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댓글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o i

번역할 언어 선택

뷰 본문

H21

그 기자는 왜 1년 동안 쪽방촌을 찾았나

심층취재 '가난의 경로'를 소개합니다

31,502 읽음
댓글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o i

번역할 언어 선택
“구겨진 세종대왕을 손으로 쓰다듬어 폈다. 211호 남자 ㄱ(53)이 봉투에 1만원을 밀어넣었다. 209호 ㄱ(남·74)을 위해 빼둔 돈이었다. 그들은 9-20 쪽방에서 210호를 사이에 두고 살았다. ‘좋은 여행 되십소사.’ 그가 209호에게 봉투를 건넸다. 돈을 받은 209호는 제사상 위에서 말이 없었다. 그는 영정이 되어 길 떠날 채비를 했다.”

‘가난의 경로’는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시작이 ‘죽음’이었습니다. 서울 동자동 9-20 지하 1층 지상 4층짜리 쪽방촌에 사는 주민 45명, 이들 중 대다수는 과거 노숙인이었고, 고령이고, 기초생활수급자입니다. ‘가난의 경로’는 그들을 1년간 만나겠다는 심층취재 기획이었죠. 왜 하필 9-20이었을까요.

“가난은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엔가 모여 있다. 보편적 가난은 확산되지만 절대적 가난은 집중된다. 절대적 가난의 경로가 응축된 건물이 있다. 서울남대문경찰서(서울 중구)에서 북동쪽으로 질러 오르면 낡은 건물들 사이로 좁은 골목길이 나온다. 새꿈어린이공원을 마주 보고 지하 1층에 지상 4층짜리 건물이 있다. ‘동자동 9-20’을 주소로 쓴다. 현대사의 격랑에 파손되고 산업화의 파고에 휩쓸린 이들이 한 뼘 방 안으로 모여 이웃을 이루며 산다.

그들 45개 방의 입주민들이 강제퇴거를 요구받고 있다. 건물주는 보수공사를 이유로 전원 퇴거를 압박하고 있다. 퇴거가 현실화되면 9-20으로 자신들을 이끈 길 위에 그들은 다시 부려질 것이다. 가난의 길에서 ‘이탈할 기회’를 한 차례도 얻지 못한 사람들이 과거 거쳐왔던 길을 되풀이해 밟을 것이다. <한겨레21>은 그들의 경로를 추적하는 1년짜리 심층탐사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벗어날 수 없는 가난의 덫과, 숨거나 숨겨진 극빈의 일상과, 빈곤의 길목마다 흐릿해지는 국가의 모습 등이 ‘가난의 지도’ 위에서 드러날 것이다.”

2015년 4월부터 시작된 ‘가난의 경로’ 기획은 2016년 5월까지 1년간 10편의 기사를 남겼습니다. 딱지, 이주, 곡절, 그놈, 한양, 귀가, 순례, 일기, 박멸이라는 제목으로, 때로는 주민들의 일상을, 때로는 쪽방촌 자체를, 때로는 주민들이 증언하는 현대사를 기록했죠. 마지막 화인 ‘일기’는 다음과 같이 끝납니다.
“불의한 현대사가 박철관(주민)과 김형구(주민)의 가난을 키웠다. 그들의 가난을 변방으로 밀어내며 도시는 덩치를 키웠다. 수십 년 거듭된 ‘정비’와 ‘정화’로 동자동과 남대문로5가 주위엔 올려다보기도 벅찬 빌딩숲이 솟았다. 그 숲들이 강렬한 빛을 발산하며 어둡고 움푹한 쪽방을 굽어봤다. 박철관과 김형구가 숲을 헤치며 오간 길은 두 사람만의 경로가 아니었다. 50년 넘게 그 길을 밟아온 ‘박철관들’과 ‘김형구들’의 걸음이 2016년 박철관과 김형구의 가난한 경로 위에 누적돼 있다. 정치와 행정이 오랫동안 지워왔지만 ‘박철관들’과 ‘김형구들’은 완벽하게 지워지지 않았다. 그들은 닦아도 닦이지 않는 얼룩처럼 도시에 묻어 끝내 살아갈 것이었다.”

