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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난공불락' 요새 강화도, 하루만에 몰락하다

조회수 2018. 11. 11. 11: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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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는 몽골군의 침공을 막아내며 난공불락의 요새라는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병자호란 때 청나라군은 뗏목과 부교를 이용해 하루 만에 강화도를 함락시켰다. 강화도는 요새로서 장점이 있었지만 해안선이 너무 길어 방어가 어렵다는 단점도 있었다. 외부 정보와 지시이 단절된 상황에서 선조들은 난공불락 요새에 대한 맹목적 신념을 갖고 있었다. 닫힌 세상에서 제한된 정보만 받아들인데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안전만 추구하는 심리 상태에서 난공불락의 요새에 대한 맹목적 믿음은 커져만 갔다. 외부 지식을 적극 받아들이고 현실에 안주하지 말아야 요새도 의미가 있다.


고려는 몽골군의 침공을 피해 개경에서 강화로 수도를 옮겼다. 강화 천도는 최우(최충헌의 아들)의 결단력과 판단력이 돋보인 작품이었다. 고려의 최고 귀족층과 부호들이 포함된 개경 주민의 반대가 엄청났다. 하지만 최우는 강한 추진력으로 단숨에 천도를 해치웠다. 그렇게 강화도는 1232년부터 1270년까지 고려의 수도가 됐다. 그리고는 강화는 놀랍게도 몽골군을 막아냈다. 40년간 몽골군은 전국을 유린했지만 강화도는 위협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공격하지 못했다.


이후 강화도는 이 세상에서 누구도 막아내지 못한 몽골군의 침공을 막아낸 요새라는 명성을 얻었다. 이후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포함해 많은 전란 때마다 강화도는 정부의 피난처 내지는 주요한 군 주둔지로 애용됐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강화산성)

강화가 요새지로 각광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섬이어서 해전에 약한 몽고족이나 만주족과 싸울 때 유리했다. 섬의 외곽은 갯벌과 산으로 둘러싸여 자연 방어선을 형성하고, 그 안은 넓은 분지여서 평야와 집터를 제공한다. 강화도 주변의 바다와 물줄기는 물살이 빠르고 암초가 많다. 특히 지금 강화대교가 놓인 강화와 육지 사이의 좁은 수로는 화물선들이 자주 난파하는 위험 지역으로 악명이 높았다. 물살이 세서 시간을 놓치면 수로를 거슬러 올라가지 못해 바람과 조류가 바뀔 때까지 대기해야 했다. 이때 날씨가 나빠지면 배들은 힘을 쓰지 못하고 암초에 부딪혔다.


게다가 바다는 강처럼 쉽게 얼지 않는데, 이것이 큰 장점이 되었다. 내륙에 있는 강은 겨울이면 얼어붙고, 여울목이 많아서, 길을 안내하는 사람만 잘 두면 쉽게 도강할 수 있었다. 그래서 북방 민족은 거의 겨울철에 침공을 해왔다. 하지만 강화도는 그럼 점에서 보다 안전했다. 


정부가 피난을 한 뒤에도 그 기능과 통제력을 상실하지 않으려면 세금을 받고, 행정망을 유지해야 했다. 강화도 주변의 바다는 험하기는 했지만, 개경, 서울과 가깝고 임진강, 한강, 예성강 하구여서 수운과 육운이 모두 가능한 교통의 요지였다. 남쪽으로는 섬들이 이어진 서해안이 펼쳐져 있다. 그래서 만에 하나 강화도가 위험에 처하더라도 우세한 해군력을 이용해서 서해안을 따라 도망갈 수 있었다. 조금 비겁한 이야기 같지만 전략적으로 퇴로가 열려 있다는 것은 중요했다. 일부러 막힌 지형에 들어가 옥쇄를 택하는 것은 용감하지만 무책임한 태도이기도 하다. 

출처: 인터비즈
(천혜의 요새로 불리었던 강화도)

병자호란 때 허망하게 함락된 강화도


그런데 몽골 전쟁기에는 정말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했던 강화도가 병자호란 때는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허망하게 함락되고 말았다. 청나라 군은 뗏목과 부교를 이용해 쉽게 강화도로 건너왔다. 그리고 처참한 학살과 비극이 벌어졌다.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해안 방어를 맡았던 수비 대장에게 책임을 돌렸지만, 사실 그의 책임이라고 할 수도 없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청나라의 깃발)

강화도가 난공불락의 요새라는 믿음에는 몇 가지 오류가 있었다. 그 오류의 첫 번째 원인은 닫힌 세상이었다. <열하일기(熱河日記)>의 저자 연암 박지원은 18세기 조선의 지식인 중에서 그 누구보다도 열린 지성을 지닌 선각자였다. 조선의 모든 사람들이 청나라를 오랑캐인 만주족이 세운 나라라고 굳이 멸시하고 외면할 때, 그는 중국을 선진국으로 인정하고, 진정으로 우리가 배우고 나아갈 바를 찾고자 했다. 그러나 중국 여행을 하기는 쉽지 않았다. 겨우 기회를 잡아 압록강 가에 섰을 때, 그의 나이는 44세였다.


불혹의 나이에 도달한 압록 


강이었지만 강은 그에게 쉽게 길을 내어주지 않았다. 때는 7월, 한창 장마철이라 강물이 무섭게 불어 배를 띄울 수가 없었다. 호탕하게 흘러가는 강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던 박지원은 이런 글을 남겼다. “압록강은 아주 큰 강으로 중국의 양자강, 황하에 이어 세 번째로 큰 강이다.” 


