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부터 백수가 된 40대 중반 싱글녀입니다"

조회수 2021. 4. 12. 09:3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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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일기]<1>20년차 직장인의 '마음가는대로' 백수생활

《'직장인은 항상 사직서를 품고 산다'는 말을 실천한 우리 주변 평범한 퇴사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가슴 속 사직서를 던지기 전 엿보고 싶은 남들의 '퇴사 일기'.》

3월 어느 금요일 오후 1시쯤 서대문구 회사 밀집 지역에 위치한 한 카페. 대부분 회사의 점심이 끝나갈 시간, 바쁘게 움직이는 직장인들 사이에서 홀로 여유롭게 모바일 게임을 즐기는 사람을 발견했다. 한 달여 전 백수가 된 송화 씨(가명)다. (송화 씨는 개인적인 이유로 익명 인터뷰를 요청했다. 가명인 ‘송화’는 그가 힘들었던 시기 위로 받았던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캐릭터 이름.)

“3월부터 백수가 된 40대 중반 싱글녀입니다.”

출처: ⓒ잡화점, GettyImagesBank
카페에서 만난 송화 씨는 “회사 다닐 때 못 했던 평일 낮 나들이를 하는 중”이라며 웃었다.

- 안녕하세요.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회사를 다니는 중이었다면 ‘△△회사를 다니는’ 혹은 ‘○○일을 하고 있는’이라고 했을 텐데 백수가 되고 나니 저 자신을 소개하기가 어렵네요. 3월부터 백수가 된 40대 중반 싱글녀입니다. ”


- 직장생활은 얼마나 하셨나요?


“햇수로는 20년, 만으로는 19년 좀 넘게 다녔네요. 첫 직장을 6년 넘게 다녔고, 최근 퇴사한 직장을 13년 넘게 다녔습니다. (최근 직장에서는) 마케팅과 사업 기획 업무를 주로 했어요.”


- 퇴사 한 달, 요즘엔 주로 뭘 하세요?


“놀고 있어요. 사실 최근에 아는 분이 사업 기획 업무를 좀 도와달라고 했는데, 도저히 못하겠다고 거절했어요. 업무로는 인터넷 검색조차 하기 싫더라고요. 공부도 일도 아직은 준비가 안된 것 같아요.”

“사직서 내고 솔직히 행복했어요.”

- 왜 퇴사를 결심하셨나요?


“회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이상) 없다고 판단했어요. 최근 3년정도는 신사업 관련 업무를 했는데 계속 실패했죠. 내 능력 부족이 원인의 100%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하지만 업무에 대한 자신감, 열정이 없어졌고 그런 상황에서 뭔가 주체적으로 일을 찾아서 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어요. ‘회사와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구나’라는 느낌이 들었죠.


-'자유인'이 된 후 첫 날, 무엇을 하셨나요?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그냥 집에서 푹 쉬었을 거에요. 넷플릭스 보면서요.”


-회사를 떠났다는 걸 실감했던 건 언제인가요.


“초반 2주정도는 그냥 좀 긴 휴가 같았어요. 더 지나니 요일에 무감각해지더라구요. 더이상 금요일이 특별하지 않고, 일요일 오후에 우울하지도 않고. 그래서 ‘아.. 진짜 백수가 됐네.’하고 생각했죠.(웃음)”

- 개인적인 궁금증인데, 퇴사하면 정말 건강이 좋아지나요?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퇴사를 실감할 즈음부터 한 열흘간 이유없이 아팠어요. 체한 줄 알았는데 열이 올라서 병원에 가 코로나19 검사까지 했지만 코로나19도 아니었고 다른 원인도 딱히 찾지 못했어요. 그래서 그냥 긴장이 풀렸구나 싶었죠. 지금은 괜찮아졌고요.”


이유를 알 수 없던 열병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송화 씨는 “지겨울 정도로 쉬라는 하늘의 뜻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몸이 아팠던 덕에 더욱 더 일과 관련된 어떤 것도 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


“백수지만 규칙적인 생활을 하려고 노력 중이에요.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자고, 회사 다닐 때만큼 움직이고. 안 그러면 오히려 건강이 안 좋아질 거 같아서요.”


송화 씨는 백수가 된 요즘도 매일 새벽 5시30분에 일어나고 저녁 10시30분이면 잠드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퇴사 전부터 해오던 ‘미라클 모닝’(매일 이른 아침에 일어나 루틴하게 자기계발 활동을 하는 것)을 여전히 실천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미라클 모닝을 통해 새벽 시간에 생각을 정리하면서 “회사를 그만둘 용기를 얻었다”고 했다.


