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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작은 구멍, 단 한 명의 용기가 '난공불락의 요새' 뚫다

조회수 2018. 9. 19. 13:3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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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 한마디처럼 열정과 로망, 분노와 비난을 일으키는 단어도 없을 듯하다. 어떤 이들은 십자군의 종교적 열정과 기사들의 용감한 모험심을 찬양하지만, 어떤 이들은 종교의 오만함과 가혹함을 비난한다. 원정도 여러 번이었고, 군대의 구성과 상황도 그때마다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들을 차치하더라도 1200년 시작된 4차 십자군 원정은 모두를 놀라게 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절대 불가능할 것 같았던 '난공불락의 요새',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이 무너진 것이다.

애초에 성공할 수 없었던 십자군 원정

십자군 원정은 처음부터 성공할 수 없는 원정이었다. 당시 유럽은 가난했고, 왕국은 작았다. 원정과 정복에 필요한 병력과 물자를 마련할 수가 없었다. 1만의 군대만 해도 유럽에서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전술은 단순했고, 통솔은커녕 훈련도 되지 않았다. 특히 전투력이 기사에게 편중돼 있는 게 문제였다. 빈농과 건달 집단들도 잘만 훈련시키면 훌륭한 군대가 될 수 있는 전략자원이었지만, 유럽의 군대와 전술 체제 자체가 평민 군대를 육성할 능력이 되지 않았다. 사실상 십자군 원정은 이렇게 형편없는 군대로 한 세기 동안 원정을 감행했고, 수도 많고 훨씬 잘 조직된 중동 군대와 싸우며, 성과 도시를 함락시키고 국가도 멸망시켰던 것이 신기한 일이자 연구 대상 감이다.

출처: 유튜브 캡처
(십자군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 '킹덤 오브 헤븐')

그중에서도 가장 신기한 사건은 4차 십자군 원정에서 발생한다. 사자왕이라고도 불린 리처드 1세가 활약한 3차 십자군은 유럽의 굵직한 국가인 영국, 프랑스, 독일의 국왕이 주도한 덕분에 통솔도 잘되고 위협적인 원정이 됐다. 그러나 원정의 실체를 안 후, 그들은 손을 뗐다. 반면에 3차 원정군이 이룩한 절반의 성공은 남아있던 기사와 대중들의 로망에 불을 질렀다. 거기에 풍크(Fulk)라는 전도사가 등장해 대중들을 격분시키자, 수많은 농민과 기사들이 십자군에 자원했다. 이에 고무된 귀족들은 집행부를 구성했고, 마침내 4차 십자군이 조직됐다.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한 4차 십자군 원정

머나먼 중동 땅으로 가기 위해 그들은 도시국가였던 베네치아와 수송선과 경호 함대에 대한 용선계약을 맺는다. 자원자는 20만 명이었지만, 집행부는 3만 5000명 정도가 모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정작 베네치아에 모인 병력은 1만 1000명에 불과했다. 그들이 가져온 돈으로는 계약한 대금의 절반 밖에 지불할 수가 없었다. 그때 비잔틴제국의 내전으로 망명해있던 알렉시우스 왕자가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을 탈환해주면 대신 비용을 지불해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십자군 지휘부는 망설였지만 대안이 없었다.

출처: DBR

막상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 십자군은 경악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은 전 유럽의 도시와 왕궁을 합친 것보다 더 화려한 건축과 교회로 가득 차있었다. 그러나 그 화려함보다 더 놀라운 건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이었다. 비잔틴제국 1000년을 사수한 거대한 삼중 성벽은 함락이 불가능한 난공불락의 요새였던 것이다. 4차 십자군이 도착했을 때, 콘스탄티노플에는 이미 십자군의 3배가 넘는 수비대와 특별 초빙해 온 용병대가 있었다. 반면 십자군은 그나마 있던 기사들의 절반도 공격에 반대해 떠난 상태였다.

난공불락의 요새에 뚫린 작은 구멍 하나

출처: 위키피디아
(콘스탄티노플 성벽에서 전투 중인 모습)

콘스탄티노플에 1년 가까이 주둔하던 십자군은, 마침내 성벽에서 진짜 전투를 벌인다. 그러나 비잔틴군이 제대로 싸우기 시작하자 십자군들로서는 성을 함락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에 10명의 기사와 60여 명의 하사관, 30여 명의 보병으로 구성된 작은 무리가 성벽 한 군데에 구멍을 내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말 그대로 한 사람이 기어들어갈 수 있는 작은 구멍일 뿐이었다. 성벽 안에는 완전 무장한 수비대가 우글우글했다. 이때 클라리 출신의 알림(Alleumes of Clari)이라고 하는 무장사제가 단신으로 돌격하겠다고 나섰다. 이유는 오직 하나,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는 명예를 얻겠다는 것이다. 중세 시대의 기사도와 신앙이 가미된 결정이었다. 모두가 뜯어말렸지만, 알림은 결국 구멍을 통과해 비잔틴 수비대에 단신으로 돌격했다. 그런데 성벽 안쪽에 정렬해 있던 수비대가 이 한 명의 십자군을 보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기적을 본 십자군들은 자신을 얻고 구멍으로 들어와 정렬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성문은 이렇게 열렸다.

콘스탄티노플이 무너진 이유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콘스탄티노플에 침입해 대대적인 학살을 행하는 십자군의 모습)

적이 침입했다는 보고를 받은 황제는 직접 완전무장을 하고 달려왔다. 눈앞에 약 100명의 군대가 방패를 들고 정렬해 있었다. 그는 황제가 되기 이전 장군으로 명성을 날린 인물이었으나, 십자군을 보고 그냥 물러섰다. 비잔틴군 역시 아무도 이 100명의 군대를 막으려 하지 않았다. 제국 군은 평소에 힘든 일은 용병에게 시켰고, 용병은 목숨을 건 전투는 하고 싶지 않았다. 황제는 시민들에게 궐기해서 싸우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쿠데타와 정쟁이 반복되는 정치에 신물이 나고, 부자들 특유의 게으름과 사회적 책임감을 상실했던 비잔틴 시민들은 시큰둥했다. 결국 십자군 소대는 믿기지 않는 기적을 체험하며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기에 이른다.


이 황당한 사건이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첫째, 한 가지에 너무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콘스탄티노플 수비대는 십자군에 비해 훨씬 월등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나가서 싸우려 하지 않았다. 그들이 믿는 것은 오직 성벽과 돈이었다. 그러니 성벽이 뚫리자 무방비 상태였던 그들은 그저 공황상태가 되어버렸다.  


두 번째 교훈은 십자군과 콘스탄티노플 수비대 모두에게 해당된다. 통제되지 않은 군대 수만 명은 열정을 가지고 상황을 통제하는 단 한 명, 혹은 100명보다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은 100 대 1의 싸움도 막아낼 수 있는 성벽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투에 대한 열정과 군사 통제력을 상실해 1 대 100의 싸움에서 무너졌다.  

출처 프리미엄 경영 매거진 DBR 135호
필자 임용한
인터비즈 임유진 정리
inter-biz@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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