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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4만여 명 美軍 핏값으로 치러진 日 원폭 투하

조회수 2018. 11. 4. 11: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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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은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희생과 비용을 감내한 전쟁을 치렀습니다. 하지만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가치를 중요시한 덕에 그 이상의 보상을 얻을 수 있었는데요. 4만여 명의 사상자를 무릅쓴 미군이 어떻게 일본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릴 수 있었는지 그 치열했던 현장을 소개합니다.

사이판 전투, 일본 도시를 불바다로 만들다

1944년 6월 15일, 미군은 사이판, 괌, 티니안 섬으로 구성된 마리아나 제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시 태평양의 일부 섬들은 일본군에게 점령된 상태였다. 미군 상륙부대는 해병대 제2사단과 제4사단, 육군 제27사단으로 이뤄진 대부대였다. 이 섬들을 지키던 일본군은 총 3만 1000명으로서 역시 만만치 않은 전력이었다.

출처: 위키피디아
(사이판, 괌 등으로 구성된 이 일대를 통틀어 마리아나 제도라고 부른다. 마리아나 제도의 서쪽에는 이오지마 전투의 무대인 이오지마가 있다)

예상대로 일본군의 저항은 거셌다. 수비하던 일본군 병력의 전부에 가까운 3만 명 이상이 전사한 후인 7월 9일에 이르러서야 미군은 마리아나 제도를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군의 희생도 결코 가볍지 않았다. 섬에 상륙한 총 7만 1000명의 미군 중 3500여 명이 전사했고 1만 30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 


마리아나 제도를 장악하자마자 미군은 비행장을 점령하고 활주로를 정비했다. 그리고 그해 11월에 100대 이상의 B-29 전략 폭격기를 배치했다. 이것이 바로 미국이 마리아나 제도를 차지하려 했던 이유였다. 사이판은 일본 본토로부터 2100㎞ 떨어져 있고, B-29의 작전 반경은 2400㎞다. 즉, 미군이 도쿄를 폭격하고 귀환할 수 있도록 사이판을 점령한 것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B-29는 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된 미국의 전략폭격기이며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처음에는 이곳에서 발진하는 B-29의 일본 본토 폭격이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B-29에는 지상에서 10㎞ 떨어진 고공을 날아가며 폭격할 수 있도록 정밀 조준 장치가 있었다. 이 고공 폭격은 최고 고도가 훨씬 낮은 일본 전투기들의 요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편서풍이 심한 일본의 기후 때문에 고공에서 떨어뜨린 폭탄이 엉뚱한 곳에 떨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출처: 위키백과
(커티스 르메이 소장(1906~1990))

결국 폭격기 사령부의 지휘관으로 새로 부임한 커티스 르메이 소장은 전략적 가치가 큰 군사시설에 대한 고공 정밀 폭격이 일본 전장에는 맞지 않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폭격의 정확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대신 르메이 소장은 주요 도시에 대한 무차별 폭격을 하는 것으로 전략 방향을 수정했다. 그리고 목조건물이 많은 일본의 특성상 소이탄을 활용한 공격이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이탄은 사람이나 군사시설 등을 불태우기 위한 탄환류다. 당시 폭격에 사용됐던 소이탄은 오일과 글리세린 등을 혼합하여 만들었으며 엄청난 열을 발생시켰다고 한다.) 

출처: 나무위키
(불타고 있는 도쿄)

B-29는 소이탄을 잔뜩 싣고 최고 고도보다 훨씬 낮게 비행하면서 폭격을 실시했다. 1945년 3월, B-29를 동원해 실시한 소이탄 폭격은 도쿄 도심의 상당 부분을 태워버렸다. 이것이 바로 도쿄 대공습이다. 르메이 소장의 예상대로 대다수의 목조 가옥이 전소됐다. 심지어는 열기가 너무 세서 화기에 직접 닿지 않아도 몸에 불이 붙을 정도였다. 소이탄에 사용됐던 오일은 물속에서도 탈 수 있었기 때문에 강과 바다에서도 화염이 가시지 않았다.

땅굴을 견뎌내고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내다

그러나 불행히도 사이판 전투가 끝이 아니었다. 미군은 일본군의 완전한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새로운 땅을 점령해야만 했다. 1945년 2월 19일 아침 9시경, 미군은 사이판 섬과 일본 본토 사이의 중간쯤에 위치한 화산섬 이오지마에 상륙했다. 미군은 7만 명의 해병대 병력을 동원해 2만 2000여 명의 일본 수비군이 지키고 있는 이 섬을 공격한 것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이오지마 전투 당시 모습)

그런데 방어 책임을 맡은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중장은 미국 하버드대에서 유학한 적이 있는 지혜로운 장수였다. 그는 1년여 동안에 걸쳐 섬 전체를 '지하 요새화'한 채 미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하 동굴들을 통로로 연결하고, 이를 이용해 치고 빠지는 전술로 미군을 부단히 괴롭힌 것이다. 미군은 동굴 하나하나를 수색하고 화염 방사기와 수류탄으로 적을 제압하면서 전진할 수밖에 없었다.


미군은 상륙한 지 한 달하고도 일주일이 지난 3월 26일에서야 이오지마를 장악했지만 그 희생은 매우 컸다. 전사자 수는 총 6800명이 넘었으며 부상자 수도 1만 9000명을 크게 상회했다. 다시 말하면 상륙한 병력 중 절반에 가까운 병력이 죽거나 부상당한 것이었다.  

출처: 위키백과
(전장에서 맹활약을 펼쳤던 P-51 머스탱은 폭격기를 호위하는 임무를 주로 맡았다)

이렇게 엄청난 희생이었지만 미군은 그 이상의 보상을 얻었다. 이오지마 섬을 점령한 덕에 일본 본토는 P-51 머스탱 전투기의 작전 거리 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 전투기의 작전 반경은 1500㎞를 웃돈다. 만약 도쿄로부터 남쪽으로 1200㎞ 떨어진 이오지마의 비행장에서 이륙한다면 B-29의 임무 수행을 지원하고 돌아올 수 있었다. 당연히 이때부터 미군 폭격기의 피해는 크게 줄어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태평양 전선에서의 미군 전사자 수는 약 10만 명이었다. 이들 가운데 거의 10분의 1에 달하는 전사자가 마리아나 제도와 이오지마 상륙작전에서 나왔다. 사이판 전투의 사망자는 3500여 명이었으며 이모지마 전투의 사망자는 6800여 명이었다. 

출처: 위키미디어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당시, 나가사키로부터 약 1200km 떨어진 고야지마 지역에서 찍은 사진)

사이판 전투와 이오지마 전투는 일본군 못지않게 미군에게도 큰 희생을 안겨준 전쟁이었다. 이 두 전투에서 일본군의 사상자는 5만 2000여 명 정도였다. 하지만 승리한 미군의 사상자 또한 도합 4만 2000여 명으로 결코 적지 않은 숫자였다. 하지만 일본 본토 공격의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꼭 점령해야만 했던 지역이기도 했다. 결국 1945년 8월 마리아나 제도에서 이륙한 B-29 폭격기는 히로시마에 이어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며칠 후 미국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냈다. 비록 작은 섬들에서 벌어진 전투였지만 결과적으로 그 희생은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

출처 프리미엄 경영 매거진 DBR 179호
필자 김경원

인터비즈 박성지 정리

inter-biz@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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