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이해하기 위하여 - 영화 리뷰 '타인의 삶'

조회수 2018. 12. 7. 10:5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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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헤어전문잡지 그라피

타인의 삶

Das Leben Der Anderen, 2006

감독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주연 울리히 뮤흐, 마르티나 게덱, 세바스티안 코치

타인, 세상을 여는 문

우리는 알게 모르게 타인의 말과 생각과 인생을 훔치며 살아갑니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는 것 역시 누군가의 생각을, 그 안에 담긴 타인의 삶을 훔쳐보는 행위라고 할 수 있죠. 


사실 책이나 영화가 아니라도 타인의 삶과 생각을 엿보는 건 너무나 쉽습니다. 이른바 SNS라는 강력한 수단이 있으니까요. 나의 식성과 취미, 생활 패턴, 대인관계, 심지어 잠버릇과 성적 취향까지 SNS는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달리 보면 이건 관음이 아니라 노출에 가깝죠. 어쨌든 이런 류의 훔쳐보기는 기본적으로 상대에 대한 호기심 또는 애정에서 시작합니다. 


때로 뒤틀린 욕망으로 발전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와 더 친근해지는 출발점이 되죠. 사실 기분 좋은 일이잖아요? 누군가 내게 관심을 갖는다는 건 말이에요. 이 살가운 호기심이 타인이란 거대한 세상, 그리고 참된 사랑으로 이어질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문제겠고요. 

하지만 모두가 이런 호기심을 달가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에게 타인은 세상을 여는 문이거나 사랑의 시작이 아니라, 그저 고통일 뿐일 수도 있죠. 나의 불행을 지켜보는 걱정을 가장한 호기심의 눈초리, 관계가 깊어질수록 점점 늘어나는 요구와 기대, 그런 과정에서 켜켜이 쌓여가는 상처들. 그래서 사람은 모두의 희망인 동시에 누군가의 지옥입니다. 이렇듯 선한 의도와 악한 결과가 공존하는 타인을 다룬 영화 중에선 <타인의 삶>을 첫손에 꼽을 수 있습니다.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감독의 2006년 작품인데요.


1984년 냉전시대 동독을 배경으로 자유와 예술을 끝없이 찬미하는 예술가 부부와 그를 감시하는 비밀경찰의 이야기를 담고 있죠. 이 시기의 동독은 나라 전체가 감시와 사찰의 암막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밀고자가 되는 일이 허다했죠. 비공식적으로 10만 명의 비밀경찰과 20만 명의 스파이가 활동했다고 하니까요. 


동지가 아니면 적, 단 두 종류의 인간만 존재하는 불신의 시대. 동독 최고의 극작가 드라이만과 그의 연인 크리스타, 그리고 이 두 사람의 삶을 집요하게 감시하는 정보국 요원 비즐러가 이야기를 이끌어갑니다. 국가라는 이름의 거대한 폭력을 등에 업고 타인의 삶을 지켜보던 이가 결국엔 타인의 삶을 지켜내는 이로 변모하게 되죠. 이 냉철한 감시자를 바꿔놓은 건 예술가 커플이 그의 마음에 끊임없이 타전한 사랑의 주파수였습니다.

너에게서 나에게로

동독 최고의 비밀 공작원 비즐러. 그는 타인의 삶을 훔치는 게 곧 자신의 삶이 되어버린 남자였습니다. 자신이 믿는 체제와 국가를 위해 기계처럼 헌신했죠.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은 새로운 임무가 하달되기 전까진 말입니다. 지금부터 그가 감시해야 할 대상인 드라이만은 동독 최고의 극작가였습니다. 아름다운 연인이자 배우인 크리스타와 함께 모두가 선망하는 대상이었죠. 


비즐러는 그들의 삶으로 깊게 침투해 들어갑니다. 그들의 속삭임, 은밀한 대화, 사랑할 때 나누는 뜨거운 숨결까지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죠. 드라이만과 크리스타가 동지인지, 적인지 알기 위해 필요한 거라면 뭐든지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그들의 삶을 훔치면 훔칠수록, 감시하면 감시할수록 자꾸 그들의 삶에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처음엔 동정이나 연민 같은 건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드라이만에게 크리스타의 불륜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들의 관계를 파탄에 빠뜨리면 이 하찮은 감상 따윈 금방 사라질 거라고 믿으면서 말이죠.  


하지만 위기를 겪을수록 더욱 견고해지는 드라이만의 사랑을 지켜보며 그는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세상엔 동지와 적이 존재하기 이전에 인간이 먼저라는 걸.

어느덧 5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비즐러는 냉혹한 감시자에서 주의 깊은 관찰자로 바뀌었고요. 감시를 빙자한 그의 보호 아래 드라이만과 크리스타도 꿋꿋이 예술과 사랑을 지켜낼 수 있었죠. 물론 두 사람은 자신들의 삶을 비즐러가 지켜주고 있다는 걸 여전히 모르고 있습니다.


반면 비즐러는 드라이만으로부터 소중한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지금껏 비즐러는 타인을 감시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았습니다. 타인을 사랑하고 타인에게 사랑받으며 살아 있음을 느끼는 삶. 그건 비즐러가 까맣게 잊고 있던 진짜 인간다운 삶이었죠. 동시에 불량품을 솎아내듯 동지와 적을 구분해내던 그가 마침내 사랑과 자유를 이해하게 됐음을 의미합니다. 


세월이 흘러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영원할 것만 같던 감시와 억압의 시대도 막을 내렸습니다. 그사이 드라이만은 모든 혐의에서 벗어났지만, 사랑하는 크리스타를 영원히 떠나보내야 했죠. 그건 절대자처럼 모든 걸 관장하던 비즐러조차 예상 못한 비극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영화는 마지막 감동의 순간으로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오랜 침묵을 깨고 출간한 드라이만의 새로운 책을 펼쳐보는 비즐러. ‘감사한 마음을 담아 HGW XX/7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라고 써진 문구를 읽는 순간, 그의 가슴이 뜨겁게 요동칩니다. HGW XX/7. 그건 비밀정보원 시절 자신의 암호명이었습니다. 결국 드라이만이 비즐러의 존재와 그의 행적을 알게 됐음을 의미하죠.


미처 말하지 못한 해묵은 감정이 씻은 듯 사라집니다. 평생 타인의 감옥에 갇혀 있던 그의 삶을 되찾아준 사람, 그건 바로 드라이만이라는 이름의 타인이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외롭지 않습니다. 더 이상 감출 비밀도 없습니다.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습니다. 남은 인생이 한 뼘 더 행복해질 것 같습니다. 그가 사랑했던, 그리고 앞으로 사랑하게 될 타인의 삶이 그를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 씨네쿠리

영화, 음악, 자전거 그리고 고양이를 좋아하는 잡식남. 물적 가난과 심적 풍요 사이에서 아빠 카드 긁듯 별 고민 없이 문장과 기억들을 소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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