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경영] '이순신 자살설'이 등장한 배경은?

조회수 2018. 9. 30. 11: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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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년(선조 31) 11월 19일 새벽 2시경 지금의 남해대교가 놓여진 협로 근처에서 총성이 울렸다. 노량해전으로 익히 알려진 이 해전은 임진왜란사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격렬했던 전투였다. 조선군과 일본군 모두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치르는 마지막 전투였기 때문에 양군은 모두 사력을 다해 싸웠다. 일본군 병사들은 바다 건너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조선의 병사들은 침략자를 격멸하고 승리자로서 귀환하기 위해서.

출처: 해군사관학교
(노량해전도)

이 전투가 얼마나 대단한 격전이었는지 조선·명나라(연합군)·일본 3국의 대장선이 모두 한두 차례씩 위기를 겪었을 정도였다. 특히 조선 수군은 명나라군보다 더 악착같이 싸웠던 만큼 피해가 컸다. 이순신의 부하 중 장수급만 10여 명이 전사했다. 임진왜란을 통틀어 장수급 전사자의 절반이 이날 전투에서 사망했다. 이순신의 뒤를 이어 통제사가 된 유형 장군은 갑옷에 여섯 발의 총탄이 박혀 있었다고 한다. 이순신 또한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쓰러지고 말았다.

이순신이 자살했다?

출처: 동아일보 DB
(충무공 이순신 동상)

노량해전은 위대한 승리로 막을 내렸지만 조선은 최고의 영웅을 잃었다. 그런데 한참 시간이 지나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조선의 위정자들에 환멸을 느낀 이순신 장군이 마지막 전투에서 갑옷을 입지 않고 참전했다는 소문이었다.


이 이야기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17세기에는 이미 상당히 퍼져 있어서 조정의 고관까지도 이 설을 믿는 사람들이 나왔다. 숙종 때에 이조판서를 역임한 서하 이민서(1633∼1688)는 이순신 장군이 당파 싸움에 회의를 느껴 갑옷을 벗고 전쟁에 임했다고 서술했다. 비슷한 시기에 영의정까지 지냈던 이여라는 인물도 이순신의 자살설을 믿었다. 이순신의 자살설은 근래까지 이어져 고명한 역사학자 중에서도 이 설을 믿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이순신의 자살설이 등장한 배경에는 조선 사회의 정치 문화에 대한 회의가 담겨 있다. 전쟁 중에 이순신은 수군 최고사령관 직에서 쫓겨나 일반 사병으로 강등되었다. 이순신이 물러난 자리에는 그의 라이벌이며 당파도 달랐던 원균이 등용됐다(이순신은 동인, 원균은 서인이다). 그 대가로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패배하여 거의 전멸해버렸다. 이 피해는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일본군 수보다 많고, 이순신이 해임되기 전에 거둔 모든 전과를 합친 것보다도 많았다. 이순신 해임 사건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진상이 무엇이든 사람들은 정치적 음모가 개입됐다고 믿었다.

출처: 동아일보 DB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도 벌어지는 치졸한 정치 싸움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일본군을 몰아내고 함경도를 탈환한 정문부는 역모 사건에 연루되서 살해됐고, 의병장으로 최고의 공을 세운 곽재우는 아예 관직에 나오지도 않고 은거했다. 역시 의병장이었던 김덕령도 모함을 당해 죽었다. 그뿐인가. 대체로 숙종 무렵부터 당파 싸움은 점점 치열해지더니 대규모 숙청과 정적에 대한 살해까지 나타났다. 대유학자이자 정치계의 거두였던 송시열도 사약을 받았다. 정쟁이 치열해지는 만큼 관리 등용과 인사 행정에서는 혈연과 지연, 학연이 더욱 중시되기 시작했다. 든든한 배경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정치판에 실망하는 만큼이나 이순신 장군의 자살설을 더욱 확신하기 시작했고, 이순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자살설은 영웅에 대한 모독

출처: 동아일보 DB

결론부터 말하면 이순신 장군의 자살설은 진실이냐 허구냐를 논하기 이전에 이순신 장군에 대한 최대 모욕임을 먼저 밝혀둔다. 자살설의 골자는 이순신 장군이 대놓고 자살을 할 수가 없어서 일부러 전사하는 방법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7년 전쟁 중 최대의 격전이자 부하 장병들이 가장 많이 희생된 엄청난 전투에서 지휘관이 앞으로 닥쳐올 세상은 보기 싫고, 자살했다는 불명예는 쓰기 싫어서 갑옷을 안 입고 싸우다가 전사한다는 게 말이 되는 이야기일까? 전투 중에 지휘관이 전사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위험을 초래한다. 결국 이순신 장군이 갑옷을 입지 않고 싸웠다면 이순신 장군이 부하들의 생명과 전투의 사명감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 명예와 체면만 소중히 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된다. 이순신 장군의 입장에서 보면 생전에 가해진 어떤 비난이나 백의종군의 처벌보다도 통분할 이야기가 자살설이다.


리더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자신이 맡은 과업과 부하들에 대한 책임이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사적인 이익은 물론이고, 비난과 굴종마저도 감수하는 것이 진정한 리더다. 실제 역사 기록을 보면 이순신 장군의 최고 미덕이 바로 이런 모습이다. 이순신 장군이 통제사 직에서 해임되었던 이유도 조정에서 요구하는 잘못된 전략을 끝내 거부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순신 장군은 그 대가로 해임과 백의종군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출처: 네이버 e뮤지엄
(이충무공 백의종군도)

자살설의 배경에 정치 문화와 폐쇄적인 사회 현실에 대한 회의가 놓여 있다는 사실, 그 혐오감이 지금까지 해소되지 않았다는 점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이 조직 생활을 잘 모르는 순박한 농부들과 시골 선비들 사이에 유행한 것까지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국가 경영을 책임진 고위 관료와 최고 지식인들 사이에도 퍼져 갔고, 지금까지도 유행하고 있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다. 리더는 조직원들의 자발적 참여를 토대로 과업을 달성하기까지 무한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리더의 역할에 대한 이런 기초적인 이해가 부족한 것이 우리 현실이다.  


또 훌륭한 리더십을 행사한 리더가 한국 사회에서 부족하다는 점도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특히 급속한 경제 발전으로 각 영역에서 필요한 책임자의 숫자는 급속히 늘어났지만 충분한 자질과 역량을 갖춘 리더는 여전히 부족하다. 이런 불균형이 지속되면서 제대로 된 리더십을 보여준 역할 모델을 찾기가 쉽지 않았고, 민족적 영웅에 대한 오해와 곡해도 확산됐다고 볼 수 있다. 

출처 프리미엄 경영 매거진 DBR 44호
필자 임용한


인터비즈 박근하 정리
inter-biz@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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