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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명장 "설인귀"의 패배와 몰락

조회수 2018. 8. 12. 11: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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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과 전술은 상대방 입장에서, 계획은 최악을 대비해야 한다

설인귀는 중국 당나라 시대 최고 무장 중 한 명이다. 그의 최대 전성기는 668년 고구려 멸망 시기로, 당나라 장수 10여 명을 쏘아 죽인 고구려 용사를 단신으로 돌격해 생포해왔다는 식의 무용담이 수두룩하다.


그토록 막강하던 그는 669년 당나라가 토번(티베트족 국가) 정벌을 위해 투입한 전투에서 어이없이 대패하고 만다. 강력한 군대와 출충한 무술, 뛰어난 전략까지 갖춘 그가 왜 한순간에 적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신세가 됐을까?


역사를 들여다보면 아이러니도 많고 설명이 곤란한 사건도 많다. 중국 당나라 시대의 무장 설인귀(613∼683)의 인기도 이 중 하나다. 설인귀는 격투는 물론이고 활쏘기와 기마술도 뛰어난 용사였다. 집안이 가난했던 설인귀는 당 태종이 고구려 원정을 시행한다는 말을 듣고 자원한다. 고구려 원정에서 최대의 전투가 안시성 근방에서 벌어진 주필산 전투다.


안시성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온 고구려군 15만과 벌인 전투에서 당군은 대승리를 거뒀고, 이 전투에서 설인귀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후 그는 고구려 원정에 내내 종군하면서 당나라 최고의 스타가 됐다. 몇 년 전에는 중국에서 그의 일대기가 드라마로 제작됐을 정도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설인귀 초상화)

흥미로운 점은, 설인귀가 당나라뿐 아니라 우리나라 무속에서도 큰 인기 스타가 됐다는 점이다. 그가 고구려 멸망에 지대한 공로를 세웠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해하기 힘들다. 혹 신라의 입장에서는 그가 고구려 멸망의 주역이었기에 고맙게 여길 수도 있겠다. 그러나 669년 이후로 그는 나당전쟁에서 당군측 사령관이 돼 신라군과도 치열하게 싸웠다.


신라뿐 아니라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설인귀는 우리나라 무속에서 제일 인기 있는 무장이었다. 고려 현종이 거란군을 피해 나주로 도망칠 때, 설인귀가 나타나 구원해줬다는 전설까지 있을 정도다. 조선 후기에는 그를 주인공으로 한 설인귀전이라는 소설까지 나왔고, 심지어 설인귀가 경기도 파주 또는 적성에서 출생한 한국인이라는 설까지 있었다.


수많은 무용담을 남긴 당나라 무장 설인귀

어쨌든 설인귀는 매우 뛰어난 장수였다. 당태종은 설인귀를 보고 “요동을 얻은 것보다 설인귀를 얻은 게 더 기쁘다”는 유명한 말까지 남겼다. 그는 고구려와의 전쟁뿐 아니라 돌궐, 철륵(몽고족의 일파) 등 유목 민족과의 전투에서도 맹활약을 했다. 설인귀는 개인적으로 무용이 뛰어난 용사였을 뿐 아니라 장군이 되어서도 당나라 전체에서 당할 자가 없을 정도로 과감하고 대담한 전술을 사용했다.


설인귀는 수많은 무용담으로도 유명하다. 단신으로 적진에 들어가 적장의 목을 말안장에 걸고 나왔다거나, 당나라 장수 10여 명을 쏘아 죽인 고구려의 용사를 단신으로 돌격해 생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번은 방동선이라는 장군과 한팀이 됐는데, 방동선은 설인귀와는 정 반대로 전투보다는 군대 관리, 조직운영에 능력이 뛰어난 장군이었다.  


어느 날 방동선의 당군과 고구려군이 격돌했는데, 고구려군이 너무 강해서 당군이 크게 위축됐다. 이를 눈치챈 고구려군은 승세를 잡고 당군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설인귀가 뛰쳐나와 고구려 군을 향해 돌진했다. 그의 군대는 고구려 진영을 관통해서 군을 반으로 갈라놓았다. 놀란 고구려군은 붕괴했고 5000명이 전사했다. 고구려 원정의 마지막 해에 그는 겨우 2000의 병력으로 부여 정복에 나서 수만 명을 죽이고 부여 땅을 정복했다.

