더해 카스맥주까지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승승장구했던 진로였지만, 사업 다각화에 발목이 잡혔다. 장학엽 창업주의 아들인 장 전 회장은 88년 회장으로 취임한 뒤, 백화점 케이블방송 주유소업 종이제조업 등으로 손을 뻗쳤다. 취임 당시 15개였던 계열사는 24개로 늘어났다.


자금난에 빠진 진로그룹은 97년 9월 ㈜진로 등 주력 6개사에 대해 법원에 화의(채무자와 채권자가 일정 기간 채무변제를 유예하는 것) 신청서를 제출했다. 앞서 4월 자금난으로 은행권과 ‘부도유예협약’을 맺어 간신히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진로는 부도유예협약 적용 1호 기업으로, 당시 정부는 금융부채 2500억원 이상 대형 기업군에 대해 부도유예 제도를 적용했다.


98년 법원이 화의를 인가함에 따라 진로쿠어스는 99년 OB맥주에, 위스키사업은 2000년 페르노리카에 매각되었다. 5년간 부채 상환을 유예 받은 진로는 98년 10월 ‘참이슬’을 선보이며 회생의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진로를 되찾을 순 없었다. 영업이익이 증가세이긴 했지만 원금을 상환할 수 있는 수준엔 미치지 못했다.

출처: 동아일보
(98년 출시한 참이슬 광고.)

진로의 채권을 가지고 있던 골드만삭스 역시 걸림돌로 작용했다.  장 전 회장 측은 2003년 3월 영업이익 증가, 외자유치 등을 근거로 원금 상환 연장을 채권단에 요청했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최대 채권자인 골드만삭스는 4월 3일 법원에 법정관리 개시를 신청했다. 골드만삭스는 97년 구조조정 컨설팅으로 진로와 연을 맺었다. 진로는 이를 위해 회사의 모든 자료를 제공했다. 이후 골드만삭스는 98년과 99년 한국자산관리공사 등으로부터 진로의 채권을 대량 인수했다. 이 때문에 진로는 “골드만삭스가 비밀 유지 계약을 깨고 제공받은 정보를 이용해 화의채권을 집중 매입한 뒤 법정관리를 신청했다”며 골드만삭스 채권 가압류 신청을 하기도 했다.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법정관리가 개시됐다. 이후 계열사가 분할 매각되면서 결국 진로그룹은 사라지게 됐다. 진로의 핵심인 소주사업은 2005년 하이트맥주로 넘어갔다.

기아그룹

재계 8위 기아마저 무너졌다. 종합금융사(종금사)들이 매일 1000억~2000억원 어음 결제를 돌리기 시작하자 자금 압박에 시달리게 됐다. 결국 기아는 97년 7월 부도방지협약 대상 기업으로 선정됐다. 당시 기아그룹의 여신은 은행 5조3845억원, 제2금융권 4조515억원 등 총 9조4360억원에 달했다. 10대 그룹이 부도를 맞은 건 국제그룹 인위적 해체 이후 처음이었다. 기아 추락은 흔들리던 한국 경제가 IMF행으로 가는 데 직격탄이 됐다.


침몰 원인으로는 자동차 내수시장 침체, 경영진의 무리한 투자 등이 꼽힌다. 불안정한 노사관계와 금융권의 집중적 자금 회수도 기아를 벼랑으로 내몰았다. 금융권은 대기업이 연달아 무너지자 돈줄을 죄기 시작했다.

출처: 동아일보
(기아차 성장에 날개를 달아준 프라이드)
출처: 동아일보
(그리고 90년대 당시 대표 세단이었던 세피아.)

기아그룹은 계열사 축소, 1조9000억원 규모 자산 매각, 인원 감축 등 자구의 노력을 펼쳤다. 부도유예기간이 끝나고 기아는 화의를 요구했지만, 채권단은 그해 9월 법정관리를 택했다. 이후 국제공개입찰이 진행됐다. 삼성, 현대, 대우, 미국 포드 등이 인수 의사를 보였고, 98년 말 현대가 인수 업체에 낙점됐다. 기아차는 99년 수출 50만대, 내수 35만대 등 총 85만대를 판매하며 창사 이래 최대 경영실적을 올려 2000년 2월 법정관리를 졸업했다.


한편, 당시 기아가 무너진 원인이 삼성의 자동차 산업 진출 때문이라는 ‘음모설’이 돌기도 했다. 97년 3월 삼성 비서실이 최고경영층에 올린 ‘신수종 사업 추진현황 및 향후 계획’ 보고서에서 기아차 인수 추진을 언급한 것이 그해 8월 드러나면서 파장이 일었다. 그때까지 삼성은 기아 인수설을 일축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삼성이 정부와 공조해 금융사들이 기아의 자금 결제를 거부하고, 김선홍 당시 기아그룹 회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등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도록 조장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증폭됐다. 이 문제는 2005년 공개된 안기부 ‘X파일’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다시 한번 주목을 받았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삼성은 97년 여야 유력 대선 주자인 당시 이회창, 김대중 후보로부터 삼성의 기아차 인수 지원 약속을 받았다.

대우그룹

‘세계경영’ 한마디로 대우그룹을 설명할 수 있다. 김우중 전 회장은 다른 회사들이 내수 시장에 집중할 때 해외로 눈을 돌려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한때 재계 2위로 도약하기도 했던 대우의 계열사들은 다른 회사에 매각된 이후에도 ‘대우’ 브랜드를 유지하며 여전히 각 분야의 ‘인재 사관학교’로 불린다. 그랬던 대우이기에, 대우 부도가 한국 경제에 미친 영향은 그야말로 핵폭탄급이었다고 할 수 있다.


