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도면 망해도 되겠다 싶어서" 문 연 21세기 문구점

조회수 2021. 3. 25. 17:4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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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아날로그]<1>서울시 망원동 동백문구점

문방구나 문구점은 요즘 주택가 골목에서 쉬이 찾아볼 수 없는 곳이 되었다. 까끌한 재생지 표지의 노트, 곱게 깎인 연필 같은 ‘아날로그’ 감성도 문구점과 함께 많이 사라졌다. 점점 많은 것이 디지털화되고, 동네 문구점의 자리를 대형마트와 온라인몰이 대체한 요즘 21세기에 아날로그 감성으로 가득 찬 문구점을 오픈한 사장님이 있다. 21세기 문구점 창업기를 써가고 있는 유한빈 대표(29)다.

“괴짜죠, 저는. 누가 봐도 괴짜일 거예요. 21세기에 손글씨 콘텐츠를 하고 대중성 없는 형태의 특수한 문구점을 하고 있으니까요.”
출처: 유한빈 대표 제공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손글씨 쓰는 걸 좋아하고 손글씨 쓰는 재미를 널리 알리고 싶어 노력하는 펜크래프트입니다. 이름은 유한빈이에요. 20대의 마지막 해를 보내고 있답니다. 키는 193cm고 몸무게는 133kg이에요. 종교는 천주교입니다. 세례명은 바오로고요. 평화를 빕니다 여러분.”


-무슨 일을 하시나요?


"온오프라인으로 손글씨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또 부캐로 문구점 아저씨를 하고 있어요. 동교초등학교 앞 아주 작은 규모의 문구점인데 어린 시절의 꿈이 이루어져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답니다.”

21세기에 등장한 아날로그 문구점

망원동 동교초등학교 정문 앞에는 파란 차양, 통 창을 가리는 자줏빛 주름 커튼, 따뜻한 색의 나무문이 달린 작은 가게가 있다. 그 앞에 세워진 작은 나무 간판에는 빨간 동백꽃과 ‘동백문구점’이라는 멋들어진 글씨가 쓰여있다. 

출처: 인스타그램 @camellia_stationery_shop

- 동백문구점은 어떤 곳인가요? 일반적인 문구점과 무엇이 다른지 궁금합니다.


“주변에서 문구점에 제가 그대로 녹아 있다는 말씀을 많이 해주세요. 찾다 찾다 맘에 드는 (문구) 제품이 없어서 제가 만든 노트들을 위주로 다양한 제품을 제작하고 있어요. 제작할 수 없는 것들이나 제작하는 것보다 더 저렴하고 퀄리티가 좋은 제품이 있다면 유통을 통해서 들여와 많은 분들께 소개한답니다. 무엇보다 다른 점은 동백문구점에는 제가 쓰는 제품들만 있어요. 따라서 물품 종류가 많지 않지만 하나하나 알짜 제품이랍니다.”


- 문구를 제작하신 게 모두 직접 사용하기 위해서인가요?


“네. 안 팔리면 평생 쓰자는 마음으로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마음이 놓이더라고요. 제가 쓸 거니까 좋은 종이를 사용하고, 고급 양장 제본을 사용해 만들었어요. 그러다 보니 원가가 높은데, 구매하신 분들의 만족도도 굉장히 높답니다. 저도 굉장히 좋아하고요.”


- 그럼 유 대표님은 어떤 필기구로 어떤 종이에 글씨 쓰는 걸 가장 좋아하시나요?


“저는 진한 연필(B, 2B)를 좋아해요. 많은 브랜드 중에서도 스테들러라는 브랜드가 가장 스탠다드한 경도를 가졌다고 생각해요. 디자인까지 예쁜 건 두말하면 입 아프고요. 연필을 쓰다보니 사각거리는 종이를 좋아한답니다. 연필로 사각이는 종이에 글씨 쓰는 게 좋아 문구점 재정 상황이 좋아 지면 연필로 쓰기 좋은 노트도 제작할 생각이에요. 또, 만년필로 서걱서걱 쓰는 맛도 참 좋아합니다. 그래서 제가 만드는 노트들은 코팅이 되어 있지 않은 내지를 사용해요. 손맛을 위해서요.”