설인귀의 인생에서 최고의 절정기는 668년 고구려 멸망 당시였다. 당나라는 고구려 땅을 통치하기 위해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설인귀는 안동도호부의 책임자가 됐다. 2만의 병력을 보유하며 정복지 고구려의 치안을 책임지는 임무까지 맡았다. 그의 최후 목표는 분명 제후 책봉이었을 것이다.


요동 지역의 제후가 된다면 그는 이 지역의 세습군주가 되어 대대로 권력을 누릴 수 있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당나라는 그가 죽은 뒤 2세대도 지나기 전에 내란에 빠졌다. 만약 설 씨 가문이 만주를 장악했다면, 그의 집안은 전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군벌이 될 수 있었을 테고, 나라를 세우고 황제의 자리를 다투는 수준으로 성장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고구려 정복만으로는 공이 조금 부족했던지, 설인귀는 제후로 책봉되지 못했다. 실망이 컸을 설인귀에게 귀가 번쩍 뜨이는 소식이 전해졌다. 서기 669년 당나라가 토번 정벌에 설인귀와 그의 군대를 투입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토번은 지금의 티베트다. 티베트 고원은 지금도 북부는 몽고족, 남쪽은 티베트족의 거주지로 나뉘는데, 그때도 북쪽은 선비족, 남쪽은 티베트족이 거주했다. 선비족 국가를 토곡혼, 티베트족 국가를 토번이라고 했다. 


중국의 전통적인 외교정책은 ‘이이제이(以夷制夷·오랑캐는 오랑캐로 다스린다)’ 정책이다. 그 원칙대로 당나라는 토번과 토곡혼을 끊임없이 분열시켰다. 그런데 토곡혼의 일부 세력과 토번이 합세해서 토곡혼에서 친당세력을 축출하고, 토번과 토곡혼을 병합했다. 당나라는 이 사태를 간과할 수 없었다.

출처: DBR(동아비즈니스리뷰)

칭하이 고원으로의 진군

설인귀는 자기 휘하의 2만 병력과 중국 조정에서 지원한 병력을 합쳐 10만 대군을 이끌고 티베트 고원으로 진군했다.


그의 목적지는 지금의 칭하이성(靑海省)에 위치한 칭하이 고원이었다. 칭하이 고원은 해발 4000m가 넘는 고원지대다. 양쪽은 6000m가 넘는 산으로 막혀 있고, 산맥 사이는 사막 같은 초원이다. 말먹이로 쓸 풀 외에는 식량을 조달할 도시나 마을도 거의 없다. 고원의 끝에서 끝까지 길게 하천이 흐르지만 우기 외에는 거의 말라 있고 간간이 물웅덩이와 진창이 있는 수준이다. 그 물줄기 중 하나가 대비천(大非川)인데, 현재 이름은 사주옥하(沙珠玉河)라고 한다. 


해발 고도가 말해주듯이 대비천 일대는 춥고 건조하며, 날씨는 순간순간 변한다. 겨울로 갈수록 바람은 엄청나게 강해지는데, 강풍에도 불구하고 공기가 희박해 숨쉬기가 힘들다. 설인귀는 지형이 험하니 이런 곳에서는 정예 기병으로 돌격해 속전속결로 빠르게 승부를 내야 한다고 결정했다. 

사실 그는 언제나 그렇게 싸웠지만, 이곳에서는 의미가 특별했다. 중국 역사를 보면 국민들이 제일 두려워한 원정이 토번이나 운남 원정이었다. 두 지역은 다 4000m가 넘는 고원지대로 원정이 길어지면 고산병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치료약도 없었으므로 원정의 성공, 실패를 불문하고 이 원정에 끌려간 병사들 가운데 살아 돌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 무조건 속전속결로 끝내야 했다.


문제는 정예 부대만 치고 나가면 보급로가 길어지고, 뒤에는 약하고 병든 병사만 남는다는 것이었다. 토번은 게릴라전으로 나와 취약한 보급로를 공략할 게 뻔했다. 설인귀는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 티베트군 공격에 앞서 후위를 맡은 곽대봉에게 산으로 올라가 요새를 구축하고 이곳에 보급품을 모아 놓고 지키라고 명령한다. 


