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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터지면 다 죽겠구나' 한국에서 소방관으로 산다는 것

조회수 2021. 3. 2. 15:1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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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지 마라토너에서 시골 소방관 심바씨로, 청년 최규영의 삶
저게 터지면 다 죽겠구나.

2020년 2월 17일 정오 무렵 순천-완주 간 고속도로 상행선 사매2터널(전북 남원)에서 30중 추돌사고가 발생했다. 질산을 가득 실은 24t 탱크로리가 정차해 있던 차량들과 부딪치면서 전도됐고, 쏟아진 질산에 불이 붙었다. 5명이 숨지고 40여 명이 다쳤다. 작은 도시 남원에서 유례없는 대형 사고였다.

출처: 신동아, 조영철 기자

남원소방서에 배치된 지 꼭 한 달째이던 신입 구조대원 최규영 씨는 첫 함박눈이 내린 날로 기억한다. 거칠게 내리는 눈과 터널에서 빠져나오는 시커먼 연기가 묘한 대조를 이루던 그날. 


터널 입구에서부터 차량의 불길을 하나씩 잡으며 전진하다 보니 시뻘겋게 달아오른 탱크로리 아래로 불똥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저게 터지면 다 죽겠구나’ 싶었다. 산소가 떨어져 공기통을 교체하러 잠시 터널 밖으로 나왔을 때 후발대가 호스를 들고 터널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구급차에 실려 가는 환자들, 멀리서 발을 동동 구르는 시민들, 방화복을 입은 소방관들 틈에서 유독 머리 위로 소복이 눈을 이고 서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 사내의 사정을 알게 된 것은 다음 날 현장 수습을 위해 재출동했을 때였다. 그도 타 지역 소방관이라는 것, 신혼인 아내가 저 터널을 지나다 소식이 끊겼다는 것, 구조대와 함께 터널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사정하고 있다는 것, 하지만 규정상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 얼마나 울었는지 튀어나올 듯 빨간 눈에 눈물과 침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소방대원들에게 한 그의 마지막 부탁은 “혹 손가락 한 마디라도 찾으면 꼭 좀…”이었다. 울음이 터져 말을 잇지 못하는 사내를 뒤로하고 새카맣게 식어버린 터널 앞에 도착했을 때 냄새가 진동했다. 터널 입구에 충돌한 트럭에서 쏟아진 유자청이 바닥을 덮고 있었다. 최 소방사는 그날 일기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한 사내의 가장 비참한 날, 냉혹하고 비정한 그 터널엔 향긋한 유자향이 가득했다. 그 후로 난 더 이상 내가 좋아하는 유자차를 마시지 못한다.” 

“남원소방서로 배치받은 지 꼭 한 달 만에 터진 사고였어요. 막 두발자전거를 배운 사람이 사이클 대회에 나간 셈이죠. 구조차 안에서 혼선되는 무전기 소리, 터널 연기, 시민들 표정, 불 냄새, 열기까지 아직도 생생해요.”

남원소방서 소속 구조대원 최규영(37) 소방사는 그 기억들이 휘발되기 전 꼼꼼히 메모했다. 사매터널 사고 후기인 ‘메멘토 모리: 당신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지역신문사 독자 기고로 실리기도 했다. 그때부터 ‘시골소방관 심바씨’라는 필명으로 다음 ‘브런치’에 차곡차곡 글을 올렸다.


“누군가 그랬죠. 사람도 잔처럼 채우고 채우다 어느 시점에 넘칠 때가 있다고.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시점이 내겐 그랬어요. 사고 현장에서 느끼는 감정과 생각들을 그냥 마음에 묻고 잠들기에는 내 잔이 너무 작았죠.”

출처: 신동아, 조영철 기자
남원소방서 구조대원들. 왼쪽부터 박준수 소방사, 최규영 소방사, 김호길 소방위, 이한주 소방사, 문남식 소방장.

