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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경영]조선시대 '특수부대' .. "체탐자"

조회수 2018. 8. 19. 11: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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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대왕 시기, 여진족과의 전쟁이 벌어졌다. 여진족은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만주와 간도에 폭넓게 흩어져 살고 있었지만 언제든지 조선이나 중국을 위협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위험한 집단이 파저 강 유역의 건주여진이었다.


세종이 4군6진을 개척하자 건주위의 여진은 집요하게 조선의 요새와 개척지를 공격했다. 소규모 게릴라 부대로 공격하기도 했으며, 여러 부족이 합해 대규모 공세를 펼치기도 했다. 조선 정착민들도 새로 차지한 땅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 울타리를 높이고, 일반 농민들은 등에 활을 메고 경작을 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4군과 6진)

그러나 아무리 경계를 철저히 한다 해도 기습 공격에 완벽하게 대비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게릴라전을 펼치는 적들은 효율성과 능률 면에서 앞서 있었다. 수비 쪽에서는 소수의 적이 어느 지역에서 언제 출몰할지 모르기 때문에 전 지역에 걸쳐 경계태세를 확립해야 하고, 상대적으로 더 많은 인력과 비용을 소모하게 된다.


이런 불리한 여건을 극복하기 위해 조선에서는 ‘정탐자’, 혹은 ‘체탐자’라 불리는 특수부대를 조직했다. 엄밀히 말해 정식부대가 아닌 소수의 전문요원들이었다. 강(국경)을 넘어 들어가 여진족의 움직임이나 침공 징후를 탐지하는 것이 이들의 임무였다. 

처음에는 여진 지역의 지리· 동정 등을 살피기 위해 간헐적으로 정탐꾼을 보냈던 것 같다. 그러다가 4군6진이 개척되고 여진족과의 충돌이 빈번해지면서 체계화되기 시작했다. 전성기에는 강변의 군사기지마다 3명의 체탐자를 두게 했다. 평안도에만 540명의 체탐자가 있었다.


전술도 점점 발달했다. 처음에는 보통 2, 3명이 한 조가 되어 움직였지만 나중에는 5∼10명으로 늘었다. 이들은 주기적으로 여진 지역에 들어갔으며, 보통 3∼5일씩 활동하고 교대했다. 높은 곳에 숨어 적의 침공을 감시할 때는 2, 3명이 하루치 식량만 들고 강 건너 비밀관측소에서 정보 수집 활동을 했다. 이들은 낮에 은신하고 야간에 이동하며 정찰·잠복 임무를 수행했다. 

출처: 동아일보DB
(해군 특수부대 UDT/SEAL의 훈련 모습. 조선시대의 체탐자 역시 정예로 꾸려진 특수부대였다)

이들은 여진 지역에 사는 조선인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이들이 체계적인 활동을 하면서 여진족의 대응력도 높아졌다. 아지트인 조선인의 집이 발각돼 체탐자들이 살해당했다는 기록도 있고, 영화처럼 유능한 특수부대원의 집이 공격을 받아 가족들이 살해되는 사건도 있었다.

세종 19년(1437)에 2차 여진 정벌을 계획하면서 이들에게 가장 어려운 임무가 내려졌다. 조선군 사령부는 4년 전 감행했던 1차 정벌이 기대 이하의 성과를 거둔 이유를 △지역 특성을 잘 알지 못한 것, △전략거점이 될 만한 대도시가 적었던 것, △여진족 지도부의 행방을 몰랐던 것에서 찾았다. 그리고 2차 정벌에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 체탐자들에게 타격 목표로 삼을 적의 근거지를 찾아내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앞서 언급했듯 이는 지금까지의 임무와는 수준이 다른 매우 위험한 과제였다. 지금까지는 적의 침략을 사전에 탐지하는 것이 주목적이어서 정해진 장소에 은신해 관측하고 이 지역에 사는 협력자를 만나 정보를 수집하면 됐다. 그러나 적의 근거지나 은신처를 찾아내려면 적진으로 깊이 들어가 돌아다녀야 했다. 더욱이 여진족도 침공의 낌새를 채고 경계를 강화한 상황이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채탐자
(테스트 받는 체탐자 지원자들)

세종 19년 5월에 파견한 팀들은 임무 수행에 실패했다. 윗선에서 심한 질타가 쏟아졌다. 다시 여러 팀이 파견됐다. 이 가운데 이산 출신의 김장이 지휘하는 팀에게 환인에 있는 우라산성(‘우라’는 여진어로 물이라는 뜻이다. 강가에 있는 산성이어서 이런 이름을 붙인 것 같다)을 정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곳이 조선군이 침공했을 때 여진족들이 집결하도록 계획된 피란처이기 때문이었다. 압록강에서 환인까지는 실제 거리로 300km 이상을 침투해야 하는 대장정이었다.

