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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경영]행주대첩 이끈 권율의 리더십

조회수 2018. 9. 2. 11: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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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행주산성 전투의 결정적 승리는 권율의 명령에 불복해 목책공사를 강행한 조방장 조경의 공이 컸다. 조경은 병사들에게 휴식을 주라는 권율의 명을 어기고 '군대는 하루를 머물러도 참호를 파고 진지를 구축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진지 구축공사를 강행했다. 그리고 공사가 끝나자마자 왜군 3만명이 몰려왔다. 조경은 행주산성 전공으로 임란 후 공신으로 책봉된다. 그러나 조경이 지휘관의 명령 조차 어길 수 있었던 자체가 권율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인물이라는 것을 반증한다.

1593년 2월 권율이 이끄는 1만의 조선군이 행주나루를 건넜다. 감개무량한 도하였다. 왜군의 기습적인 침공으로 한 달 만에 수도를 빼앗기고 선조는 의주로 피난한 지 약 1년 만에 조선군이 한양으로 진입한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아직 한양에 도착한 것은 아니었다.)

권율 개인도 감회가 남달랐다. 권율은 8개월 동안 전라, 충청도 병력을 주축으로 한양 탈환을 시도했다가 광교산에서 왜군에게 대패한 기억이 있다.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지만 이 패전 덕분에 황진 등 몇 명의 뛰어난 장수들이 의기투합해서 패잔병을 합치고 병사를 조련했다. 왜군을 보기만 해도 도망치던 군대가 싸울 수 있는 군대로 다시 태어났고 마침내 한양 탈환작전에 참가하게 됐다.

한양 탈환에 나선 권율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그러나 아직 조선군은 단독으로 한양을 탈환할 능력은 부족했다. 그들이 기대하는 것은 평양에서 남진하고 있는 이여송의 명나라 군대였다. 명군이 한양에 있는 왜군을 몰아내면 권율의 조선군은 탈출로를 봉쇄하고 왜군을 요격할 계획이었다. 유성룡은 이 계획에 굉장한 기대를 걸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비롯해서 왜군의 지도부는 한양에 있었다. 이들을 잡거나 살해한다면 임진왜란을 종결할 수도 있었다.평양성 전투에서 명나라군이 워낙 멋진 승리를 거두었던 터라 조선은 명군의 승리를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평양성은 조선 최고의 요새였지만 서울 도성은 나무꾼들이 쉽게 넘어 다닌다고 할 정도로 조금 높은 담장에 불과했다. 이중성벽 같은 기본적인 방어시설도 없는 성이었다. 그래서 선조가 한양을 방어할 생각도 않고 도망쳤지만 이제 공격할 입장이 되니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왜군도 평양성은 왜성의 축성기법을 사용해서 방어 시설을 보강했지만 한양 도성은 엄두가 나지 않았는지 손도 대지 않았다. 


원래 권율은 한강 남쪽에서 대기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더 빨리 적을 소탕해야 한다는 마음에 나루를 건너 강북으로 들어왔다. 자신감이 넘친 권율은 아예 무악재까지 진군해서 주둔하려고 했지만 부하들이 만류해서 중단했다. 게다가 무악재로 보낸 정찰대가 왜군의 습격을 받아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래서 행주나루 옆의 작은 야산에 병사를 주둔시켰다. 이 야산은 실록에서는 그저 성산(城山)이라고 언급돼 있다. 오래된 토성이 있었지만 지형을 깎아낸 흔적만 있을 뿐 제대로 된 성벽도 남아 있지 않았다. 

권율의 명을 어긴 조경

군대는 하루를 머물러도 참호를 파고 진지를 구축하고 쉬는 법이다. 그게 군사학의 철칙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땅은 이 철칙을 지키기가 힘들었다. 대부분이 화강암 암반인 탓에 땅을 1m 파는 데도 몇 시간이 걸렸다. 권율은 다가올 결전을 대비해서 병사들을 쉬게 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부하 참모 몇 명이 원칙을 들어 그래서는 안 된다고 반대했다. 권율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슨 일로 잠시 어디를 다녀오게 됐다. 권율이 없는 틈을 타서 조방장 조경이 무단으로 공사를 강행했다. 토성은 축대와 같은 구조여서 땅이 계단형으로 깎여 있을 뿐 엄폐물이 전혀 없다. 조경은 이중으로 목책을 세우고 목책 뒤로 참호까지 팠다. 이 공사를 단기간에 마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틀 동안 공사를 강행했다. 권율은 돌아와서 이 모습을 보고 화를 냈지만 금세 무안하게 돼버렸다. 공사를 끝내자마자 왜군3만이 몰려왔다. 


조선군이 행주에 주둔하고 있는 동안 이여송 군은 벽제관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고 도주했다. 그러나 권율은 이 사실을 몰랐다.명군을 격퇴한 왜군이 조선군이 한강을 건넜다는 사실을 알고 이들마저 쓸어버리기 위해 한양에 주둔한 전 병력을 동원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기록된 행주산성 전투는 이렇게 시작됐다. 


행주산성 전투라고 하면 여성들이 앞치마로 돌을 날랐다고 하는 행주치마로 유명하다. 그러나 행주산성 전투는 민간인이 개입하거나 피난해 들어올 여지가 없었다. 다만 이 산에 돌이 많았고 수성전에서는 화살 못지않게 돌이 좋은 무기가 됐다. 조선군은 석전의 풍속이 있을 정도로 돌팔매가 장기라 돌멩이 공격이 화살과 첨단무기인 총통 못지않은 위력을 발휘했다. 

