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같은 꿈을 꿨어' <춘몽>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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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도 현실도 아닌 영화 <춘몽>춘몽>
차를 갈아탈 때 만난 시커먼 어둠 빼고는 달리 어떤 색깔이었는지 떠오르지 않는 그 동네는 늘 성실하고 단조롭게 사람들을 내려주고 다시 실었다.
'물빛'이라는 이름을 가진 동네,
수색에 관한 기억이다.
영화 <춘몽>은 수색을 배경으로 한다.
서울 변두리에 사는 별 볼 일 없는 청춘들을 둘러싼 꿈도 현실도 아닌 이야기다.
영화는 영화와 현실, 안팎의 경계를 넘나든다. 주인공 중 한 명인 예리는 배우 한예리의 이름을 그대로 따왔다.
충무로의 젊은 감독 세 사람도 주연배우로 나섰다. 자기 영화를 연출하고 연기했던 양익준, 박정범, 윤종빈 감독이 그들이다. 셋 모두 대표작의 캐릭터와 비슷한 인물로 그려진다.
한물간 동네 건달 익준은 <똥파리>의 용역 깡패 상훈과 겹쳐 보이고, 월급이 밀려 악덕 사장 앞에서 1인시위를 하는 탈북자 정범은 <무산일기>에서 한국 사회에 스며들지 못하고 전단지를 돌리며 생계를 이어가는 탈북자 승철을 떠올리게 한다.
이들 중 유일한 유한계급 청년 종빈은 예리가 세들어 사는 집의 건물주 아들로, 간질을 앓는 청년이다. 그는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부조리한 군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목을 맨 지훈과 일부 겹친다.
중국에서 건너온 예리는 어릴 적 외도로 가정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를 찾으러 한국에 왔다. 한국으로 떠나오기 전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수소문 끝에 만난 아버지는 눈도 제대로 끔벅하지 못하고 잠들 듯 병들어 있다. 예리는 세들어 사는 집 앞에 가건물을 세워 ‘고향주막’을 운영하는데 이곳을 찾는 세 명의 단골이 익준, 정범, 종빈이다.
고아원 출신 익준은 고향이 어디인지 모르고, 정범의 고향은 북쪽이며, 종빈의 고향 수색은 언젠가 개발자본에 싹 밀려 사라질 테다. 그리고 출신조차 알 수 없는, 예리를 좋아하는 레즈비언 주영이 있다. 이들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그들의 동네처럼 어느 곳에도 발 딛지 못하고 부유한다.
장률 감독은 제21회 부산영화제 개막작이기도 했던 <춘몽> 발표를 앞두고 한 인터뷰에서 두 동네의 상반된 표정에 대해 말했다. 실제 디지털미디어시티에 거주하는 감독은 "그곳에서 첨단산업 구역에 사는 사람들의 ‘준비된’ 표정을 마주친다면 수색에서는 생기를 접했다고 했다.
그럼에도 감독은 수색을 두고 “도무지 컬러로 생각나지 않는 공간”이라고 말한다. 매끈한 디지털미디어시티가 무표정한 도시라면, 수색은 사람의 온기는 있어도 너무 낡고 오래되고 지쳐 색이 바랜 무채색의 동네 같다는 것이 그의 요지다.
영화는 내내 흑백 영상으로 그려진다. 영화 후반부에 잠시 색이 입혀지는 장면을 제외하고는 모두 꿈에 불과하다는 뜻일까. 혹은 있는 그대로의 색을 내보이면 너무 비루해서 영화는 내내 흑백의 시각을 취했는지도 모른다.
몽롱한 빛을 덧입힌 흑백 영상은 어리숙한 아웃사이더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영화에서 이들은 단 한 번도 서로 부둥켜안지 않지만, 내내 서로를 보듬는 듯한 인상을 준다. 도시 주변부를 헤매다 결국 어느 곳에도 발 딛지 못할 것 같은 불안한 존재들은 이처럼 헐겁게 연대하며 꿈결 같은 삶을 이어나간다.
글 / 신소윤 기자
편집 및 제작 / 천다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