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나 지금이나 쿨한 배우 윤여정 '12년 전' 인터뷰

조회수 2021. 4. 28. 13:5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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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수상소감은 하루아침에 나온 것이 아니었다

배우 윤여정(74)이 4월 26일 열린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습니다. 한국 배우가 아카데미에서 연기상을 받은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재치 있는 수상소감도 화제가 됐죠. 


그의 쿨한 마인드와 인생에 대한 통찰은 2009년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 종영 직후 여성동아와 만난 인터뷰 자리에서도 느껴집니다. 지금과 같은 '결'이 느껴지는 2009년 윤여정 인터뷰를 다시 한 번 볼까요?

<<< 2009년의 윤여정을 만나다

‘그들이 사는 세상’을 집필한 노희경 작가는 최근 펴낸 수필집에서 “막말조차도 윤여정의 입을 통해 뱉어지면 아픈 위안이 되거나 쓸쓸한 인생에 대한 정의가 된다”고 했다. 윤여정의 삶 속으로 들어가보고 싶었다.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 이후로 윤여정씨에 대해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실제로도 드라마에서 오민숙처럼 까칠한지.


“내가 이상한 역할을 해서 그러나본데… 난 그런 사람 아닙니다(웃음). 내가 노희경 때문에 아주 미치겠어. 사람을 그냥….”


‘오민숙의 까칠한 면이 실제 윤여정씨의 모습과 비슷하다. 대본 외울 필요 있나, 평소 하던 대로 하면 되지 않나’라는 반응도 있었어요.


“내가 그런 면이 있긴 있어요. 사람이 딱 이런 면만 있진 않잖아요. 그런데 까칠하다는 게 뭐죠?”


편하지 않다, 따뜻하지 않다, 그런 뜻 아닐까요.


“그래요. 편하지는 않을 거예요. 제가 사람 사귀는 데 오래 걸려서 그럴 거예요. 처음 만나는 사람하고는 많이 힘든데 내가 힘들면 상대도 힘들겠죠. 싫은 건 싫다고 말하니까 더 그런가봐요. (드라마에서 오민숙은 자신을 번번이 ‘오민숙씨’라고 부르는 조연출에게 손짓으로 문밖으로 나가라는 신호를 한다) 


실제로 ‘윤여정씨, 윤여정씨’ 하던 조연출이 있었어요. 그래서 ‘윤여정씨라고 말하는 게 법에 저촉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학교에서 안 가르치는 거라 내가 얘기할게요. 예를 들어 ‘엄마 친구더러 윤여정씨 그러는 건 좀 그렇죠?’ 그랬더니 자기는 선생님이라 그러는 게 익숙지 않아서 그랬대요. 그 다음엔 같이 드라마도 하고 낄낄거리며 웃고 그랬죠. 


노희경씨가 그 사건을 그렇게 부풀려서 쓴 거예요. 실제로는 그렇게 못해요. 조연출을 내쫓아봐요. 내가 방송국에서 밥 벌어먹고 살겠어요.”

탐욕스러운 재벌가 안주인 금옥으로 출연한 영화 ‘돈의 맛’(2012). [동아DB]

마음을 열면 따뜻한 면도 있죠.


“그렇겠죠. 젊은 사람들은 답답한 게 사람을 흑백으로 나누는 거 같은데 흑백으로 나뉘는 사람은 없어요. 사람이 이런가 하면 저렇고, 저런가 하면 또 이렇고…. 내가 뭐 아무 때나 까칠하겠어요.”


인터뷰 안 하고, 오락 프로그램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드라마를 제외하고는 대중과 거의 접촉면이 없어요. 혹시 신비주의인가요.


“개뿔 신비주의는. 그 말 어디서 나온 거예요?(웃음) 나는 실용주의예요. 드라마는 내 일이잖아요. 그거는 합니다. 드라마 이외의 일은 귀찮고 몸도 힘들고…. 자꾸 내 얘기해서 뭐하겠어요. 사람들도 별로 남의 일에 관심 없어요. 나도 남의 일에 관심 없거든. 이 쪼그만 나라에서 신비주의는 무슨(웃음)….”

환희, 상처 모두 가슴에 묻고 조용히 내 길을 간다

이화여고를 졸업한 그는 한양대 국문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소위 일류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게 자존심이 상했다. 집에 등록금 달라고 하기도 민망해 아르바이트를 할 요량으로 탤런트가 됐다. 


데뷔 초 그는 드라마 ‘장희빈’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고 영화 데뷔작인 김기영 감독의 ‘화녀’로 시체스 국제영화제에서 수상을 했다. 그리고 그해 파격적으로 청룡영화제 신인상을 건너뛰고 주연상을 받았다. 이 당시 그의 사진을 보면 볼이 통통한 앳된 소녀 같다. 


하지만 이 시절에도 성격은 범상치 않았던 것 같다. 무명시절 방송국에서 신인 10명을 뽑아 석 달 동안 연습을 시킨 뒤 최종 3명을 합격시켰는데 그는 최종에서 떨어졌다. 그 이유가 재미있다.

