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눈뜰 때 - 영화 리뷰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조회수 2020. 7. 7. 11:56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BY.헤어전문매거진 그라피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Call Me by Your Name 포스터

세상은 가파른 속도로 변해가고 있지만 성소수자를 바라보는 시각은 예나 지금이나 큰 변화를 체감하기 어렵습니다. 오랜 세월 종교와 율법에 길든 우리로선 당연한 일이기도 하고요. 남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내 가족에게만큼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딱히 표리부동한 것도 아니죠.

아무리 쿨하고 열린 생각의 부모라도 자식의 커밍아웃을 두 팔 벌려 환영하진 않을 테니까요. 그래서 더욱 쉬쉬할 수밖에 없는 게 성소수자들의 불가피한 현실일 겁니다.


얼마전 코로나19 집단 확산의 도화선이 된 탓에 그들의 입지가 더욱 좁아졌죠. 이번 사태를 계기로 성소수자를 향한 오해와 혐오만 증폭시키고 있을 뿐인 우리도 성숙한 대처라고 보긴 힘듭니다. 이런 와중에 굳이 동성애를 다룬 ‘퀴어 영화’를 소개하려 들다니! 너무 티 나게 묻어가려는 수작으로 보이면 어쩌나 걱정스럽지만, 사실 영화 자체는 굉장히 우아하고 아름답거든요.


누구나 아련하게 떠오르는 첫사랑의 후일담입니다. 첫사랑. 가만히 되뇌어보는 것만으로도 그리움이 몽글몽글 피어나는 마법의 단어. 그래요, 인생에 있어 단 한 번 찾아오는 사랑이잖아요. 하지만 헤어질 당시에 흘렸던 눈물과 납덩이처럼 굳어버린 슬픔을 떠올려보면 달콤했다는 것도 기억의 왜곡은 아닐까 싶어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은 17세 소년과 24세 청년이 조심스럽게 나눈 6주간의 사랑을 다루고 있습니다. ‘너의 이름으로 나를 불러줘’란 뜻의 제목은 타인을 나의 이름으로 부름으로써 나와 타인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서로를 더 깊이 사랑하게 된다는 걸 의미하죠.


나의 이름으로 타인을 부르는 행위가 가진 효력은 매우 놀랍습니다.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만큼 진실한 감정은 없으니까요. 영화는 오롯이 감독에게 영광이 돌아가는 예술이지만 이 작품은 각본을 맡은 제임스 아이보리에게 더 주목하게 됩니다.


그는 <전망 좋은 방>(1986), <남아있는 나날>(1993) 등으로 잘 알려진 영국의 거장이죠. 이미 오래전 커밍아웃한 동성애자이기도 하고요. 퀴어 영화의 클래식이라 평가받는 <모리스>(1987) 역시 그의 작품입니다. 제임스 아이보리는 ‘동성애든 아니든 첫사랑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법’이란 관점에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각본을 완성했고 아카데미 각색상 수상의 영광까지 안았습니다.

사랑이란 이름의 성장통

1983년 여름. 엘리오는 방학을 맞아 가족과 함께 별장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한창 혈기왕성한 열일곱 소년에겐 따분한 나날이었죠. 그런데 고고학자 아버지를 도와줄 보조 연구원으로 미국인 올리버가 찾아옵니다. 젊고 자신감 넘치는 스물넷 이방인 청년에게 엘리오는 야릇한 끌림을 느끼죠.


그리고 올리버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면서 엘리오는 이 모호한 감정의 정체를 깨닫게 됩니다. 그건 사랑이었습니다. 자신을 부정해보려고 여자친구 마르치아와 풋사랑에 빠져봤지만 그럴수록 올리버를 향한 마음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죠.


올리버 역시 순수하고 여린 엘리오에게 진작부터 호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고 자연스럽게 하나가 된 두 사람. 그들은 서로를 자신의 이름으로 바꿔 부르며 각별한 교감을 나눕니다. 엘리오가 올리버가 되고 올리버가 엘리오가 되는 그 순간, 세상은 둘만의 낙원이 됩니다.


이 과정까지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이탈리아의 소박하고 정감 있는 풍경을 위시해 두 사람이 지금 얼마나 아름다운 곳에서 사랑을 시작했는지 탁월한 영상미로 대변해줍니다. 누구라도 이런 환경에선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각별한 공을 들였죠. 덕분에 두 남자의 사랑을 지켜보는 동안 낯설거나 거부감이 느껴질 요소가 거의 없습니다.


첫사랑이 으레 그렇듯 엘리오와 올리버의 짧은 사랑은 결국 이별을 맞게 됩니다. 태어나 가장 뜨거웠던 여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엘리오를 아버지는 담담하게 위로하죠. 자식이 동성을 사랑한다는 사실 앞에서 이토록 침착한 부모란 어쩐지 비현실적입니다. 세상 모든 부모가 이들과 같다면 동성애가 음지로 숨을 일도, 오해와 편견을 부추길 일도 없을 텐데. 어쩌면 영화를 통해서라도 이루고 싶은 판타지 혹은 희망이겠죠.


시간이 흘러 겨울이 되고 떠나간 올리버로부터 전화가 걸려옵니다. 그때 엘리오가 수화기에 대고 탄식하듯 “엘리오”라고 나의 이름으로 그를 부를 때, 기흉처럼 불시에 찾아온 따끔한 통증. 사랑은 끝났고 소년은 화롯가에서 지난 여름을 눈물에 흘려보냅니다.


엘리오가 영원히 올리버만 기억하며 살아가진 않겠죠. 오늘의 슬픔이 내일의 기쁨을 꽃피워낼 테니까요. 언젠가 다시 내 이름으로 너를 부를 때, 엘리오는 또 한 번 뜨겁게 사랑할 겁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Call Me by Your Name, 2017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
주연 티모시 샬라메, 아미 해머

글 씨네쿠리
영화, 음악, 자전거 그리고 고양이를 좋아하는 잡식남. 물적 가난과 심적 풍요 사이에서 아빠 카드 긁듯 별 고민 없이 문장과 기억들을 소비 중이다.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