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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재하는 미친존재감 - BMW M5

조회수 2018. 10. 25. 09:1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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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5 심층 분석 시승기
Writer 신동헌: 칼럼니스트이자 방송인, 자동차 전문 블로거 '까남'으로 잘 알려져 있다.

M5의 존재를 처음으로 의식하게 된 것은 1999년이었다. 내가 직장 생활에 첫발을 뗀 해였는데, 우리나라에 공식적으로 처음 M5가 수입되기 시작한 해이기도 했다. M5는 1984년 1세대 5시리즈부터 등장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절대 인기를 끌지 못할 스타일이었다. 일반적인 5시리즈와 구분하기 어려운 평범한(?) 외관에 강력한 엔진과 주행 성능을 ‘몰래’ 집어넣은 구성은 돈을 어디에 썼는지 구분하기 어려워 보였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그 은근함 덕분에 진정한 럭셔리로 여기지만, 1980년대는 아직 ‘은근한 럭셔리’를 논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커다랗다 못해 거대한 상표와 눈에 띄는 호화로움이 있어야 ‘고급’이었던 시대다. 그래서 자동차 잡지에서 M5 모습을 봐도 별 감흥이 없었다. 모름지기 ‘스포츠카’라면 람보르기니 카운타크(당시에는 쿤타치라고 부르면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다) 정도는 되어야 ‘멋지다’라는 느낌을 줄 수 있었고, BMW라면 8시리즈처럼 불쑥 튀어나온 헤드라이트가 달린 모델 정도는 되어야 눈길을 끌 수 있었다. ‘슈퍼카’의 시대였던 것이다.

1999년에 처음으로 M5가 눈에 띈 것은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람보르기니 쿤타치나 포르쉐 911 터보를 20세기 말 대한민국 길거리에서 탄다는 게 얼마나 의미 없는 일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차가 이전 M5보다 특출나게 멋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슬쩍 부풀어 오른 펜더라든가, 조금 다르게 디자인한 범퍼는 스탠더드 모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전까지 BMW는 당시 기준으로 봐도 실내가 고급스럽다고 할 수준은 아니었는데, E39 5시리즈부터는 뭔가 하이테크한 느낌이 줄줄 흘렀다. 대시보드와 기어봉의 손이 닿는 부분에는 폭신한 내장재를 더해 감촉부터 달랐다. 기름기 자르르 흐르는 나파 가죽 시트의 느낌은, 원가 절감 때문에 기름기 쏙 빼버린 최근의 BMW오너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누런 할로겐 램프가 상식이던 시대에 시퍼런 HID 램프를 달고 나타난 400마력 수동 미션 슈퍼 세단은 당시의 자동차 마니아들을 모두 얼어붙게 만들었다. 눈 앞에 나타나면 ‘악’ 소리도 내기 힘들 정도로 멋졌다. 요즘이야 슈퍼카가 흔해진데다 인터넷이나 소셜미디어도 발달해서 한 다리 건너면 아무리 비싼 차 오너라도 연결될 수 있지만, 당시에는 그런 게 전혀 없었으니 누가 탄다더라 하는 소문만 무성할 뿐 M5를 실제로 타보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당시의 M5란 그렇게 특별한 차였기 때문에, 지금의 M5와는 조금 느낌이 다르다. 달리기 성능이나, 고급스러움이나, 크기나 실내공간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면에서 최신 M5가 뛰어나지만, 아무래도 예전처럼 보는 이로 하여금 숨을 멎게 만드는 존재감은 예전만 못하다. 그건 ‘신화(Myth)’가 존재하기에는 너무 많은 정보가 세상에 뿌려졌기 때문일 수도 있고, 이제 대한민국의 5시리즈가 너무 많아서 우리에게 어떤 선입견을 심어졌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한동안 세간을 뜨겁게 달군 ‘불자동차’ 사건도 있어서, 나는 우선 최대한 눈에 띄지 않도록 천천히 이 차를 몰았다. 일반적인 모델보다 다소 딱딱하게 세팅되어 있어서 과속방지턱에서는 어떻게 해도 들썩거릴 수밖에 없지만, 그 외의 장면에서는 마치 평범한 승용차처럼 달릴 수 있다. 스윽 지나가면 아무도 이 차의 엔진 룸에 600마력을 내는 V8 엔진이 실려있는지 알 수 없다. 심지어 운전하는 나조차도 그 사실을 까먹을 정도로 부드럽다. 아이들링 상태에서도 지나치게 시끄럽지 않고, 저속으로 흘러갈 때도 과거의 V8처럼 흐르렁거리면서 존재감을 과도하게 나타내지 않는다. 그 ‘존재감’이라는 게 기름을 태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연비에도 신경써야 하는 요즘 차들은 가능한한 존재를 감춘다. ‘엔진 파워’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양날의 검이어서, 그 존재감을 나타내면 아주 즐겁지만 장시간 함께 하다 보면 짜증이 나게 마련이다. 이십대 초반에는 쉴새 없이 재잘대는 상대와 사랑에 빠지지만 결혼까지 골인하는 경우가 드문 것과도 같다. 잠깐은 좋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 하기에는 피곤하다. 이 차는 부산까지 왕복으로 달려도 전혀 피곤하지 않을 정도의 정숙도를 갖고 있다. 물론 액셀러레이터를 바닥까지 밟으면 순식간에 엄청난 박력이 터져 나오지만, 모든 게 운전자의 컨트롤 하에 있다. ‘갑자기’가 아니라 ‘순식간에’다. BMW는 30년 넘게 엄청난 파워를 가진 고급 세단을 만들어왔고, 오너들이 어떤 걸 원하는지 잘 알고 있다.

