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꾼 루이비통은 어떻게 세계적 명장이 됐나
보물 상자하면 대개 영어 ‘D’자를 왼쪽으로 눕힌 뚜껑이 볼록한 나무 궤짝을 떠올린다. 클레오파트라 여왕이 즉위할 때 주변 부족에게 받은 예물 상자도, 스페인 정복자 코르테스가 아즈텍 왕국에서 약탈한 보물을 실은 상자도 모두 이런 모습이다.
보물상자는 왜 이렇게 생겼을까? 왕족이나 귀족의 입장을 생각해 보자. 그들의 가장 큰 고민은 보물이 도난당하는 것이다. 보물 궤짝은 훔쳐 가기 어렵도록 묵직해야 했고, 웬만해서는 파손되지 않도록 튼튼해야 했다. 그래서 단단한 재목을 큰 못으로 박고, 가로세로로 부목을 덧붙이고, 모서리에 쇠로 된 조각을 달아 좀처럼 깨지지 않도록 제작했다.
보물상자를 뜯어고쳐 여행용 트렁크를 만들다
프랑스 나폴레옹 3세의 황후(외제니 드 몽티조)는 패션과 연회에 관심이 많았다. 스커트 단이 넓게 퍼진 크리놀린 드레스를 입었고 타조 깃털로 화려하게 장식한 모자를 즐겨 썼다. 황후는 나들이를 갈 때마다 호화롭게 행차했다. 당시 파리의 패션을 주도하던 황후의 짐을 싸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루이 비통은 황후의 전담 짐꾼이었다. 그는 보물 상자를 계속 개발해 많은 짐을 꾸리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루이 비통은 1821년 프랑스 동부의 안쉐(Anchay)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재혼하자 루이 비통은 엄격한 계모와 시골 생활에 염증을 느꼈다. 그는 13살에 무작정 파리로 상경했다. 470km나 떨어진 파리에 도착하는 데 2년이 넘게 걸렸다. 지나가는 마을의 목공소나 식당, 마구간에서 일을 하고 끼니를 때우면서 여비를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때 루이 비통은 목재를 비롯해 가죽, 가구, 염색, 자물쇠 같은 다양한 재료나 제품을 다루는 기술을 익혔을 것으로 보인다. 파리에 도착한 루이 비통은 당시 최고의 짐짝 장인으로 꼽히는 무슈 마레샬(Monsieur Marechal)을 찾아가 본격적으로 일을 배웠다. 루이 비통은 이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했다. 그의 궤짝은 좀처럼 깨지지 않았고, 싼 짐은 별로 흐트러지지 않았다. 맡은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자 마레샬은 루이 비통에게 외제니 황후의 일을 맡겼다.
루이 비통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본 황후는 1854년 까푸신느 4번가에 포장 전문 가게를 열도록 후원하고 부유한 귀족 손님까지 알선해줬다. 루이 비통은 ‘옷을 가장 정교하게 잘 싼다’는 황후의 칭찬을 들으며 자신의 강점을 정확히 파악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건 가게를 열면서 ‘어떤 깨지기 쉬운 물건도 안전하게 포장해 드립니다. 드레스 포장 전문’이라는 간판을 걸었다.
루이 비통은 보물상자를 만드는 목재로 포플러를 택했다. 8~10년 된 포플러는 가볍고 질긴 데다 물에 잘 젖지 않아 궤짝을 짜는 데 제격이었다. 궤짝을 짜는 데는 못 대신 리벳과 아교를 주로 사용했다. 못은 녹이 쉽게 스는 데다 목재를 갈라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 둥근 뚜껑 대신 납작한 뚜껑을 달아 여러 겹으로 쌓을 수 있도록 했다.
문제는 방수(防水)였다. 양가죽이나 돼지가죽은 오래되면 퀴퀴한 냄새가 나고 곰팡이가 슨다. 루이 비통은 당시 화가들이 주로 쓰는 캔버스를 떠올렸다. 아마를 굵은 씨줄과 날줄로 오밀조밀하게 엮은 마포에 풀을 몇 차례 먹여 궤짝에 붙였다. 이것이 1858년 등장한 루이 비통의 첫 작품 ‘그레이 트리아농 캔버스(Gray Trianon Canvas)’다. 외제니 황후가 즐겨 찾던 베르사유 궁전의 별궁, 트리아농에서 그 이름을 땄다.
가볍고 튼튼해서 운반하기 편한 데다 비에 젖을 우려도 적고 좁은 공간에 많이 실을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이 가방은 파리의 왕족과 귀족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또한 루이 비통은 황후가 의상마다 챙기는 패물이 각기 다른 것을 떠올리고, 궤짝 안에 작은 칸을 만들거나 서랍을 달아 작거나 파손되기 쉬운 패물을 함께 담았다.