“매일 새벽 일어나 유산소운동과 명상을 하고, 떠오르는 생각들을 아침 일기로 썼죠. 그리고 ‘내가 올해 꼭 해야할 일’에 대한 확언(確言)을 적었는데요. 제가 적어오던 확언이 ‘난 2021년에 퇴사를 하겠다’였어요.”

”20대때부터 45세에는 퇴사하겠다고 생각했어요.”

- 1년차, 10년차, 20년차의 송화 씨는 어떤 직장인이었나요?


“처음 들어갔던 회사는 막 시작하는 작은 회사여서 일당백으로 일해야 했어요. 일을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이 그냥 닥치는 대로 몸으로 익히는 방법밖에 없었죠. 그래서 1년차에는 야근을 밥먹듯 하며 올인했던 것 같아요.


7년차에 회사를 옮겨서 그랬는지, 10년차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딱히 ‘직장생활한지 10년 됐네’ 같은 생각도 들지 않았고요. 근데 한 직장을 10년 넘게 다니면서는 퇴사 시기에 대한 고민이 많아졌어요. 이직 가능한 나이를 넘기면서는 퇴사=은퇴가 되겠다고 생각했으니까요. 40대 중반에는 퇴사를 하고 제2의 인생을 설계해야겠다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우연히도 시기가 맞아떨어져서 퇴사도 감행하게 됐죠.”


- 직장인은 항상 가슴에 사직서를 품고 산다고 하는데요. 1년, 10년, 20년의 직장생활 중 지나고 나니 별 것 아니었던 ‘퇴사 위기’도 있었을까요?


“모든 일이 지나고 나면 별 거 아니었어요.(웃음) 당시는 정말 죽을 거 같았는데도 말이죠. 더구나 홧김에, 순간의 감정때문에 퇴사하는 건 제 성향상 불가능한 일이어서 실제로 퇴사 위기가 많진 않았어요.”


- 퇴사를 망설이던 시간 동안 가장 마음에 걸렸던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안정성이 없어진다는 거죠. 직접적으로 말해 월급과 명함으로 대변되는 사회적 지위같은 것들. 이직이 아닌 단순 퇴사였기 때문에 더 불안한 부분이 있었어요. 파이어족으로 은퇴하는 것도 아니고, 나이가 있다 보니 이만큼 안정적인 직장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에 대한 각오도 해야 했죠.”


- 솔직히, 후회가 드는 순간도 있으신가요.


“그래도 없어요. 아직은. 나중에 먹고 살기 힘들어지면 후회할지도 모르겠지만요.(웃음) 근데 후회 안할 것 같아요.”

출처: 송화 씨 제공
“올해는 인생의 안식년”이라고 말했던 송화 씨는 인터뷰를 마친 다음주에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직장인들이 일하는 평일 낮, 거리는 한산했다.

”삶의 90%는 가능성”

- 20년을 쉼 없이 달려오다 잠시 앉아 숨을 고르는 시간이시네요. 제대로 충전하고 계신가요.


“왜 시험공부할때 그러잖아요? 시험 끝나면 이것도 할거고 저것도 할거라고 엄청 생각하지만, 막상 시험 끝나면 그냥 아무것도 안하게 되죠. 저만 그런가요?(웃음) 그거랑 비슷해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일단은 마음 가는 대로 해보자!’하는 중이에요.”


- 직장인이었던 송화 씨와 퇴사한 지금의 송화 씨를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삶의 90%가 안정성인 사람, 그리고 지금은 삶의 90%가 가능성인 사람.”


- 90%의 가능성이 열려있는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무언가를 명확하게 정하고 퇴사한 게 아니라서 아직 특별한 계획은 없어요. 올해는 그냥 인생의 안식년으로 삼을까 합니다. 코로나19 때문에 해외 여행은 못 가지만 국내여행은 조심조심 다녀볼 거고, 직장인일 때 하고 싶었던 평일 낮 나들이나 맛집 순례 같은 것들을 해보려고요. 그 사이사이 해보고 싶은 일이 생기면 사부작사부작 해보려 합니다. 원래 성격이 낙관적이지 않은데, 이상하게 여유롭네요.”


황지혜 기자 hwangj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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