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경영]美 패튼 장군이 '롬멜공포증' 깬 비결

조회수 2018. 8. 26. 11: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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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튼 대전차 군단'의 그 패튼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달하던 1945년 3월 24일. 승기는 연합군에게 넘어와 있었다. 철모에 큼지막한 3개의 별을 달고 있는 은발의 장군이 독일 라인 강에 설치된 부교에서 강물을 향해 소변을 갈기며 말했다.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꿈까지 꾸었다네···."

출처: history.com
(조지 스미스 패튼 4성 장군)

이 은발의 주인공이 바로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시사주간지 타임에 가장 많이 등장한 미국의 조지 스미스 패튼 장군George S. Patton Jr.(1885-1945)이다. 패튼은 1943년 3월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벌어진 영국·미국·프랑스 연합군과 독일·이탈리아 추축국의 전투에서 주목받은 뒤, 미2군 사령관으로 취임했다. 바로 한 달 전 벌어졌던 튀니지·캐서린 협곡 전투에서 미2군이 참패를 당하자 이로 인해 패튼 장군이 지휘봉을 넘겨받은 것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커먼즈
(독일의 에르빈 롬멜(Erwin Johannes Eugen Rommel, 1891~1944) 장군)

이 전투는 미군과 독일군 간의 첫 교전으로 당시까지 미군이 해외에서 당한 최악의 패전이었다. 겨우 독일군의 2개 사단에, 그것도 단 이틀 만에 미군 1개 군단이 궤멸될 뻔한 것이다. 그나마 당시 연료와 병력에서 거의 한계 수준에 도달한 독일의 롬멜(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독일군 원수) 전차군단이 스스로 물러난 덕분에 가까스로 더 큰 병력 손실을 막을 수 있었다. 그 이후 미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으며, 프랑스와 영군 군을 휩쓴 ‘롬멜 공포증’이 번져갔다.

패튼의 군기 잡기...'피와 내장의 효과' ?

① 철모, 넥타이, 각반을 착용하라

출처: history.com

패튼 장군은 먼저 땅에 떨어진 미군의 사기를 되살리기로 했다. 그중 하나가 미군의 군기를 잡는 것이었다. 부대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철모와 넥타이와 각반(발목에 착용하는 보호대의 일종)을 항시 착용하라"라는 명령을 내렸다. 위반자에 대해서는 장교 50달러, 사병 25달러의 벌금을 부과했다. 병원의 간호원이나 작업병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자동차 수리공도 철모를 쓰고 차 밑으로 기어들어가야 했다. 군복 안에는 모직셔츠를 받쳐 입고 넥타이를 매야 했다. 사막의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셔츠의 단추 하나를 푸는 것도, 소매를 걷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도 각반을 쓰지 않은 중위에게 전령으로 '각반을 착용하라'라고 전할 정도로 규칙은 엄격했다.

② 피와 내장 효과? 험악한 연설로 군기 잡다

출처: history.com

패튼이 시도한 또 하나의 군기쇄신책은 시도 때도 없는 연설이었다. 그의 연설은 온갖 저속한 욕설과 험악한 말로 채워졌다. 중세 이래 유럽의 군대는 귀족들의 전유물이었으며, 사관학교 교육은 귀족교육의 영향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미국은 귀족의 나라가 아니었지만 장교는 귀족과 같은 품격을 유지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켰다. 그런 장교들에게 패튼의 험악하고 야비하며, 허풍과 자기자랑으로 가득 찬 말투는 충격이었다.

출처: 유튜브 캡처(척탄병)
(패튼 장군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패튼 대전차 군단(1970)' 속 연설 장면)

그의 연설에서 욕 다음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피’와 ‘내장’이었다. “독일군의 내장을 뽑아 기름을 짜서 윤활유로 사용하자” ,“피 묻은 내장을 기름걸레로 써라” 등. 패튼 스스로 자기 연설의 효과를 ‘피와 내장의 효과’라고 불렀다. 그는 연설에서 자신의 지위가 가지는 힘을 철저하게 활용했다. 아무리 마구 지껄여도 군대라는 계급사회 내에서 병사들은 싫은 기색을 하거나 퇴장할 염려가 없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내내 패튼과 함께 한 오마 브래들리 장군Omar Nelson Bradley(1893~1981)은 패튼의 군기 잡기와 연설의 효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패튼의 행동들은 군단의 장교와 병사들에게 '이제 예전의 군단과는 다르다'라는 인식과 '그 자신은 이전의 지휘관들과는 다르다'라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계획된 것이 분명하다. (물론 그가 자기 입으로 그렇다고 말한 적은 없다)”

그러나 브래들리도 이 방법의 효과에는 자신이 없었다. 그의 시각에서 봤을 때 패튼의 독재적이고 잘난 척하는 행동은 오히려 병사들에게 위화감을 조성하기에 딱 알맞은 것이었다. 브래들리의 평가처럼 패튼은 자신이 이전의 지휘관과 다르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데는 성공했지만, 병사들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그럼에도 한 가지 결과만은 분명했다. (독일군에 대한 것이든 아니면 패튼에 대한 것이든) 미군 병사들의 식은 가슴이 증오로 불타기 시작한 것이다.