네 바퀴를 모두 굴리는 AWD화도 그 때문이다. 1.5억짜리 세단을 타는 사람은 누구나 안정된 트랙션 성능을 원한다. 나는 액셀러레이터를 훅 끊어서 밟으면 뒤가 훽 하고 돌면서 순식간에 방향을 바꾸는 후륜 구동 특유의 코너링을 아주 좋아하는데, 그걸 즐기는 사람은 의외로 별로 없다. 평범한 사람들은 뒷바퀴가 조금이라도 미끄러지면 세상 끝난 것처럼 불안해하고, 트랙에서 기록을 줄이는 걸 즐기는 사람들은 그 과격한 조작을 원시인이 나뭇가지 비벼서 불피우는 것처럼 미개하게 여긴다. 뒷바퀴를 일부러 미끄러뜨리는 건 오직 즐거움을 위한 조작일 뿐 다른 의미는 없는데, 좀 더 작은 스포츠카라면 몰라도 이 거대한 600마력짜리 세단은 그런 용도가 아니라는 거다. 그래서 트랙을 즐기는 사람이든, 속도를 낼 건 아니지만 출력이 센 자동차를 좋아하는 사람이든 간에 AWD화를 반기는 모양이다. M5가 더 이상 후륜구동이 아님을 개탄하는 사람은 나와 당신처럼 활자로만 M5를 즐겨온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BMW M 엔지니어들은 우리 마음을 완전히 저버리지는 않았다. 트랙션 컨트롤을 끄면 후륜구동 모드로 조작할 수 있다. 트랙에서 기록과 상관없이 뒷바퀴를 슬슬 흘리며 활기차게 달리고 싶은 사람, 혹은 드리프트를 즐기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다. 어차피 거리에서 뒷바퀴를 미끄러뜨릴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니 이 정도가 적당한 지도 모르겠다. BMW는 뒷바퀴 굴림이 아닌 M5를 탐탁찮게 여기는 사람들을 위해 이 차를 출시하면서 기네스북에 새로운 기록도 올려놓았다. 새로운 M5는 세상에서 가장 오랫동안 드리프트로 달린 자동차이자, 두 대가 나란히 드리프트를 하며 가장 오래 달린 기록까지 함께 세웠다. 그만큼 정교하게 조작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BMW는 이 차를 눈여겨보는 사람들의 머릿 속에 들어와 있다.

나는 이 차를 누적 주행거리 한 자리수부터 타기 시작해서 한 달 정도 운전하는 동안 법정 속도를 몇 번 넘기기는 했지만, 레드존을 치면서 달리는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다. 평범하게 달려도 충분히 빨랐고, 도심에서는 페달을 바닥까지 밟기는 커녕 발가락에 힘을 줄 일도 별로 없었다. 충분히 편안했고 충분히 빨랐다. E60 M5가 등장하자마자 이 차를 탔을 때는 일주일 동안 강원도 산길을 따라 미친 듯이 달리면서 한 달 봉급을 훌쩍 넘는 기름값을 지불했었다. 십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이를 먹으면서 이 차의 오너들과 비슷한 라이프스타일을 갖게된 셈이다. 그런데 적산거리 2000km를 넘어서고 첫 번째 정기점검을 받은 후, 몇 백킬로를 더 달리자 차에서 뭔가 변화가 느껴졌다. 폭포수 아래에서 소리를 지르다 득음이라도 한 것처럼, 배기음이 슬쩍 변한 게 느껴진다. 흡기음도 조금 커진 것 같고, 가속도 조금 날카로워졌다. 차가 길이 들기 시작한 것인지, 조작에 익숙해져서 발가락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는 것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처음 탔을 때보다 좀 더 재미있어 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한 달 동안 익숙해져서 이게 M5인지 4기통 디젤 엔진을 장착한 스탠다드 5시리즈인지 헛갈릴 즈음이 되자 존재감이 슬쩍 나타난다. 스티어링을 돌리는 손이나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발에도 좀 더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올라타자마자 흥분해서 엉망으로 도로를 휘저어 놓고 나면 금세 한계를 드러내버리는 스포츠카도 많은데, 이 차는 처음에는 뭔가 자극이 부족한 게 아닌가 싶더니만 익숙해질 만 하니까 머리끈을 푸르고 안경을 벗더니 머리채를 휙 돌린다. 심장이 다시 뛴다. 그러나 흥분해서 콧김을 쉬익 내뿜는 건 이 차에 어울리는 반응이 아니다. 안경을 코 위로 스윽 밀어 올리고는 차분하게 앞으로를 계획하는 게 M5에게 어울린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와 슈트를 입은 여자를 대하는 방법이 다르듯이 똑같은 600마력이라고 해도 투 도어 쿠페와 세단은 즐기는 방법이 다르다. 생각 같아서는 제대로 된 시승기를 쓰고 싶다며 5년쯤 이 차를 돌려주지 않고 심층 분석하고 싶은 것이다. 


Photo by 이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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