시작은 순조로웠다. 설인귀는 티베트군 선발대를 격파하는 데 성공했고, 수만 마리의 양도 노획했다. 계속 진군해서 목표지였던 오해성(烏海城: 위치 미상)까지 무사히 당도하는 데도 성공했다. 하지만 그때부터가 문제였다. 티베트군은 성 밖으로 나오지 않고, 계속 농성을 벌였다. 설인귀는 성을 계속 공격했지만 지형상 워낙 거칠고 험한 곳이라 공략이 쉽지 않았다.  


그 사이에 티베트군은 설인귀의 예상대로 후위 보급부대를 노렸다. 문제는 곽대봉이 설인귀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곽대봉은 설인귀의 명령대로 산 위에 기지를 축조하지 않고 보급품을 끌고 그냥 행군해서 설인귀의 뒤를 따라왔다. 아마도 그는 뒤에 남아 있는 게 무서웠던 모양이다. 결국 티베트군은 이들을 공격해서 몰살시키고 모든 군량을 빼앗아가 버린다.

충격의 전멸

놀란 설인귀는 후퇴를 명령했지만, 산맥으로 막힌 좁은 회랑이라 퇴로는 들어온 길 한 곳뿐이었다. 허겁지겁 좁은 외길을 따라 빠져나와 대비천에 도착했을 때, 티베트군은 퇴각로를 막고 전 병력이 합세해 당군을 공격했다. 굶주리는 데야 천하의 설인귀도 방법이 없었다.


결국 당군 10만이 전멸했고, 설인귀와 당군 지휘부는 포로 신세가 됐다. 설인귀는 이 대비천 전투의 패배로 티베트군에 살해될 수도 있었지만, 토번 지휘관 가르친링(論欽凌)이 포로로 잡힌 당군 지휘부를 석방해 준 덕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가르치링은 필요 이상으로 당나라를 자극하는 것은 피하고자 했던 모양이다. 극적으로 살아나기는 했지만 불패장군 설인귀의 전설은 끝나고, 그의 명성은 땅에 떨어졌다.

대비천 전투 패배의 교훈

설인귀는 대비천 전투 패배의 충격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요동으로 돌아와 나당전쟁에 뛰어들었지만, 또 패배했다. 완전히 몰락한 그를 황제가 불쌍히 여겨 돌궐 전쟁에 파견한다. 여기서 그럭저럭 승리를 거두고 은퇴한 후 얼마 지나 사망한다. 끝내 제후로 책봉되지는 못했다.


티베트 원정의 패배는 외지인에게는 너무나 불리한 지형과 기후, 그리고 휘하 장수인 곽대봉의 명령위반 탓이 컸다. 설인귀도 곽대봉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했다. 그러나 설인귀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첫째는 설인귀의 전술과 스타일이 너무 뻔했다. 티베트군은 설인귀의 전술을 예측해 그를 깊이 끌어들여 요새에 못 박아 둠으로써 당군을 분리시켰다. 설인귀가 적의 전술을 예측했다고 하지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예비 계획은 전혀 없었다. 곽대봉의 명령 불복종도 지휘자로서 부하의 성향과 행동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는 책임은 피하기 어렵다. 


전투가 공성전이라는 시간의 늪에 빠졌을 때, 전술을 재검토하지 못했고, 식량 두절의 상황에도 대비하지 못했다. 곽대봉이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준비가 있었다면 철수하더라도 대비천에서 몰살당하지 않고 빠져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전략과 전술은 언제나 상대편의 입장에서 보아야 하고, 모든 계획은 최선과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

성공의 경험이 많고, 명성에 취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방법에 확신을 가지고,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다. 부하들도 당연히 자신을 따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설인귀의 부하들 중 일부는 그의 명성에 혹해서가 아니라 그가 뇌물도 적당히 받고, 부하들의 충성과 정복욕을 자극하기 위해 약탈과 노략질, 심한 경우는 학살까지도 적당히 허용한 덕분에 그를 따랐다. 하지만 칭하이 고원에는 쓸 만한 도시는커녕 약탈을 일삼을 마을도 거의 없었고 도처에 죽음의 냄새만 넘쳐흘렀을 뿐이다.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출처 경영매거진 DBR 67호 (필자 임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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