패튼의 부대가 튀니지에서 승리하지 못했다거나, 그 이후에도 그의 부대가 혁혁한 전공을 세우지 못했다면 그의 군기 잡기는 조롱거리로 전락했을 것이다. 병사들의 사기, 소속감과 자부심, 충성심과 복종심은 승리를 위한 중요한 조건이다. 그러나 그것을 만들어 내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승리에 대한 확신과 경험이다. 그것은 패튼에 대한 다음의 이야기에서도 증명된다. “병사들 중 패튼을 좋아하는 병사도 많았지만, 싫어하는 병사가 더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승리하기(살아남기) 위해 패튼을 선택했다.”

독재적이고 잘난 척 심한 패튼 장군... 숨겨진 그의 장점은?

튀니지에서 시작한 패튼의 군기 잡기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계속되었다. 패튼의 기행, 연설의 효과, 그에 관련한 수많은 에피소드들은 오랫동안 저널리즘의 관심 대상이 되었다. 특히 연설의 효과에 대한 논쟁은 전쟁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의 진정한 장점은 잊혀졌다. 그는 상대방의 진가를 제대로 파악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출처: LIFE
(2차 대전 중 아이젠하워 장군(오른쪽)이 북아프리카의 패튼 장군(왼쪽, 당시 2성 장군)에게 3성급 계급장을 달아주고 있다)

패튼은 부임 일주일도 안돼서 자기 군단에 속한 사단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34사단은 너무 방어에만 치우쳐 있고, 9사단은 무식해서 용감했던 것이다. 1사단은 괜찮은 편이다. 1기갑사단은 겁쟁이들만 모였다.


며칠 후 벌어진 전투에서 패튼의 판단이 옳았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가 괜찮은 편이라고 말한(패튼의 성격으로 볼 때 이 정도면 대단한 평가였다) 1사단은 열악한 상황에서도 밤새도록 행군해 임무를 완수했다. 교묘한 기동으로 그들은 적의 측면으로 우회해 수백 명의 포로를 잡고, 캐서린 고개에서 2군단에 수모를 안긴 독일 최정예 10기갑사단의 반격을 격퇴했다. (이후에도 1사단은 맹활약해서 오늘날까지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전 미군 중에서 최고 부대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반면 1기갑사단의 사령관은 무능했고, 예상된 목표를 하나도 제때 점령하지 못했다. 독일군이 반격해 오자 충분히 대응전술을 설명해 주었음에도 낡은 방식으로 싸우다가 커다란 피해를 보았다.

사람은 여러 인간 유형을 만나면서 그에 대한 나름의 데이터와 평가를 지니고 살아간다. 다시 말해 '편견'이 쌓이는 것이다. 공정한 심성을 갖추고 편견에 대한 도덕적 거부감과 의지가 확실한 사람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자신의 개인적 경험에서 오는 편견이 있기 때문이다. 1940년대 미군에서 이런 본연적 편견은 자신의 병과에 대한 편견으로 발휘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패튼은 이런 한계를 극복한 장군이었다. 이는 아래의 브래들리의 회고에서 확인을 수 있다.

“비록 패튼은 평생 기병으로 살아왔지만, 그는 잘 훈련된 보병의 진가를 인정하고 극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패튼의 장점은 그가 개인적으로 싫어했던 1사단장 테리 앨런Terry De La Mesa Allen, Sr(1888~1969)과 관련된 일화에서도 찾을 수 있다. 앨런은 매우 신중하고 차분한 인물로 패튼이 좋아하지 않을 타입이었다. 패튼이 독일기의 공습이 유독 잦은 1사단에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장교들은 공습에 대비해 본부 주변에 개인별 참호를 파 두었는데, 그때 패튼은 불쾌한 심기를 드러냈다. 필히 이건 겁쟁이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패튼은 장교들 중 앨런의 참호 위치를 묻고, 그 참호로 가 오줌을 누었다. 앨런을 공개적으로 모욕 한 것이다.

출처: findagrave.com
(테리 앨런 (1888~1969))

그러나 개인적 선호와는 별도로 패튼은 누구보다 앨런의 진가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상급 지휘관들은 앨런의 차분한 성격 때문에 그를 무능하다고 평했다. 시칠리아에서도 1사단이 혁혁한 공을 세우자 지휘부는 소심한 지휘관 앨런을 교체하면 더욱 굉장한 사단이 될 것이라며 그를 해임하려 했다. 이는 당시 1사단 장병들이 그 소식을 듣고 모두 울었다고 할 정도로 잘못된 판단이었다. 이 결정에 끝까지 반대한 인물이 패튼이었다.

출처 프리미엄 경영 매거진 DBR 28호
필자 임용한
인터비즈 홍예화 정리
inter-biz@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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