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거장의 마지막 귀환 - 영화 리뷰 '라스트 미션'

조회수 2019. 4. 29. 12:1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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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헤어전문잡지 그라피
영화 <라스트 미션> 포스터

아버지의 길, 머나먼 ‘아비 로드’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올해 열여섯 살. 질풍노도와 같은 중2병에서 벗어나는가 싶더니 요즘엔 또 사춘기가 뒤늦게 와버렸습니다. 친구들은 중학교 입학 때 이미 겪고 끝난 걸 왜 이제야 겪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하루 종일 말도 없이 골방에 처박혀 있는 날이 점점 늘고 있죠. 


특별히 잔소리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사내자식들이란 그렇게 동굴 속에 웅크려 있다가도 어느 틈에 또 헤벌쭉 웃으며 아무 일 없는 듯 한 뼘씩 자라는 종자니까요. 사소한 걱정거리가 있다면, 이 녀석에게 나는 어떤 아빠가 되어야할까란 고민이 상기도 미해결 상태란 겁니다.

영화 <라스트 미션> 스크린샷

사실 저는 바람직한 아빠는 아닙니다. 경제적인 풍요를 안겨주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테고요. 녀석의 할아버지가 40년간 허리띠 졸라매고 간신히 끊어놓은 가난의 대물림인데, 불행히도 제가 다시 그 잔혹한 세습을 이어가게 생겼습니다. 정신적인 풍요 역시 특별히 해준 게 없네요.


공부하란 잔소리를 일절 안하는 게 유일한 순기능일뿐, 사실상 방임에 가까운방목. 아비로서는 참으로 무능하고 무심하기까지 합니다. 가끔은요. 자식이란 존재가 제게는 건빵 주머니 속의 안전핀 빠진 수류탄처럼 느껴집니다. 늘 조마조마해요. 미안한 건 당연하고요. 


여기 저만큼이나 무능하고 대책 없는 아빠가 한 명 또 있습니다. 평생을 한량처럼 산 걸로도 모자라 딸의 결혼식이 있는 날 술집에서 골든벨이나 울리는 한심한 남자. 그러다 아흔 살이 되어서야 겨우 철이 들기 시작하는 남자, 얼 스톤입니다. 대배우와 명감독을 오가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출과 주연을 맡은 <라스트 미션>(2008>의 주인공이죠.

영화 <라스트 미션> 스크린샷

이 영화는 1980년대 최고령 마약 운반책이었던 레오 샤프의 실화를 모태로 하고 있는데요. 마약 단속반에게 적발됐을 당시 그의 나이는 88세였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클린트 이스트우드 역시 88세의 나이로 얼 스톤을 연기했다는 거죠. 대단한 노익장입니다.


혹자들은 이 영화 자체가 그의 ‘라스트 미션’이 될 것이란 우울한 전망을 내놓기도 했죠. 아닌 게 아니라 백발이 성성하고 얼굴엔 고랑 같은 주름이 깊게 파인 그를 보고 있으면 세월이 참 야속하게만 느껴집니다. 극중 얼 스톤의 대사처럼, 다른 건 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어도 시간만은 그럴 수없음을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입니다.

안녕이라고 말하지 마

영화는 아름다운 꽃밭에서 출발합니다. 얼 스톤에게 꽃은 인생의 전부입니다. 백합의 왕. 모두가 우러러 보는 그의 별명이었죠. 하지만 그는 가족들로부터 결코 ‘용서받지 못한 자’였습니다. 일을 핑계로 미국 전역을 떠돌며 꽃밭을 누비는 동안 그의 가족들은 가장의 부재가 주는 고통을 수십 년간 견뎌야 했으니까요. 심지어 딸의 결혼식마저 나 몰라라하고 꽃 박람회로 내빼버리는 아빠라니. 가족 모두가 그를 증오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렇게 허송세월한 것에 대한 벌이라도 받듯이 그는 쫄딱 망하고 빈털터리가 됐습니다. 유일하게 얼의 편이 되어주는 손녀딸의 약혼식에 쭈뼛쭈뼛 얼굴을 들이밀어보지만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괜히 잔칫날 가족들의 기분만 상하게 할 따름입니다.

영화 <라스트 미션> 스크린샷

바로 그때 의기소침 해 있는 그에게 한 남자가 다가와 기묘한 제안을 하죠. 단지 운전만 하면 큰 돈을 벌 수 있다고 말입니다. 처음엔 얼도 몰랐습니다. 세 번째 배달을 나갔을 때 비로소 자신이 마약 운반책이 됐음을 알게 되죠. 뒤늦게 알았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습니다. 이대로 늙고 굶주려 죽으나 경찰에게 잡혀 교도소에서 생을 마치나 매한가지. 그럴 바에야 차라리 돈이라도 실컷 벌어 가족과 화해의 돌파구를 마련하는 게 나으니까요. 때로 늙는다는 것은 모든 것으로부터 초연해지는 마법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마약운반의 대가로 큰 돈을 만지게 되면서 얼의 씀씀이는 점점 커져갑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평생 강퍅한 성미에 지독한 외골수였던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한결 너그러워졌죠. 흑인을 ‘니그로’라 부르고 동성애자를 향해 노골적인 혐오의 시선을 던지던 그가 이제는 ‘다 옛날 일’이라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밉니다. 이 넘치는 삶의 생동감. 그는 마치 시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꽃봉오리를 한껏 벌리는 백합 같았죠.

영화 <라스트 미션> 스크린 샷

한편 ‘할배’라 불리는 전대미문의 마약운반책을 체포하기 위해 마약 단속반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는데요. 하지만 베테랑 요원 콜린은 정작 코앞에서 얼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왜 아니겠어요? 손 대면 툭 하고 쓰러져 자연사할 것 같은 노인네가 트럭에 마약을 싣고 다닐 거라곤 상상도 못했을 테니까요. 어느새 열두 번째 배달에 임하는 얼. 그사이 많은 것들이 변했습니다. 가족들과 따뜻한 유대를 조금씩 회복해갔고, 자신을 아껴주던 마약 카르텔 보스가 죽고 새로운 보스가 왔으며, 사랑하는 아내 마리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먼 길을 에둘러 아내의 임종을 지키며 그는 과거의 죄를 완전히 씻어내죠.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잔인한 죽음뿐. 하지만 절체절명의 순간 콜린이 이끄는 마약단속반이 얼을 체포하면서 도리어 다시 살아갈 길이 열리게 되죠.


영화는 다시 꽃밭으로 카메라를 돌립니다. 충분히 풀려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얼은 담담히 자신의 유죄를 인정함으로써 수감생활을 선택했고, 핏줄이 드러난 깡마른 손으로 얼이 백합을 가꾸고 있습니다. 가족들은 그의 죄를 사하여 주었고 세상과도 애면글면 화해했지만 그의 참회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고단한 속죄의 삶이야말로 그의 ‘라스트 미션’일 겁니다.

영화 <라스트 미션> 스크린샷

라스트 미션 The Mule, 2018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 클린트 이스트우드, 브래들리 쿠퍼


| 씨네쿠리 영화, 음악, 자전거 그리고 고양이를 좋아하는 잡식남. 물적 가난과 심적 풍요 사이에서 아빠 카드 긁듯 별 고민 없이 문장과 기억들을 소비 중이다. 


에디터 성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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