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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혜원의 목포와 압구정동의 몰락

조회수 2019. 2. 15. 18:5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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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압구정동에 가면 모든 게 새로웠다. 어떤 때는 불편할 정도로 새로웠다. 멋진 카페와 레스토랑, 보지도 못했던 물건을 파는 가게, 길을 가는 사람들의 옷차림까지. 그래서 돈이 없어 비록 떡볶이만 사먹고 집에 돌아올지언정 가끔 놀러 갔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취직을 하고 바쁘게 회사를 다니는 사이 2000년대 언제부턴가 압구정동 상권이 몰락했다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출처: 주간동아(우)
(1990년대 압구정 로데오 거리와 2016년의 압구정 로데오 거리)

그 사이 가로수길이 뜨기 시작했고, 경리단길이 떴다. 홍대와 대학로는 부침은 있었지만 여전히 잘 나가고 있다. 가장 화려해 보였던 압구정동은 이제 더 이상 가고 싶고 걷고 싶고 놀고 싶은 거리가 아니다. 방배동 카페골목도 상권이 쇠퇴했고 명동은 이제 길거리 노점상이 가장 큰 볼 거리로 전락을 한 지가 꽤 된다. 이렇게 서울 속의 다른 공간들이 끊임 없이 뜨고 지는 데 반해 홍대와 대학로는 죽지 않았다.


왜 그런 걸까? 조직생태학 등 경영 조직 이론 분야의 권위자인 성균관대 경영전문대학원 김태영 교수에 따르면 이는 지역의 창의적이고 창업을 장려하는 기운의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 지역 문화와 상권을 만들어 가는 주체들의 성향에 따라 해당 지역의 정체성이 정해지는데, 창의적이고 새로운 기운의 유입이 이뤄져야 오래간다는 의미다. 스탠포드대와 버클리 출신의 엔지니어들이 꾸준히 유입되면서 미국 실리콘밸리를 만든 것처럼 말이다.

출처: 동아비즈니스리뷰(DBR) 108호 ‘지역 클러스터, 샘솟는 창업분위기가 생명줄’

우리가 ‘홍대’라고 부르는 지역은 1980년대 초 홍익대 미대생들의 작업실 문화에서 출발했다. 들고 다니기 어려운 미술작품들의 특성 때문에 미대생들은 학교 앞에 공동으로 작업실을 구해 작업을 했다. 그렇지만 하루 24시간 그림만 그릴 수는 없는 일이다. 밥도 해먹고 놀기도 하고 술도 한 잔 해야 했다. 그러다가 옆 건물에서 공사 하고 남은 자재로 가구를 만들었고 가게를 만들었다. 그렇게 미대생들이 만들었음직한 빈티지스러운, 멋진 카페들이 생겨났다. 창고와 가정집을 개조한 독특하고 아름다운 가게들이 나타났다. 1990년대에는 음악으로 중심이 이동했고 파티문화와 클럽문화가 홍대를 이끌었다. 하지만 홍대도 부동산 가격 상승이라는 시장원리를 이길 수는 없는 노릇. 사람들이 몰리자 홍대에도 거대 자본이 들어왔고 미대생들의 작업실은 이제 비싼 월세에 상수동과 연남동으로 밀려나가 ‘오프 홍대’를 형성하게 됐다. 그렇지만 홍대 미대라는 창의적인 기운은 여전히 홍대를 떠받치는 정체성으로 남아있다.

출처: 신동아
(대학로의 거리공연과 문예회관 앞 조형물. '예술은 삶을 예술보다 더 흥미롭게 한다'는 문구가 새겨져있다.)

대학로는 1980년대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들어서서 먼저 판을 깔았지만, 연극과 뮤지컬, 예술 영화의 창의적인 분위기가 홍대에서 미대가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가로수길은 1990년대 후반 외환 위기 이후 화랑들이 들어서면서 시작이 됐다. 하지만 거대 자본이 장악을 하면서 화랑들이 떠나기 시작했고 이젠 패션의 거리로 변하고 있다. ‘세로수길’로 확장했지만 더 이상 과거의 모습은 잘 느껴지지 않는다. 완전히 떠버린 경리단길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출처: 동아일보
(경리단길의 모습)

상권도 결국은 시장이다.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하면 자본이 흘러 들어오게 돼 있다. 하지만 도시와 상권이 시장과 다른 점이 있다면 기본적으로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점이다. 아무리 멋들어진 고급 건물이 들어서더라도 사람의 향기와 삶의 낭만이 없다면 상권은 그저 자본만 사는 공간으로 전락하게 될 뿐이다. 자본은 자본을 부르기 때문에 자본 중심으로 돌아가는 상권은 부동산 가격과, 임대료, 서비스와 물건 값이 모두 오르게 된다. 그러면 사람들이 점차 발길을 끊는다. 처음부터 사람보다는 자본의 힘이 성장을 이끈 압구정동의 몰락이 이를 잘 보여준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작고 창의적이고 예쁜 가게들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다. 덕분에 사람들이 많이 찾기 시작한다. 그러면 사업의 기회를 포작한 대형 브랜드와 프랜차이즈가 들어 온다. 이 때 임대료가 오르기 시작한다. 오른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는 작고 예쁜 가계들은 밀려난다. 자본이 아닌 창의력에 의존하는 작은 가계들은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다. 아이디어 중심의 새로운 가게도 더 이상 생겨나지 않는다. 동네는 과거의 매력을 잃는다. 상권은 쇠퇴한다. 물론 자본 없이는 상권이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적당한 창업의 기운이 없이 자본만으로는 상권이 커갈 수 없다.

출처: 채널A

손혜원 의원이 목포 문화재 거리에 건물을 사들였다고 해서 시끄러운 모양이다. 투기인지 아닌지, 이해충돌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적어도 투기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 같다. 다만 그가 혼자 힘으로 한 거리를, 한 상권을, 한 도시의 일부를 되살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혼자서 사람의 향기와 삶의 낭만을 이야기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가 나중에 목포의 문화재 거리를 살려놓는다면 박수를 보낼 것이다. 하지만 창업의 기운이 사라진 거리에 혼자서 자본을 투자한다고 가게가 새로 생기고 사람들이 돌아올까. 아무리 안목이 높고 돈이 많아도 혼자서는 못하는 일이 있는 거다. 그게 도시의 원리고 시장의 원리다. 투기가 아님에도 그가 욕을 먹는 이유는 이런 행동을 사람들이 오만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거다.

※ 이 글은 동아비즈니스리뷰(DBR) 108호에 성균관대 경영전문대학원 김태영 교수가 쓴 ‘지역 클러스터, 샘솟는 창업분위기가 생명줄’을 참고 했습니다.

필자 김선우

약력

- 브리티시 컬럼비아대 인문지리학과 졸업

- 워싱턴대(시애틀) 경영학 석사

- 동아일보 기자

- 새로운 삶을 발견하기 위해 현재 미국 시애틀 근처 시골에서 작은 농장 운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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