루이 비통은 잠금장치에도 신경을 썼다. 당시 보물상자들은 도난에 대비해 자물쇠와 열쇠를 다르게 만들었다. 그래서 열쇠를 헷갈리거나 자칫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낭패였다. 그는 자신만의 열쇠 하나로 여러 자물쇠를 열 수 있는 텀블러 잠금장치를 개발했다. 지금 루이비통 가방의 잠금장치는 액세서리로 남았지만 여전히 고객의 물건을 안전하게 보호한다는 믿음을 준다.
여행의 시대를 예측하다
루이 비통은 시대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해, 이에 걸맞는 가방을 새롭게 내놓았다. 견습공으로 일하던 1837년 작업소와 가까운 생제르맹 역에서 파리의 첫 기차 노선이 개통되는 것을 보고 앞으로 교통수단의 발달로 여행이 늘어날 것이라 내다봤다. 여행의 시대가 열릴 것을 일찌감치 파악한 것이다.
증기가 동력을 공급하기 시작하면서 세상은 새로운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마차에 싣던 묵직한 궤짝은 기차의 좁은 공간에 싣기 어려웠다. 루이 비통은 옷을 걸어 보관할 수 있는 워드로브(Wardrobe)를 개발했다. 기차 여행을 위해 작게 줄인 옷장 같은 트렁크를 만든 것이다. 루이비통은 1883년부터 파리-이스탄불을 달리기 시작한 오리엔트 특급열차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브랜드가 됐다.
증기선은 빠른 속도로 범선을 밀어냈다. 1838년 그레이트웨스틴 호가 대서양 항로를 개척하면서 귀족들의 증기 유람선 여행이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루이비통은 객실 침대칸 밑에 넣을 수 있는 캐빈트렁크(Cabin Trunk)와 납작하게 접을 수 있는 스티머백(Steamer Bag)을 선보였다.
자동차는 빠른 속도로 기차를 따라잡았다. 1886년 독일의 칼 벤츠가 내연기관 자동차를 발명하면서 자동차 여행이 신흥 부자들의 자랑거리가 됐다. 루이비통은 1897년 독일 베를린에서 처음 열린 모터쇼에서 자동차용 트렁크를 소개한 데 이어 1905년 예비 타이어를 두는 자리에 딱 맞는 드라이버백(Driver Bag)을 발표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면서 운반도구는 남성 위주의 트렁크 형태에서 여성 위주의 핸드백 형태로 옮아갔다. ‘옮기는 가방’이 아니라 ‘드는 가방’ 시대가 열린 것이다. 루이비통은 1901년 스티머백을 내놓았다. 스티머백은 증기선을 오래 타면 늘어나는 빨랫감을 담기 위한 가방이었다. 이어 항공여행용으로 가볍고 질긴 소프트백이 인기를 끌면서 본격적인 핸드백의 시대가 열렸다. 그는 교통수단의 발달로 새로운 가방에 대한 수요가 생길 때마다 발 빠르게 대응했다.
‘모든 걸 담는다’는 뜻을 가진 키폴백(Keepall Bag), 바쁜 여성을 위한 스피디백(Speedy Bag), 샴페인을 담는 노에백(Noe Bag), 젊은 여성의 가방에서 영감을 얻은 파피용백(Pappillon bag), 업무가 많은 여성을 위한 네버풀백(Neverfull Bag), 고전적인 여성스러움을 강조한 티볼리백(Tivoli Bag)…. 루이비통의 핸드백 라인은 시대를 따라 진화하고 있다.
투박했던 한 소년의 여정, 세계 패션 트렌드를 낳다
시골뜨기 루이 비통에게 파리는 방랑의 목적지이자 인생의 목표였다. 이곳에서 그는 시대의 흐름을 읽고, 가방에 새로운 가치를 더했다. 시작은 투박하고 무거운 보물상자였지만 루이 비통은 그 틀을 깼다. 외부 환경에 기민하게 대처하며 다양한 아이디어를 고안했다. 세계 패션 트렌드를 주도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다.
루이비통 가방에는 루이 비통의 여행 경험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조그만 시골 마을에서 파리, 하나로 연결된 세계까지 모두 엿볼 수 있다. 루이비통 가방을 들고 여기저기 바쁘게 쏘다니는 사람들에게 소년이 가만히 묻는다. '당신은 어떤 여정을 걷고 있나요?'
필자 허두영
필자약력
- 과학동아 편집장
- 테크업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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