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경영]'올탱크 공격'만 믿다 낭패본 이스라엘, 교훈은?

조회수 2018. 7. 29. 11: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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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의 허실(虛實) 편에 ‘기전승불복(其戰勝不復)’이라는 어구가 나온다. ‘전쟁에서 한번 승리한 방법은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기업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1973년 이스라엘의 전투 패배와 한때 ‘휴대전화 제국’으로 군림했던 노키아의 몰락을 통해 과거 성공에 집착한 이들의 결말을 엿보려 한다. 프리미엄 경영 매거진 DBR에 실린 글이다.

올-탱크 공격에 취한 이스라엘의 후회

1967년 6월5일 이스라엘은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아랍 국가들을 기습했다. ‘6일 전쟁’의 시작이었다. 이스라엘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해 서쪽으로는 이집트 영토인 시나이 반도, 동쪽으로는 시리아 영토인 골란 고원을 단 6일 만에 점령하고 전쟁을 끝냈다. 기계화 보병의 수행 없이 탱크로만 대형을 짜 유기적으로 진격하는 ‘올탱크 공격’ 전술이 큰 효과를 거둔 덕분이었다.

출처: (좌)위키미디어, (우)무기의 세계
6일전쟁에서 크게 활약한 이스라엘군의 AMX-13 전차(왼쪽)와 이후 이스라엘군의 주력이 된 메르카바 전차

그로부터 몇 년이 흘렀다. 1973년 10월6일 오후, 설욕의 칼날을 갈아온 아랍 국가들이 이번에는 이스라엘을 먼저 기습했다. 바로 ‘욤키푸르 전쟁’이다. 시나이 전선에서는 보병만으로 수에즈운하를 도하한 이집트 군이 이스라엘을 기습해왔다. 허를 찔렸지만 이스라엘군은 탱크가 없는 이집트군을 상대로 자신만만했다. 이스라엘 군은 진지를 구축한 이집트 군을 상대로 보병의 호위 없이 탱크 부대로만 돌격을 감행했다. 6일전쟁의 승리를 이끈 탱크 운용술에 다시 한 번 기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지난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올-탱크 공격에 변변한 대응도 못하고 당했던 이집트 군은 이에 대한 방비를 확실히 하고 나왔다. 소련으로부터 ‘RPG-7’과 같은 대전차 로켓은 물론, 최신식 무기였던 보병용 대전차 미사일 ‘AT-3 새거’를 대량으로 도입해 병사들 사이사이에 이런 무기들을 촘촘히 배치했다.


공격해오는 이스라엘 탱크들을 향해 이집트 병사들의 대전차 로켓과 대전차 미사일이 날아가자 폭발하는 이스라엘 탱크가 속출했다. 그 결과 개전 후 48시간 만에 이스라엘 군은 시나이에 배치했던 탱크 700여 대 중 3분의 1 이상이 타격을 입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이스라엘 군은 뒤늦게 탱크의 운용 방식을 바꿨다. 보병을 태운 장갑차나 트럭이 탱크부대를 수행하게 하고, 매복이 의심되는 곳에 보병을 먼저 내보내 대전차 무기를 제거했다.


이때부터 이스라엘 탱크의 손실 대수가 크게 줄어들기는 했지만 이미 피해는 컸다. 적의 대비와 대전차 미사일의 출현이라는 상황 변화를 감안하지 않고 기존의 방식을 그대로 반복했다가 뒤늦게 이를 바꿨지만 그때는 이미 국가의 존망을 좌우할 만큼 막대한 손실이 발생한 후였다.  

과거의 성공공식에 집착한 노키아의 몰락

1865년에 핀란드의 노키아라는 작은 도시에서 제재소로 출발한 노키아(Nokia)는 인수합병을 통한 사업 다각화로 케이블, 타이어, 전자, 통신제조업 등 폭넓은 사업을 영위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후 1990년대 초 휴대전화 제조업에 뛰어들어 1998년 세계 1위의 휴대전화 기업으로 올라선 뒤 고성장을 거듭했다. 2007년 말에는 전 세계 휴대전화 시장의 40% 이상을 점유할 정도의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스마트폰이 시장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노키아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사실 노키아는 스마트폰 시장을 선도한 회사였다. 1996년 노키아는 자사 최초의 스마트폰인 ‘Nokia 9000’을 출시한 후 파생 모델들을 지속적으로 내놓았다. 애플의 아이패드가 나오기 한참 전인 1990년대 후반에는 무선 인터넷과 터치 스크린이 탑재된 태블릿 컴퓨터까지 개발했다.

출처: 노키아뮤지엄 홈페이지
노키아 9000

경쟁사들보다 훨씬 빨리 시장에 진입한 결과 초기 스마트폰 시장에서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다. 아이폰이 출시되기 직전인 2006년에 이 회사의 스마트폰 판매대수는 3900만 대를 기록했다. 2007년 6월 출시된 아이폰이 2010년이 돼서야 판매대수가 3900만 대를 넘어선 것을 보더라도 이 회사는 초기 스마트폰 시장에서 큰 활약을 보였다.


노키아의 스마트폰이 한창 시장에 나오던 시기인 2004년, 피처폰 시장에서는 모토로라의 RAZR가 세계적 히트를 기록하고 있었다. 경쟁사의 선전으로 노키아의 투자자들은 “경쟁 회사가 기능이 별로 없는 휴대전화로 시장을 잠식하고 있는데 노키아가 하이엔드 스마트폰에 집착한다”고 비난했다. (애플 아이폰 등장 이전 세계 스마트폰 시장 규모는 피처폰에 비해 매우 작았다)

출처: 노키아뮤지엄 홈페이지
노키아 휴대전화의 역사

이런 와중에 2006년 ‘수익에 민감한 재무쟁이’ 올리페카 칼라스부오가 신임 CEO에 취임하면서 노키아는 피처폰 강화 전략으로 선회했다. 스마트폰 사업부는 피처폰 사업 부문으로 통합됐고, 당연히 후속 스마트폰 모델과 소프트웨어의 개발이 더뎌졌다.


노키아가 전략적인 오류를 범하면서 고전하는 동안 애플과 삼성은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을 장악했다. 결국 2013년 9월, 1998년 이래로 14년간 세계 휴대전화 업계 1위 자리를 유지하며 한때 3030억 달러 수준의 시가총액 규모를 자랑하던 이 거대 기업은 휴대전화 사업 부문을 마이크로소프트에 단 72억 달러에 매각하는 신세가 됐다. 결론적으로 노키아는 ‘과거의 성공에 대한 미련’으로 ‘자기부정’을 하지 못했고 이 선택이 쇠락의 길로 이어진 것이다. 

출처: 동아일보

*편집자 주: 과거 전투를 성공으로 이끈 전술에 기대었다가 크나큰 패배를 맛본 이스라엘. 이미 성공한 시장에서의 안정적인 성공에만 집착해 급변하는 시장 흐름에 뒤처진 노키아. 이 두 가지 사례에서 공통적으로 얻을 수 있는 건 서두에서 밝혔듯 ‘기전승불복(其戰勝不復)’의 교훈입니다. 필자는 이를 통해 “과거에 성공한 전략이 내일도 반드시 통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과거의 것은 무조건 버리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비즈니스 현장은 언제나 변화하는 곳이라는 점, 기업은 언제나 자신들의 전략을 점검하고 수정해나가야 한다는 점을 기억하면 좋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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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프리미엄 경영 매거진 DBR 167호
필자 김경원

인터비즈 황지혜 정리

inter-biz@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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