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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6주 만에 프랑스 점령한 독일군, '전격전 신화'의 서막을 올리다

조회수 2018. 12. 29. 11: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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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전쟁에서 독일의 고민은 두 개의 전선을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쪽에는 러시아, 서쪽에는 프랑스와 영국이라는 강적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 물자와 병력에서 열세인 독일이 한쪽 전선에서만 승리하려고 해도, 물자와 병력을 집중 투입해 단기 승부를 내야 했다. 그래서 고안한 전술이 벨기에로 우회해 프랑스로 침공하는 슐리펜 계획이었다. 하지만 1차 대전 당시 독일군의 기습은 실패로 끝났다.

출처: britannica encyclopedia
(벨기에의 중립을 침범하여 프랑스 북부로 침입하며, 파리를 서쪽에서 크게 우회하여 프랑스군의 주력을 프랑스 동부로 몰아넣고 전멸시키겠다는 슐리펜 계획)

1940년의 상황도 달라지지 않았다. 프랑스군의 병력, 전차, 포의 비율은 독일군 화력의 두 배에 가까웠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기갑부대와 탱크가 독일의 상징이 돼버렸지만, 개전 초만 해도 독일 전차의 성능은 영국이나 프랑스보다 못했다. 독일 탱크의 장갑 두께는 영불 전차의 절반에 불과했다. 적군 전차를 파괴하기에는 한참 부족한 탱크포였다. 항공전력 역시 부족한 점이 많았다.


독일군 총사령부는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검토해도 그들이 쓸 수 있는 전술이 슐리펜 계획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를 성공시키려면 더 빠른 기동, 더 대담한 강타, 그리고 기만과 함정이 필요했다. 하지만 프랑스 역시 이를 알고 벨기에 국경을 단단히 봉쇄하던 참이었다. 1차 대전 당시 1000만에 가까운 사상자를 내면서도 돌파하지 못했던 영불 국경에는 마지노선이라는 강철 요새가 세워졌다. 이 상황에서는 슐리펜 계획 자체가 프랑스군이 쳐놓은 덫으로 뛰어드는 격이었다. 


그러나 결국 개전 직전 총사령부가 마련한 진공 계획은 슐리펜 계획의 복사판이었다. 히틀러가 보기에도 그것은 무모하고 자멸적인 계획이었다. 대다수의 독일 장성들은 전쟁이 터지면 또 1000만은 죽어나갈 것이라는 우울한 트라우마에 휩싸였다. 이때 A집단군 사령관 만슈타인 중장과 휘하 군단장 구데리안이 획기적이고 새로운 전술을 제안했다.

아르덴 돌파... 그리고 전격전의 탄생

출처: 위키피디아
(탱크를 타고 프랑스로 진격하는 독일군들)

1차 대전 때 독일군은 도보로 진군했고, 기차와 엉성한 차량으로 보급품을 수송했다. 그것이 속도와 집중력의 한계를 낳았다. 만슈타인은 새로운 무기인 탱크가 기동과 집중력을 겸비한 무기라는 사실에 착안했다. 당연한 얘기 같지만 1940년대 당시만 해도 탱크로부터 이런 가능성을 본 장군은 나라마다 10명도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탱크도 마지노선과 벨기에의 요새지대를 단숨에 돌파할 수는 없었다. 만슈타인은 중간에 빈 곳을 발견했다. 마지노선과 벨기에 사이에 펼쳐진 아르덴 삼림이었다. 프랑스는 이곳은 기갑부대의 돌파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적군의 침공에 대한 대비도 느슨했다. 만슈타인의 계획은 이곳을 돌파하는 것이었다. 돌파 후 기갑군을 둘로 갈라 한 부대는 대서양까지 그대로 직진해 벨기에로 들어간 프랑스군과 프랑스의 연결로를 잘라버린다. 또 다른 부대는 좌회전해 마지노선의 뒤로 내달려 역시 프랑스군을 역(逆) 포위한다. 이렇게 하면 별다른 전투 없이도 단숨에 전 프랑스군을 궤멸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출처: 위키피디아
(히틀러와 만슈타인)

작전도상으로는 환상적인 계획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계획에는 장애물이 너무 많았다. 다른 사령부 장군들에게 만슈타인의 작전 계획은 대단히 위험한 도박으로 보였다. 하지만 히틀러의 생각은 달랐다. 1차 대전 당시 지옥의 참호전을 경험했던 히틀러는 참호전을 피하고 재빨리 전쟁을 끝낼 수 있는 만슈타인의 계획에 매료됐다. 그가 군사지식에 문외한이었던 것도 오히려 도움이 됐다. 그렇게 히틀러의 강력한 명령으로 만슈타인의 계획이 채택됐다.


1940년 5월 10일 독일군이 프랑스를 향한 진격을 개시했다. 독일군은 단 4일 만에 프랑스 방어선을 완전히 통과했고, 6월 22일에 프랑스의 항복을 받아냈다. 1000만의 전사자를 내고 6년은 족히 걸릴 것이라던 전쟁이 6주 만에 끝났다. 세계는 경악했다. 공격을 주도한 히틀러와 구데리안조차 "이건 기적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독일이 보여준 이 전격전은 현대전의 신화가 됐다.

철저한 계획과 유연한 사고가 승리의 비결

출처: 위키피디아
(아르덴 숲의 전경)

이 놀라운 승리의 비결은 무엇일까? 본래 기갑부대가 아르덴을 통과할 수 없다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탱크가 통과할 수 없다는 의미와, 전격전을 성공시킬만큼 대규모 기갑부대가 신속하게 통과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독일군도 이 작전이 성공하려면 5일 안에 스당에서 마스강을 건너야 한다고 봤다. 그러나 아무리 빨라도 10일은 걸릴 것이라는 것이 자체 평가였다.