“이달(6월) 초사흘에 이산(理山) 정탐꾼 김장 등 다섯 사람이 파저강을 몰래 건너 우라산 북쪽 모퉁이에 있는 오미부(吾彌府)에 곧장 이르러 보니 물 양쪽 언덕에 큰 들이 모두 개간되어 농민과 소가 들에 흩어져 있었으되 말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 김장 등이 이 도적의 소굴을 보고 도로 한 고개 위에 오르자, 도적 5기(騎)가 밀림 속에서 고함을 치며 쫓아 나와 (활을) 쏘기에 할 수 없이 나무에 의지하여 응사했는데, 김유생(金有生)이 적의 왼쪽 뺨을 맞히니 그 뒤로는 모여 서서 쫓지 아니하므로, 몰래 도망할 즈음에 그 뒤를 돌아보고서야 군인 김옥로(金玉老)가 없음을 깨달았으나 사로잡힌 것은 아니고 반드시 떨어져서 홀로 나오다가 짐승에게 먹혔거나 물에 빠진 것이었습니다.”

-세종실록 권77, 세종 19년 6월 11일


김장이 지휘한 체탐자 팀의 노력 덕에 조선군은 우라산성 진출에 성공했지만, 이러한 활약과 반대로 2차 정벌 이후 체탐자들의 활동 기록은 점차 사라진다. 16세기 이후로는 거의 사라진 듯하다. 여진족과 평화를 유지하면서 희생이 많은 적진 침투를 중지시키고 강변 경계로 임무를 대체한 덕이다.


그러나 그 이면의 진짜 이유는 이들을 포상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이 작전에 투입되면 하루를 15일 근무로 쳐주고, 매년 우수자 몇 명을 선발해 6품 이하의 산관직을 주었다. 그러나 이는 체탐자들의 삶을 바꿀만큼의 큰 포상은 아니었다. 산관직을 줬지만 수혜자도 적고, 그런 관직은 받아도 진짜 양반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우라산성 정찰작전에서 사망한 김옥로의 유족에겐 그 집에 부과하던 부세를 면제하는 혜택과 쌀·콩 2석이 지급됐지만, 이는 5인 가족의 한 달 양식에 불과했다. 


체탐자가 전사하면 책임 추궁을 당하는 것도 문제였다. 지금 한국 사회도 이 이상한 풍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조선시대 관료제는 소위 ‘도의적 책임’이라는 것을 남용했다. 어떤 사회나 조직이든 구성원들을 합리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운용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 사고나 불상사가 발생하면 그 과정을 정확하게 점검하고 개별적인 역할과 책임을 명확하게 추출해서 평가해야 한다. 이는 2가지 발전적 이익을 가져다준다. 첫째, 실패를 통해 최대한의 교훈을 얻어 모든 구성원의 업무와 역할을 개선할 수 있다. 둘째, 구성원 개개인의 능력과 적성, 장단점에 대한 데이터를 축적할 수 있다. 업무에 대한 평가도 이 원리에 기초해서 접근해야 한다. 

이에 반해 도의적 책임을 지우는 방식은 조직원들의 수동적·복지부동적 태도를 유발한다. 또 누군가의 사임을 빌미로 업무와 구성원에 대한 평가를 슬쩍 넘기는 일도 자주 발생한다. 더 나쁜 폐단은 공석이 될 자리에 대한 욕심 탓에 불필요한 갈등과 음모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체탐자의 소멸에서도 이런 징조를 발견할 수 있다. 평화가 오면 정탐활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적어지고 사고 및 전사자에 대한 책임 추궁만 늘어난다. 위험하고 모험적인 업무를 꺼리고 포상도 적어지니 기능도 점점 떨어진다. 결국 사고가 발생할 위험은 더 높아지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결국 조선은 이들의 운용을 포기했다. 


16세기가 되면서 평화롭던 국경이 다시 소요하게 됐으며, 조선군은 몇 차례의 기습과 패전을 경험한다. 그 피해자 중에는 이순신 장군도 있다. 1586년 조산보 만호 시절 여진족의 기습을 막지 못한 죄로 파면돼 백의종군에 처해진 것이다. 17세기에는 여진족이 다시 일어나 후금(청)을 건설했지만 조선은 후금의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소수의 특수부대에게 그런 것까지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15세기에 보여 준 용사들의 헌신과 능력이 지속적으로 발전했다면 조선군의 정보 능력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처럼 참담한 수준으로 전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출처 프리미엄 경영 매거진 DBR 27호

필자 임용한

인터비즈 황지혜 정리
inter-biz@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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