출처: 동백문구점 온라인몰

- ‘21세기에 문구점 창업기.’ 개인 블로그에 올리신 글인데요. ‘21세기’와 ‘문구점’은 어찌 보면 참 안 어울리는 말 같아요. 이 디지털 시대에 오프라인 문구점을 창업하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온라인 커머스가 대세인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구는 완전한 경험재라고 생각해요. 더군다나 쟁쟁한 노트 회사들이 많은데 생긴지 얼마 되지 않은 업체의 제품을 무엇을 믿고 살까요? 


그런 의심을 해소해드리기 위해서, 많은 분들께 손글씨 썼던 경험을 되살려드리기 위해서, 인터넷으로 표현되지 않는 종이의 질감을 느끼게 하고 싶어서, 제가 궁금한 분들께 저를 보여드리기 위해서, 인테리어 하는 걸 좋아해서, 나만의 작업실을 갖고 싶어서, 문구 콘셉트 사진을 찍고 싶어서, 자아실현을 위해서 등등 (이유는) 다양합니다.”


- 문구점들이 요즘에는 많이 사라지고 있는데요. 문구점에 얽힌 추억이 있으신가요?


“제가 처음에 문구덕후가 된 건 사실 중학교 앞 문구점에서 였어요. 제브라라는 브랜드에서 나온 에어샤프가 인기를 누리고 있었는데 그게 색깔 별로 계속 나오더라고요. 저도 매점 갈 돈을 아껴 하나씩 사 모았답니다. 그런 건 모을수록 예쁘더라고요. 결국 나오는 것마다 다 구매했고 곧 젤리샤프(알파겔)라는 게 또 히트를 했어요. 그것도 잔뜩 모아 콜렉션을 만들었어요. 그때부터 저도 문구점이 하고 싶었답니다. 신상이 나오면 가장 먼저 만나볼 수 있잖아요. (웃음)”

요즘 같은 세상에 문구점이라니, 장사가 잘 될까 걱정되는 마음에 적자는 나지 않느냐고 은근한 질문을 던졌다. 유 대표는 ”(가게가) 작고 임대료가 저렴한 곳에 위치했기 때문에 아직은 적자를 살짝 보거나 간신히 흑자를 보는 수준”이라며 “크게 했으면 엄청난 적자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는 운영비용에서 유 대표 자신의 인건비는 전부 제외한 계산이다. 

이 정도면 손해봐도 되겠다 싶은 범위에서, 작은 가게로 시작했어요. 콘셉트 자체가 편집숍이기 때문에 물건을 많이 들이는 가게도 아니고요.

손글씨를 업(業)으로 삼다

다행히도 문구점 운영이 유 대표가 하는 일의 전부는 아니다. 유 대표는 아날로그, 그리고 손글씨를 업(業)으로 삼은 사람이다. 손글씨 쓰는 것이 좋아 유튜브를 운영하다가 유명세를 타고, 손글씨 강의를 하고 책까지 썼다. 그가 운영하는 '펜크래프트' 유튜브 계정은 구독자가 10만 명이 넘는다. 그 때문일까. 문구점을 차린 이유를 설명하는 유 대표의 말 속에는 손글씨에 대한 애정이 8할은 되어 보였다.

- 손글씨가 직업이 될 수 있었다는 게 대단합니다. 어떻게 글씨 쓰는 직업을 갖게 되셨나요?


"먼저 '손글씨로 돈을 벌고 직업으로 삼겠다'는 생각을 하고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손글씨를 쓰다보니 먼저 강의 제안이 왔고, 반응이 좋아서 계속하게 되었어요. 사실 처음 강의 제안이 왔을 때는 시작 전날까지도 '글씨가 돈이 될까?'하며 반신반의했거든요.


(그냥) 좋은 플랫폼에 숟가락 하나를 얹었다고 생각해요. 노트폴리오 아카데미나 클래스101 등 기존에 유명했던 플랫폼에서 강의를 할 수 있었던 게 어느정도 공신력을 보장해 운이 좋게도 많은 분들께 노출됐어요. 또, 제가 직접 글씨를 만들면서 시행착오를 많이 거친 것도 큰 도움이 됐어요. 획의 변화에 따라 바뀌는 느낌을 몸소 체득하다 보니 그걸 토대로 풀어가는 강의를 굉장히 좋아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여태 직업으로 해올 수 있었습니다.