윤여정이 영화 ‘화녀’(1971)에서 쥐꼬리를 잡고 흔들고 있다. [동아DB]

한 방송국 탤런트 최종 시험에 불합격한 이유가 ‘인사를 잘 안 한다’였다고요.


“예. 그때는 내가 눈이 나쁜데 안경 쓰는 게 싫었어요. 눈이 더 커 보이고 싶고 예뻐 보이고 싶잖아요. 그래서 안경을 안 쓰고 다녔거든요. 사람이 잘 안 보이니까 인사를 안 했나봐요. 심사위원이 ‘너는 먼저 사람이 돼서 와라’ 대놓고 그러더라고요. 우린 그렇게 살벌한 시대에 살았다우(웃음).”


영화 데뷔작으로 주연상까지 받았어요. 당시로선 무척 파격이었죠.


“김기영 감독님 덕분이었겠죠. 지금 생각해보면. 어렸을 땐 잘 몰라요. 상을 받으면 내가 잘해서 받나 보다 하는데 상은 정말 운이에요. 물론 어떨 땐 정말 잘해서 받을 수도 있지만 90%가 운이에요. 여우주연상을 받았을 때도 나중에 그 내막을 알았는데 따로 내정자가 있었지만 그해에는 특별히 ‘요번에는 정말 심사대로 해라’라는 지시가 있었답니다. 그런 게 운이잖아요.”


톱스타로 계속 그 길을 밟았더라면 어땠을까요.


“글쎄, 어땠을까. 지금쯤 와서는 같았겠지만, 인생이라는 게 그렇더라고요. 꼭 과정을 거쳐야 여기로 오게 되더라고요. 우리 다 아는 건데 어떨 땐 좀 (위기를) 건너뛰기도 하고 그러면 얼마나 좋겠수. ‘쟤는 머리도 좋은데 왜 저러고 살까’ 그러는데 인생은 그렇지 않더라고요. 그러니까 여기 이렇게 와 있겠죠. 


내가 남한테는 시건방지고 까칠해 보이지만 지금 나는 일을 열심히 하고 아끼거든요. 그때 배우를 쭉 했더라면 아마 안 그랬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나는 이런 거 참 싫어. 우리가 그때 안 그랬더라면, 그건 뭐 하나마나 한 이야기죠.”

지금 위기를 겪고 있는 사람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좋은 위로의 말들이 많죠. 성경에서 유행가까지. 그런데 내가 위기를 겪으면서 느낀 건 아무 말도 위로가 안됐다는 거. 그래서 내가 누구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견디세요. 견디면 시간이 가더라고요. 그 시간이 약이더라고요.”


그건 진짜 맞는 말이던가요.


“그거는 정말 그렇습디다. 세월이 어떻게 약이 되냐면 사람이 무뎌져요. 그 문제에 대해서. 그게 약인 거 같아. 신이 우리에게 망각이라는 좋은 약을 주셨어요.”


그렇게 한 번씩 어려움을 겪고 나면 그 다음엔 사는 게 좀 편해질까요.


“어떤 사람은 그 어려움이 또 오고 또 오고 그러잖아요. 그게 팔자인가, 성향인가. 나는 같은 실수는 안 하려고 애쓴 거 같아. 나는 ‘나하고 다른 사람에게 끌리는구나’라는 걸 알았어요. 내 안목을 깨닫고 의지로 같은 짓을 안 하려고 노력했어요.”


인생이 순탄하기만 한 사람도 있더라고요.


“있어요. 있더라고. 운 좋아서 그런 사람 많죠. 그렇지만 나는 내가 스스로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그런지 그런 사람 보면 약올라서 나 혼자 위로해요. ‘철도 참 없다. 나이가 60인데 저렇게 남편하고 아이밖에 모를까’ 하고. 그 사람들 우주는 남편하고 아이야. 내가 그 사람들 보고 그러는 건 억하심정이지. 솔직히 부럽죠. 부러워도 아무 소용없으니까 그러면서 스스로 위로를 하는 거죠(웃음).”

“고현정이 줄 잘못 섰다고 투덜거려”

윤여정은 기사가 자신의 말과 다르게 나가는 것, 예를 들어 ‘감성’이라고 말했는데 ‘감정’이란 단어로 기사화되는 것은 견딜 수 없다고 했다. 자신을 일부러 좋은 사람으로 포장하지는 말아달라고 했다. 본 대로 느낀 대로 쓰라는 것이다. 비판받을 각오가 돼 있을 때 인터뷰 자리에 나온다고 했다.


윤여정은 끊임없이 자신을 객관화한다. 여배우들이 흔히 빠지는 ‘자뻑’이란 것도 없다. 잘나가던 젊은 시절 이야기도 남 말하듯 덤덤하게 한다. 객관화는 자신의 말마따나 예쁘지도 않고, 목소리도 비호감인 그가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은 비결이다. 


자신에게 엄격한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도 날카롭다. 까칠하다, 무섭다는 이미지는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도 항상 그의 주변엔 사람이 많다. 최화정 배종옥 고현정 등 여배우들이 특히 그를 따른다.