99년 8월 대우그룹은 워크아웃을 선언했다. 그해 말 대우 총부채는 89조원으로 한국 경제사에 가장 큰 규모 파산 기록으로 남아있다. 대우 위기 신호는 이미 해외에서부터 들렸다. 98년 10월 29일 노무라 증권사는 ‘대우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는 제목의 보고서를 냈다. 대우가 심각한 유동성 위기에 처할 것이며, 최악의 경우 워크아웃에 들어갈 수 있다는 분석이었다. 그 즈음 금융감독위원회가 파악한 대우 채무는 47조7000억원에 달했다. 그중 절반 이상이 회사채와 기업어음(CP)으로, 파산할 경우 일반 투자자들에게 피해가 돌아가게 될 상황이었다.


당시 정부는 IMF 요구에 따라 각 그룹의 부채 비율을 200% 이하로 맞추기 위해 ‘빅딜’을 추진하며 기업들이 부실한 사업을 정리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삼성차와 대우전자의 빅딜도 진행되었다. 삼성차 빚은 대우가 가져가고 대우전자는 삼성이 사들이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협상이 결렬됐고, 삼성자동차는 2000년 프랑스 르노에 매각됐다. 유동성에 숨통을 틔워 줄 빅딜이 무산되자, 금융권은 대우 채권 회수에 나섰다.


출처: 동아일보
(98년 12월 8일자 동아일보 기사)

또 하나의 돌파구였던 GM과의 협상 역시 결렬됐다. 대우는 오랜 협력∙합작사인 미국 GM에 대우차 지분 절반을 팔아 약 70억 달러의 외자를 유치하려 했다. 이를 근거로 구조조정 압박을 피해볼 요량이었으나 GM이 시간 끌기에 나서면서 협상이 깨졌다. 이후 GM은 대우차를 인수해 2002년 GM대우를 출범시켰고, 2011년 이름을 한국GM으로 바꾸었다. 최근엔 한국 시장 철수, 구조조정, 법인 분리 등의 이슈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대우증권은 2017년 미래에셋에 인수합병돼 미래에셋대우가 되었고, 대우인터내셔널은 2010년 포스코에 인수돼 포스코대우가 되었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포스코인터내셔널’로 변경을 추진 중이다. 아직 주인을 찾지 못하고 산업은행이 최대주주로 남아있는 계열사들도 있다. 대우건설과 대우조선해양이 대표적. 대우건설은 워크아웃 졸업 후 2006년 금호아시아나그룹에 매각됐으나 금호그룹 경영악화로 다시 산업은행 품에 돌아왔다. 올해 초 호반건설이 우선협상자로 선정되며 매각되는 듯했으나 결국 무산됐다.


대우그룹 해체를 두고 일각에선 일시적 자금난에 빠진 멀쩡한 회사를 정부가 해체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김 회장은 자신의 저서에서 “김대중 정부 경제관료들에 의해 기획적으로 해체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구조조정을 주도했던 이헌재 전 부총리는 회고록 ‘위기를 쏘다’에서 “대우가 해체된 건 시간 싸움에서 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른 5대 그룹이 자산 매각, 외자 유치 등을 통해 적극 구조조정에 나선 것과 대조적으로 대우는 소극적이었다는 것. 이 전 총리는 “98년 제출한 그룹별 구조조정 계획에서 삼성과 현대는 목표치 100% 이상, SK와 LG는 90% 이상의 자구 노력을 달성했지만 대우는 18.5%에 불과했다”고 회고했다. 또 뒤늦게 김 회장이 "모든 것을 던지겠다"고 말했지만, 열흘 뒤 영국으로 떠나버린 것 역시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밝혔다.

그 외에도 많은 기업이 무너졌다. 한라, 대농, 뉴코아, 청구, 나산, 해태, 극동건설 등. 기업평가사이트 CEO스코어에 따르면 IMF 외환위기 당시인 98년 한국의 30대 그룹 가운데 2017년 기준으로 남아있는 곳은 11곳에 불과했다. 밀려난 19곳 가운데 11곳은 해체됐고, 8곳은 순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2001년 8월 23일 우리나라는 IMF로부터 빌린 돈을 모두 갚으며 당초 예정보다 약 3년 먼저 IMF 체제를 졸업했다. 하지만 IMF는 여전히 국민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경기침체 징후가 나타날 때면 어김없이 ‘제2의 IMF’를 우려한다. 지난 50년간 한국경제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로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IMF를 꼽는다. (2017년 KDI의 ‘IMF 외환위기 발생 20년 대국민 인식조사’ 결과 응답자의 57.4%가 가장 어려운 시기를 IMF라 답함)


지금도 경제 위기를 말하지만, 그때만큼은 아니었다. 당시 주식시장이 무너져 코스피 지수가 97년 12월 400선을 밑돌다 다음 해 280까지 떨어졌다. 원∙달러 환율은 한때 2000원대로 치솟았다. 유학생들은 짐을 싸 돌아왔다. 98년 통폐합 대상이었던 제일은행 테헤란로지점 직원들의 일상을 담은 영상은 ‘눈물의 비디오’로 불리며 많은 사람들의 눈시울을 붉혔다. 모두가 비슷한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혹독한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기업 건정성과 경쟁력은 일부 제고되었다. 하지만 정리해고 등으로 인한 비정규직 양산, 소득격차 빈부격차 등 양극화 심화 등의 부정적 영향은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있다.

인터비즈 박은애
inter-biz@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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