출처: DBR

행주산성 전투

왜군은 파상공세를 폈다. 첫 번 공격은 일본군 1군 사령관 고니시가 직접 지휘했다. 제1파는 조선군의 일제 사격을 맞고 물러갔다. 그러나 안심할 수 없었다. 성이나 요새 방어전에서 첫 번 공세는 대개 실패로 돌아간다. 2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신임하는 이시다 미츠나리 군이었다. 역시 조선군의 일제 사격으로 왜군은 무너졌다. 지휘관 이시다도 부상을 입었다. 이때까지 왜군은 조선군을 가볍게 보고 별 다른 공성구도 없이 공격해 왔다. 실수를 깨달은 왜군은 3차 공격 때에는 공성탑을 만들고 탑에 조총병을 배치해서 성에 접근했다. 그러나 조선군은 이것을 불살라 파괴했다. 급조한 공성탑이었으므로 강하지도 않고 수도 얼마 되지 않았던 것 같다.


분노한 왜군은 각오를 달리했다. 4차 공격은 총대장인 우키타 히데이에가 직접 인솔했다. 이번 공격은 기세가 달랐다. 1차 목책을 돌파하고 2차 목책까지 접근했다. 격전이 벌어졌지만 조선군은 목책에서 물러서지 않고 사격을 계속했다. 마침내 우키타가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부하가 달려들어 그를 들쳐 없고 전선에서 빠져나갔다. 이로써 4차공세도 막아냈다. 


깃카와 히로이에가 지휘하는 5차 공세는 더 격렬했다. 공성구가 부족했고 그나마 소진된 왜군은 점점 더 사무라이식 돌격에 의존하게 됐다. 깃카와는 선두에서 지휘를 했고 왜군은 2차 목책에 붙어 불을 질렀다. 


조선군은 전통적으로 활과 총통이 장기였다. 거리를 두고 싸우는 전투에서는 확실한 우위였다. 그러나 적이 근접해서 백병전이 벌어지면, 특히 상대가 왜군이라면 결과는 참혹했다. 왜군은 명나라 군대도 두려워할 정도로 백병전에 관해서는 아시아 최강이었다. 


일본도는 백병전에서는 당할 수가 없는 무기였다. 왜군은 전투 경험이 많아서 집단전술이 강하고 소수의 무사가 진을 돌파하면 즉시 집결해서 교두보를 확보하는 능력도 탁월했다. 따라서 왜군이 방벽에 접근하면 전투는 조선군의 패배로 끝날 가능성이 높았는데 공세가 반복될수록 왜군이 점점 근접해 왔다. 한 번은 왜군이 성을 돌파했다는 소리가 들리며 진이 동요했는데 권율이 직접 나서서 병사들의 후퇴를 막았다. 


행주산성은 뒤에 한강을 두고 삼면이 구릉이어서 자연히 배수진이 됐다. 물러설 곳이 없기 때문에 조선군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광교산 전투 이래의 훈련으로 권율 군의 주력이었던 호남병사들은 활쏘기 실력이 수준급으로 올라와 있었다. 


조선군은 5차 전투를 극복해 냈다. 깃카와는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고 후퇴했다. 6차 공세부터 왜군은 주 공격지점을 서북쪽 능선으로 바꾸었다. 사실은 그곳이 제일 위험한 지대여서 조선군은 처영이 이끄는 1000명의 승병을 배치했다. 능선이 낮아서 왜군이 쉽게 접근할 수 있었고 바로 백병전이 벌어졌다. 놀랍게도 승병대는 백병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맞붙어 싸웠다. 참호에 기름을 부어 불을 지르고 불을 건너 뛰어 왜군에게 돌격하기까지 했다. 승병의 놀라운 분전으로 왜군의 공세가 마침내 꺾였다.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리더

행주산성 전투의 결정적 승인은 목책 공사를 강행한 조방장 조경의 명령 불복종이었다. 조경은 임진왜란 초기부터 경상도에서 여러 번 왜군과 싸워서 당시로서는 실전경험이 제일 많은 장수에 속했다. 조경도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 바를 몰랐다. 전투 중에 왜군의 포로가 될 뻔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전투를 겪으면서 무엇보다도 기본이 중요하다는 단순한 진리를 깨달았고 롬멜 장군의 말처럼 죽는 것보다는 힘든 것이 낫다는 진리를 체득했던 것 같다. 조경은 행주산성의 전공으로 임란 후 공신으로 책봉됐다.


행주대첩으로 영웅이 된 권율은 알고 보면 돌이킬 수 없는 패배를 유발할 실수를 하고도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이런 글을 읽으면 “알고 보니 권율은 공이 없고 진짜 공로자는 조경이잖아”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조경이 소신을 가지고 지휘관의 명령조차도 어길 수 있었던 자체가 권율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알고 합리적인 지휘관이었다는 반증이라고 할 수도 있다. 


권율은 문관 출신이고 군사경력이 전혀 없는데도 임진왜란이 터지자 중요한 승리를 이끌어 냈다. 권율이 잘못된 결정을 내린 것도 있고 당쟁이 심하던 시기라 권율에 대한 비판도 많지만 언제나 옳은 결정을 내릴 수는 없는 법이다. 선조와 국정을 아는 대신들은 권율을 높게 평가했다. 그리고 언제나 권율 휘하에는 황진과 조경 같은 유능한 장수들이 있었고 아랫사람들은 권율을 신뢰했다. 그 비결이 무엇이었는지는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지만 군사의 문외한인 그가 최고 무장들을 지휘해서 승리를 얻어냈다는 자체가 그들의 전문성을 인정하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할 줄 아는 리더였음을 반증한다.  


리더가 언제나 옳은 결정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리더는 참모와 부하들이 리더의 실수를 바로 잡아줄 기회를 준다. 리더의 사명은 자기 능력의 극대화가 아니라 조직원 전체 능력의 극대화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출처 프리미엄 경영 매거진 DBR 140호
필자 임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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