1년간 한 소재를 반복적으로 기사로 다룬다는 것은 언론으로서는 쉬운 결정이 아닙니다. 매일매일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는 세상이고, 한 매체가 활용할 수 있는 인력은 한정적이니까요. 그런데 왜 <한겨레21>과 이문영 기자는 왜 1년씩이나 9-20을 다룬 걸까요. 안수찬 편집장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선택이 가닿는 곳은 행복도 불행도 아니다. 삶이 선택의 갈림길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촘촘한 쓸쓸함에 삶이 포박당해 있다는 뜻이다. 기적처럼 빛나는 순간을 꿈꾸며 선택해도, 선택하지 않은 다른 것을 무시로 그리워하면서, 우리는 모래 같은 삶을 더 잘게 바수어 그저 살아간다. 오직 가치 있는 것은 선택들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이다. (...) 우리는 사상 최장의 탐사보도를 선택했다. 그 때문에 놓쳐버리는 것이 있다 해도, 쓸쓸한 길이라 해도 그저 나아갈 뿐이다. 1년 뒤 그대와 나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어쩌면 혹시 기적처럼 빛나게 될까.”

출처일러스트레이션 최호철
기획을 진행한 이문영 기자는 이렇게 적었고요.
“쪽방 건물은 방마다 한 가구의 집입니다. 동자동 9-20은 45가구가 사는 45개의 집이었습니다. 강제퇴거가 끝나면 지하 1층·지상 4층짜리 건물 한 채가 거대한 철거촌으로 변하는 ‘사태’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태는 사건 이후에 있습니다. 강제퇴거는 사건이지만 사건의 전과 후는 일상입니다. 사건은 수습되지만 일상은 수습되지 않습니다. 쫓겨나는 사건보다 무거운 사태는 쫓겨난 뒤의 삶입니다. 가난은 강제퇴거란 사건에 있지 않고 강제퇴거 이후의 일상에 있습니다. 사건에 초점을 맞추면 보도는 강제퇴거에서 그치고 맙니다. 사건 뒤 일상에 주목해야 강제퇴거와 가난과의 관계를 좇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1년간 이문영 기자가 발견한 ‘가난의 속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난은 모입니다. 가난은 고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철거(퇴거)는 자석처럼 붙어다닙니다. 정치가 불의할수록 가장 약한 자들부터 가난해집니다. 가난한 동네는 극적으로 노출되고 가난한 사람은 극적으로 사라집니다. 가장 가난한 동네란 ‘명성’은 사적 인프라가 됩니다. 가난의 경로는 해충의 경로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쏭달쏭하죠? 기사 전문('가난에 관한 가난한 후기')으로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아참, ‘가난의 경로’는 영화로도 만들어질 예정입니다. 올 하반기에 완성된다고 하네요. 많이 기대해주세요!
“‘가난의 경로’는 1년 추적 연재를 시작할 때부터 영화 프로젝트를 병행했습니다. 문자만으로는 포착하지 못하는 가난의 다층을 영상이 보완할 수 있길 바라며 전문 다큐멘터리 제작진과 협업해왔습니다. 연재 기사와 함께 공개된 하이라이트 영상들은 머지않아 온전한 영화로 옷을 바꿔 입을 것입니다.

같은 공간을 취재하고 같은 사람을 좇으며 같은 시간을 건너왔지만 기사와 영화는 각자의 시선으로 독립적인 작업을 해왔습니다. 현재 영화는 올 하반기 완성을 목표로 후반 작업 중입니다. 영화가 완성되면 문자 매체와 영화가 결합한 탐사보도의 새 영역을 개척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참고기사 |

*링크 안에 '가난의 경로' 전편 링크가 있습니다.

사진 / 류우종 기자
제작 / 강남규

해시태그

작성자 정보

H21

    실시간 인기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잠시 후 다시 시도해 주세요 Please try again in a mo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