이 착각은 박지원만의 잘못은 아니다. 여행이 쉽지 않고, 정보가 단절되어 있던 조선 사회의 현실이다. 그러나 누구 탓이든 이 하나의 오류는 강화 함락뿐만 아니라 조선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들의 요인이 되었다. 


박지원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강이라고 보았던 압록강 하구는 강화와 김포 사이의 바다와 한강 하구와 폭이 비슷하다. 대동강의 폭도 대략 비슷하다. 즉 조선 시대 사람들은 강화 수로와 한강과 대동강을 건너는 것을 세계에서 제일 큰 강을 건너는 것과 같은 수준으로 이해했다는 이야기이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강화산성 초지진)

몽골군은 수군이 없어서 해전에 약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세계를 정복하면서 이 정도의 강은 수도 없이 건넜다. 선박을 이용해서 해전을 하지 않아도 뗏목이나 부교를 놓고 강을 건넜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던 조선에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물의 장벽을 난공불락의 방어선으로 간주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한 달 후 호남 지방에서 피난 생활을 하던 한 사대부는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도주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했다. 마음만 굳게 먹으면 얼마든지 사수할 수 있는 요새를 너무 쉽게 포기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말한다. “도성의 성벽은 높고, 앞에는 넓은 한강이 있다. 왜군이 새라서 날아서 넘어올 것인가. 물고기가 되어 헤엄쳐 건널 것인가” 


얼마 후 대동강을 앞에 두고 있는 평양성에서도 똑같은 주문이 되뇌어졌다. 사실은 그뿐이 아니다. 유성룡이 쓴 <징비록(懲毖錄)>을 보면 갈수기에는 바지를 걷고 건널 수 있는 작은 강을 앞에 두고도 왜군이 물고기가 아닌 이상 이 넓은 강을 어찌 건너겠는가라고 주장하며 강 건너편에 성벽을 축조하려는 계획을 반대했다는 기록이 있다. 


설사 이 정도 강이 세계에서 몇 번째 안에 들어가는 큰 강이라고 해도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이미 임진왜란 때 충분히 증명되었지만, 사람들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강화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 함락의 비극이 있은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출처: 영화 '남한산성'
(병자호란을 그린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지식 부재가 가져온 경직된 사고


여기에 두 번째 이유가 숨어 있다. 닫힌 세상, 새로운 정보와 지식의 부재는 경직된 사고를 가져온다. 한성 함락, 평양성 함락, 강화 함락 같은 엄청난 비극들도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지 못한다. 상식적으로 믿어지지 않지만 이는 역사로 증명된 사실이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다른 판단이나 방법을 모색할 수 있는 정보나 단서가 없기 때문이다. 사고와 발상의 전환을 가져다주는 새로운 정보의 유입이 차단되어 있다 하더라도, 박지원이 조선의 현실을 두고 고민했던 것처럼 과거의 생각과 방법이 위험하다는 경고성 정보는 존재할 수 있다. 


사료를 뒤져 보면 강화도에 대한 믿음에 회의를 주는 경고성 정보가 분명히 있었다. 그 기록이 깊게 감춰져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고려사(高麗史)>를 보면 몽고군이 정말로 강화도를 공격할 준비를 하자 정부의 논의는 당장 방어불가론으로 바뀐다. 그 이유도 간단했다. 강화도는 너무 넓어서 해안선을 다 지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강화도의 해안선 길이는 99km이다. 고려 시대에는 남쪽 섬이 분리되어 있어서 이보다는 좀 짧았을 것이다. 70km라고 잡고, 1m당 1명의 병사를 세운다고 해도 7만 명이 필요하다. 1일 3교대로 배치하면 21만 명이 필요하다. 


잠깐의 계산으로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사람들은 이 정보를 무시했다. 거듭 말하지만 그들이 강화도 요새설에 심취해서가 아니라 다른 대안을 모색할 정보와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출처: DBR
(강화도 동쪽 광성보에 있는 소포와 대포. 광성보는 1658년 조선 효종 9년에 축조되었는데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국 군대와 사투를 벌인 격전지였다)

안주하려는 욕망에서 벗어나야


세 번째 원인은 보다 본연적이면서 정서적인 요인에서 찾을 수 있다. 난공불락의 요새에 대한 일종의 로망이다. 요새에 대한 집착은 역사가 깊다. 전장은 잔혹하고 무섭다. 가능하면 작은 희생을 치르며, 안전하게 이기고 싶은 것이 모두의 소망이다. 이런 소망이 난공불락의 요새를 갈망하게 한다. 전쟁이나 경영에서 안전을 추구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일단 근거지나 기반 사업이 튼튼해야 힘을 축적하고 다음 작전을 구상할 수 있다. 논리적으로 하자가 없지만 전쟁과 경영 현장에서는 두려움과 불확실성이라는 변수가 있다. 공포감과 오랜 수고로 인한 피로감으로 사람들은 안주하고 싶어 한다. 

출처: JTBC 화면 캡쳐
(강화도의 함락 이후 조선이 병자호란에 패하면서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는 삼전도의 굴욕을 재연한 JTBC의 드라마 궁중잔혹사)

하지만 더 이상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요새 안에서 안전하게 거주하기를 바란다면 그는 더 이상 전사가 아니다. 난공불락의 요새는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공격적인 목표와 적극적인 행동과 연계되어 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 안주하고 싶고, 쉽게 이기고 싶다는 욕망과 단절되어 있을 때에만 난공불락의 요새가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출처 프리미엄 경영 매거진 DBR 51호
필자 임용한

필자약력

-KJ인문경영연구원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비즈니스인사이트 신무경 정리businessinsigh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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