사실 다들 본업이 뭐냐고 물어보세요. 그럴 때마다 그냥 취업 준비생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요샌 문구점을 열어서 문구점 아저씨라고 하고 있지만요.”


- 손글씨 쓰기를 시작하게 되신 계기가 있을까요?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 글씨를 못쓴다고 매번 혼났어요. 그래서 펜글씨 책도 몇 개 떼 보고 그랬는데 결국 안 바뀌더라고요. 바꿔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데 억지로 해서 그런 것 같아요. 성인이 되고 나서 군대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글씨를 보다 보니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이미지가 굉장히 좋아 보이더라고요. 실제로 그 선임이 일을 잘하고 똑똑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저도 몰래 연습을 시작했답니다. 연습이다 생각하지 않고 그냥 매일 좋아하는 명언을 하나씩 쓰며 시작했는데 크게 부담스럽지 않아 꾸준히 할 수 있었습니다. 돌아보니 8년이 지나있네요.”


- 글씨는 어떻게 그렇게 잘 쓰세요?


“글씨를 잘 쓰고 싶어서 정말 많은 글씨들을 찾아 분석하고 적용해 나갔답니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저만의 글씨를 만들다 어느정도 봐줄만한 글씨가 되기까지 5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어요. 글씨를 잘 쓰고 싶은데 막막한 분들을 위해 저의 노하우를 풀어 냈고, 많은 분들이 (제 조언을 통해) 글씨가 좋아지는 걸 보고 아주 뿌듯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손글씨 잘 쓰는 법’에 대해 묻는 기자에게 유 대표는 △관심을 많이 가질 것, △닮고 싶은 글씨를 찾을 것, △자신의 글씨를 뜯어볼 것’의 3가지 조언을 건넸다. 3페이지 정도 평소 글씨체로 글을 쓴 뒤 가장 마음에 드는 자모음 형태를 찾아 그 형태를 유지하며 글씨를 쓰면 예쁜 글씨의 체계가 잡힐 것이라는 것. ‘그저 많이 써보면 된다’ 등의 답변을 생각하고 있던 기자의 단순함이 부끄러워지는 손글씨 선생님다운 답변이었다.

손글씨, 문구점, 그리고 아날로그

출처: 인스타그램 @camellia_stationery_shop

- 왜 쓰기, 문구, 그리고 아날로그를 좋아하시나요?


“손맛이 좋고 예쁘잖아요. 선사시대 때부터 내려온 유전자가 산업혁명 몇 백 년 만에 확 바뀌진 않을 것 같아요. 우리 마음 속에는 항상 아날로그를 꿈꾸고 있지 않을까요?”


- 유 대표님에게 손글씨, 그리고 아날로그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요.


“손글씨는 제가 광장으로 나갈 수 있게 해주는 매개체에요. 밀실에 있는 저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거든요. 하지만 손글씨를 통해 광장으로 나가게 되면 많은 분들과 소통할 수 있는 상태가 돼요. 그거 하나 만으로도 제게는 더할 나위 없이 값진 행위랍니다.”


- 꿈꾸고 계신 목표가 있으신가요?


“손글씨 강의를 꾸준히 할 수 있게 되어 많은 분들이 쉽게 글씨 교정을 하고 손글씨 쓰는 재미를 느끼셨으면 좋겠어요. 또, 잘 고른 노트 하나가 쓰기의 즐거움을 배가시킨다는 걸 많은 분들께서 느끼셨으면 좋겠어요. 대부분 필기감은 펜에서 온다고 생각하는데 필기감에는 종이가 굉장히 큰 역할을 하거든요. 또 퀄리티 있는 제조 노트들도 수출하고 싶고요. 멤버십제로 모이는 필사모임 공간도 열고 싶고, 굉장히 다양한 목표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생각해뒀는데 항상 문제는 자본이죠. 여유가 생겨 기획한 일을 차근차근 해보고 싶습니다.


'문제는 자본'이라며 울상을 지은 유 대표였지만 동백문구점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목소리는 밝았다.  "Z세대가 크면 문구점도 함께 클 수 있을 것 같아요. 만족을 위한 소비, 취향을 위한 소비, 그리고 '나를 위한 소비'를 하는 세대니까요."


황지혜 기자 hwangj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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