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댓글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o i

번역할 언어 선택

뷰 본문

H21

목격자의 죽음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증언자, 엘리 위젤이 떠나다

13,141 읽음
댓글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o i

번역할 언어 선택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 인간의 사고 범위를 넘어서는 끔찍한 참상에 대해 공개적으로 입 여는 생존자는 거의 없었다. 이후 10여 년간 세계는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엘리 위젤 역시 그랬다. 그는 1944년 가족과 함께 죽음의 수용소에 끌려갔다가 생존해 돌아왔다. 수용소에서 풀려난 뒤, 그는 결심했다.

“목격자로서 책임을 지고 살아남아야겠다.”

엘리 위젤(1928-2016)

그러나 적어도 10년 동안은 그가 본 것에 대해 말하거나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그는 후일 이 결심에 대해 “나는 잘못된 말(wrong words)을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고 설명한 바 있다.


나치 강제수용소에서의 경험을 담은 엘리 위젤의 대표작 <나이트>(1960)는 이런 침묵을 깨고 나온 홀로코스트 문학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나이트>는 설명 불가능한 사건을 말하는 것의 무용함과 그것을 증언해야 한다는 필요 사이의 갈등 속에, 적막한 문장으로 수용소의 삶을 전한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루마니아 출신 유대계 작가 엘리 위젤이 지난 7월2일 미국 뉴욕 맨해튼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7. 죽는 순간까지 그의 왼팔에는 아우슈비츠의 흔적, 수감번호 ‘A-7713’이 새겨 있었다.

“위젤은 우리 시대의 위대한 도덕적 목소리이자, 세계의 양심이었다. … 나는 부헨발트 수용소의 철조망과 감시탑 사이를 함께 걸으며 그가 내게 한 말을 잊지 않고 있다. ‘기억은 선의를 가진 모든 사람들의 신성한 의무가 되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

출처http://www.jewishjournal.com

망각과 폭력에 대한 저항. 그것은 위젤이 평생 소리 높여 말해온 주제였다. 그는 <나이트>를 비롯한 소설, 희곡, 에세이 등 50여 권의 저작과 대중 강연, 대학 강의, 공적 발언과 행동을 통해 ‘기억’의 긴급한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는 미국 워싱턴에 1993년 설립된 ‘홀로코스트 기념 박물관’을 세우는 데도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는 유대인 문제뿐 아니라 전세계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 대변자를 자처했다. 그는 한 명의 유대인 생존자라기보다,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궁극의 악에 의해 소멸해버린 모든 유령들의 살아 있는 대변자처럼 보였다. 비록 그는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지만 말이다.

"너희는 나의 증인들이다." (구약성경 이사야 43장 10절)

출처https://www.ushmm.org/
“내가 소멸된 다수를 대표할 권리가 있나? … 그것은 주제넘은 생각일 것이다. 누구도 죽은 자를 대신해 말할 수 없다. 누구도 그들의 훼손된 꿈과 이상을 설명할 수 없다.”

홀로코스트 기념 박물관

출처https://www.ushmm.org/

엘리 위젤은 1928년 9월30일 루마니아의 시게트라는 작은 도시에서 1남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1944년 나치군이 진격해오면서 이 도시의 유대인 1만3천여 명은 모두 게토에 갇혔고, 곧 죽음의 수용소로 강제 이송됐다. 


당시 15살 위젤 역시 가족과 함께 가축 운반차에 실렸다. 이후 어머니와 여동생은 그와 다른 그룹으로 분류돼 가스실에서 숨졌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아우슈비츠에 수용됐다.

아우슈비츠 수용자들

출처AP=연합뉴스

신실한 유대교 소년인 위젤은 수용소에서 ‘신의 존재’에 의문을 품었다. <나이트>에는 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킨 유명한 장면이 등장한다. 


수감자들은 한데 모여 한 아이가 교수형에 처해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위젤은 뒤쪽에서 한 남자가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을 듣는다. 

“맙소사, 신이시여, 신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위젤은 이렇게 썼다.

“내 안의 목소리가 그에게 이렇게 답했다. ‘여기에 그가 있다. 지금 여기 교수대 위에서 죽어가고 있다.’”

14세의 엘리 위젤

러시아군이 진격해옴에 따라 위젤은 부헨발트 수용소로 옮겨졌다. 아버지는 1945년 1월 이곳에서 굶주림과 이질로 숨을 거뒀다. 위젤은 그로부터 3개월 뒤인 1945년 4월11일 연합군에 의해 해방됐다. 


수용소에서 풀려난 뒤, 위젤은 다른 고아들과 함께 기차에 실려 프랑스 파리로 보내졌다. 그곳의 고아원에서 지내며 프랑스어를 익혔고, 1948년 소르본대학에 입학해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졸업 뒤 프랑스 월간지 <라 르슈> 기자가 되었다.


이즈음인 1949년 유대 왕국 이스라엘이 새롭게 건국됐고, 위젤은 이스라엘에 특파원으로 보내졌다. 그는 이스라엘 일간지의 파리 통신원으로도 일했다. 이때 노벨문학상 수상 소설가 프랑수아 모리아크와 인터뷰했는데, 모리아크는 위젤에게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글로 써보라고 권유했다. 

프랑수아 모리아크

출처http://www.frasescelebres.com/frase-2315

위젤은 자신이 맹세한 침묵을 깨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디시어(유대인 언어)로 쓰인 800쪽 분량의 원고가 완성됐다. 이것이 <나이트>의 초고다. 당시 제목은 <그리고 세계는 침묵을 지켰다>


1958년 127쪽으로 대폭 줄어든 판본이 프랑스어로 번역돼 <라 뉘>(La Nuit·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고, 이후 1960년 <나이트>라는 제목으로 영역돼 미국에서 출간됐다. 나중에 이 책은 30개 언어로 번역됐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나이트>는 미국판이 출간된 첫 18개월 동안 고작 1046권밖에 팔리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아돌프 아이히만의 전범 재판 이후 홀로코스트의 실체에 많은 이들의 관심이 집중됐고, 이후 <나이트>는 1천만 권 이상 팔렸다.


위젤은 전세계 많은 억압받는 이들을 대변해왔지만, 유대인 정통 국가인 이스라엘과 유대 민족주의가 개입된 문제에 대해서는 일종의 ‘사각지대’를 갖고 있다고 비판받았다. 그는 이스라엘의 레바논 전쟁과 학살, 팔레스타인 자치지구 포위와 공격 등에 대해 침묵했다.

이스라엘군 불도저를 향해 돌진하는 팔레스타인 주민. 2015년 10월.

출처AFP 연합뉴스
“팔레스타인 난민을 위해 내가 뭔가를 더할 수 있지 않았을까.”

오프라 윈프리와의 인터뷰 중 “후회하는 것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위젤의 답변이었다고 <워싱턴포스트>는 전했다.



>> 관련기사 / 제1120호 '소멸된 영혼들의 대변자'


글 / 이로사 객원기자

편집 및 제작 / 강남규

*이미지를 누르시면 카카오톡 '선물하기'로 바로 이동합니다.

작성자 정보

H21

    실시간 인기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잠시 후 다시 시도해 주세요 Please try again in a mo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