배우 윤여정. [사진 제공 · 후크엔터테인먼트]

1년에 한 작품 정도 출연하는데, 작품 선택 기준이 있다면.


“내가 낯가림을 하기 때문에 일했던 감독이나 작가가 우선이죠. 조금 손해 난다 해도 사람따라 가요. 그런데 결과는, 이렇게 오래 일했는데 내가 아는 PD는 KBS에서 두 명, MBC에서 한 명, 그나마 MBC에서 절친했던 PD는 프리가 된 걸 한참 후에 알았어요. 


이런 나의 인맥을 보고 고현정이 만날 ‘줄 잘못 섰다’ 그러죠. 사람이 먼저 안 오면 내가 안 했던 역할을 택하려 애쓰고요. 만날 똑 같은 엄마를 하면 보는 사람한테도 미안하더라고요. 똑같은 얼굴에, 똑같은 목소리. 그래서 내 깐에는 다르게 해보려고 애쓰죠.”


노력을 많이 하는 편이죠.


“재주는 젊었을 때 잠깐 눈에 띄는 거 같아요. 정말 나를 유지해주는 건 노력일 거예요. 하물며 베토벤도 미완성본을 보면 형편없대요. 물론 그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모차르트는 하늘이 준 사람이래요. 그런데 나는 내 재능이 하늘이 준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노력해야죠. 더군다나 늙어서 감은 떨어지고….”

박카스 할머니 역으로 화제를 모은 영화 ‘죽여주는 여자’(2016). [사진 제공 · 카파플러스]

늙었다는 생각은 별로 안 들어요.


“나는 알겠어요. 지난번 김자옥하고 김기영 감독 회고전에 갔다가 우리가 깔깔거리고 웃었어요. 지금은 눈이 찌부러졌는데 그때는 지금 두 배만 하더라고요. 얼굴도 동그랗고 통통해서(웃음). 요즘 턱 깎는 아이들 보면 쟤네들 나이 들어서 어떡할라나 싶지. 제일 속상할 때가 ‘이 정도 분량이면 몇 시간이면 마스터가 된다’ 그런 게 있는데 대본을 덮어도 개운치 않을 때 나이가 들었구나 싶어요. 밤샘 촬영할 때 발음이 잘 안되고 눈이 빨개지고 얼굴이 늘어지고 그럴 때 참, 그렇죠.”


전에는 유호정씨나 고현정씨 등 후배들에게 연기에 관한 충고도 많이 했다면서요.


“그것도 이젠 안 하려고요. 사람들은 ‘충고를 좀 부드럽게 하지 그래요’ 그러는데, 부드럽게 하면 잘 못 알아들어요. ‘얘, 거기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 어떻게 잘해볼 수 없을까’ 그러면 잘 못 알아들어요, 독하게 말하면 그제야 ‘좀 이상한가’ 생각하는 정도더라고요. 


부모가 싫은 소리 해도 못 견디는데 남이 그렇게 말하면 뭐가 좋겠어요. 그리고 내 태생이 돌려 말할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고 태생을 바꿀 수도 없고… 그러니까 충고하면 항상 후회해. 앞으론 가슴 아픈 충고는 안 하려고요.”


고현정씨나 배종옥씨 등 후배 연기자들이 많이 의지하는 거 같아요.


“글쎄, 의지까지는 모르겠고요, 내가 ‘너희들은 내가 왜 좋아’ 했더니 고현정 왈 ‘밥을 잘 사줘서요’였어요. 쉬지도 않고 대답하더라고요.”

“인생은 이거다 저거다 정확히 나눠지는 게 아니더라고요”

윤여정은 수십 년째 담배를 못 끊고 있다. 주변에서 끊으라고 성화지만 “그걸 끊으면 사는 낙이 없을 것 같다”고 했다. 건강에 해로운 담배를 계속 피우는 걸 보면 진정한 실용주의는 아닌 것 같다고 했더니 “사람이 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거지”라면서 웃었다. 그 모습이 고집 센 노인네 같기도 하고, 귀여운 소녀 같기도 하다.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나요.


“몸을 아끼는 게 건강관리예요. 무리 안 하고 안 움직이는 거. 타고나길 힘이 세지도 않고 오래 버티지도 못해요. 그러니까 내 몸을 사리느라고 일을 많이 안 해요.”


나이가 들면서 부드러워지는 쪽인가요? 아니면 본인 생각이 더 확고해지는 편인가요.


“이렇게 인터뷰에 나온 게 부드러워진 거예요. 나이가 들면 그런 면이 생겨요. 그런데 또 ‘저 사람 아니다’ 싶으면 아집이 딱 생겨요. 잘 모르겠어요. 나만 그런 건지, 미안해요. 확답을 못 줘서. 


그런데 이거다 저거다 정확하게 나눠지는 거면 왜 싸움을 하고, 전쟁을 하겠습니까. 나는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다른 사람 얘기를 들어보면 또 다르고…. 인생이란 게 다 상대적인 거더라고요.”


글 김명희 기자 | 사진 조영철 기자

여성동아 542호(2009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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