만에 하나 프랑스군의 반격을 받기라도 하면 속수무책이 된다는 것도 무시무시한 한계였다. 프랑스군이 조금만 거세게 저항한다면 독일군은 좁은 도로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게 된다. 돌파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독일군이 프랑스군의 후방으로 진군하는 동안 프랑스군이 독일군의 측면으로 역습을 가해오거나 독일군의 보급로를 끊어버린다면 독일군은 프랑스군의 배후를 포위하기는커녕 적진 한복판에 고립돼 버릴 수도 있었다. 결국 승리의 관건은 속도였다. 독일군은 아르덴의 좁은 산길과 방어선을 단숨에 돌파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기갑부대의 속도를 좌우하는 열쇠는 연료 보급이었다. 처음에는 탱크에 연료 드럼통을 싣고 달리는 방법을 구상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러자 한 보급 장교가 드럼통 보급이란 방법을 생각해냈다. 100km마다 연료를 채운 드럼통을 준비해두면, 지나가는 탱크는 드럼통을 실어 연료를 보충하고 지정된 장소에 버린다. 그러면 중간중간에 편성된 보급부대가 드럼통을 회수해 연료를 채워 다시 지정된 장소에 배치하는 것이다. 그들은 매사에 철저한 독일군답게 연료 소모량을 정확하게 계산해서 드럼통을 배치했고, 탱크의 기계 피로도를 계산해 탱크를 쉬게 해야 할 곳에서 연료를 보충하도록 했다. 이로써 급유 시간을 소모하지 않고 전진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예측 가능한 문제와 대응책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예측이 불가능한 수많은 돌발 상황으로 채워진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독일군이 도입한 방법이 그 유명한 임무형 전술이다. 모든 장교들에게 임무수행을 위한 판단력과 적절한 재량권을 부여해 자유롭고 창의적인 전술 행동을 보장하는 지휘체계다. 이를 바탕으로 독일군들은 적의 벙커에 막히고 강력한 방어선에 부딪힐 때마다 현지 지휘관의 즉각적인 판단에 따라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임무형 전술의 문제점은 임무와 임무가 충돌할 때 발생한다. 소대장의 돌발 행동이 중대의 계획에 차질을 줄 수 있고, 대대의 행동이 사단 전체의 전략을 망칠 수도 있다. 만에 하나 작전이 실패할 경우에는 독단적 행동을 한 하급 지휘관이 모든 책임을 모조리 뒤집어쓸 수도 있다. 그래서 임무형 전술을 계획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임무와 재량의 한계, 책임소재를 어떻게 정하느냐는 것이다.


이에 독일군들은 결코 시나리오대로 움직이지 않는 실제적 훈련을 거듭했고, 장교들에게는 철저한 사명감, 그리고 지휘관들에게는 임무형 전술의 효과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심는 데 주력했다. 그렇게 그들은 창의적 해결 능력과 유연한 사고, 그리고 갈등과 책임 전가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배워나갔다.

아집과 독선이 낳은 처참한 패배

그러나 사실 전격전의 최고 공로자는 그 누구도 아닌 프랑스군 자신이었다. 프랑스군은 자신들이 세운 방어 전술에 완고하게 집착한 나머지 아르덴 습격의 가능성에 대한 경고, 독일군이 아르덴에 집결하고 있다는 첩보를 모두 무시했다. 심지어는 공격 당일 독일군 기갑 대열을 발견한 정찰기의 보고마저도 무시했다. 이때 공습을 가했다면 아르덴을 꽉 메운 독일군은 꼼짝없이 대량 학살을 당했을 것이다.

출처: flick

기동전에 대한 예행 훈련이 없었던 것도 치명적이었다. 프랑스군은 독일군과 달리 전격전에 대해 이론적으로만 접근했다. 그들은 측면이 무너지면 끝이라는 전술 교리만을 신봉한 채 전선의 대열 유지에만 집착했다. 누구도 대열에서 뛰쳐나가 신속하게 독일 기갑부대의 측면을 공격하려 들지 않았다. 반대로 독일군이 전선의 일부만 돌파해도 전 전선이 싸우지도 않고 물러섰다. 부분적으로 용감하게 저항하던 병사들도 그들의 뒤에서 독일 전차가 나타나면 소총을 집어던지고 도망치기 일쑤였다. 현대전에서 보급로가 끊긴다는 것이 병사들을 얼마나 공황상태로 몰아넣는지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이다. 반면 독일군들은 이런 상황을 충분히 숙지하고 대응방법을 훈련했기에 측면 노출 및 고립 공포증에서부터 자유로웠다.


1940년 독일군의 기적적인 승리는 천재의 혁신적 사고, 구성원의 철저한 사명감, 충분한 훈련을 통한 구성원의 창의성과 효율성 극대화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반면 프랑스군은 경직된 태도와 아집에 사로잡혀 독일군보다 월등한 화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에서 패했다. 오늘날 많은 기업이 임무형 전술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임무형 전술은 확고한 사명감, 상하 간의 상호 신뢰, 충분한 훈련과 경험의 공유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출처 프리미엄 경영 매거진 DBR 94호
필자 임용한

인터비즈 임유진, 이방실 정리

inter-biz@naver.com

* 미표기 이미지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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