사매터널 사고에 대해 쓸 때에는 누군가의 슬픔을 이야깃거리로 만드는 것은 아닌지 마음에 걸렸다고 한다. 하지만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현장에 출동했던 소방관들이 겪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그런 아픔을 겪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새로운 현장에 출동해야 하는 동료들의 이야기였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 차량과 부딪치는 사고로 위독한 소년을 구급차에 실어 보낸 날, 대원들은 사무실로 돌아와 유독 더 크게 웃고 더 많이 웃었다.


“사고 현장에 도착했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 이런 생각을 하죠. 신고가 더 빨리 접수돼 소방관들이 더 빨리 도착했다면, 그 아이가 평소보다 자전거를 빠르게 탔거나 사고 차 운전자가 조금 천천히 운전했다면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구조대원의 무게감 때문에 그날따라 모두 ‘다운’돼 있었고 팀장님은 분위기를 띄우려고 어지간히 애를 쓰셨어요. 그 미안함의 크기만큼 웃으면 원래 없었던 일로 돌아오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아요.”

특전사 부사관, 극지 마라토너, 늦깎이 소방관

특전사 부사관으로 4년간 복무한 최규영 씨는 35세에 구조대원이 된 늦깎이 소방관이다. 특수부대 출신들이 쫙 깔린 구조대에서 그는 고참 같은 막내이자 ‘이상한 놈’으로 통한다. 소방관이 되기 전 그의 다채로운 이력 때문이다. 

출처: 최규영 제공
최규영 씨는 28세인 2012년 12월 남극마라톤대회를 완주함으로써 칠레 아타카마 사막(3월), 중국 고비 사막(6월), 이집트 사하라 사막(11월)을 포함해 4대 극지마라톤대회를 1년 만에 주파하는 대기록을 달성했다(사진 왼쪽부터).

20대 시절 대학생 최규영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극지 마라토너’다. 2012년 12월 대전 한남대 기독교학과 4학년 최규영의 이름이 거의 모든 언론에 등장했다. 최씨와 동국대 재학생 윤승철 씨가 나란히 12월 1일 남극 킹조지섬 등 10개 섬 총 250km를 달리는 남극마라톤대회를 완주함으로써 칠레 아타카마사막(3월), 중국 고비사막(6월), 이집트 사하라사막(11월)을 포함해 4대 극지 마라톤대회를 1년 만에 주파하는 대기록을 달성했다는 소식이었다.


1년 안에 4개 대회를 모두 완주하면 ‘명예의전당’에 이름이 오른다. 전 세계적으로 명예의전당에 오른 사람이 100명이 안 될 만큼 죽음의 경계까지 자신을 밀어붙이는 인내의 스포츠로 알려져 있다. 왜 그처럼 ‘사서 고생’을 했는지 묻자 그는 “열등감과 절실함”이라고 대답했다.


“군대에 있으면서 내가 누구인지 생각했어요. 고등학교 때 전국택견대회에서 1등을 하고 택견으로 대학에 갈 줄 알았는데 잘 안 됐어요. 다시 선교사가 되려고 재수해서 기독교학과에 들어갔지만 공부가 너무 부족했어요. 운동은 했어도 공부를 한 적이 없으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일찍 독립해서 쉼 없이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경제적으로 막막해서 직업군인이 된 거죠. 돈도 없고 실력도 없고 배경도 없는 나는 다른 친구들보다 출발선에서 한참 뒤처져 있구나. 아무리 기도해도 나아지는 게 없던 어느 날 거울을 봤는데 근육질의 건강한 내 모습이 보이는 거예요. 남들보다 나은 것 딱 하나를 발견했죠.”


그의 재능은 건강한 몸과 버티는 힘이었다. 그리고 군대에서 처음 책을 잡았다. 진중문고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1년에 100권이란 목표를 세웠다. 4년간 군복무를 하며 버킷리스트도 작성했다.


“군대에서 적어놓은 버킷리스트 중 가장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해내면 다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더라고요. 극지 마라톤 그랜드슬램이었습니다.” 

천직을 만나다

“그때는 사람들 앞에서 열정, 열정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창피해요. 마치 그 나이에 대단한 성공을 한 것처럼 떠들었으니까요. 문득 진짜 의미 있는 일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업도 했다. 서울 마포 망원동에서 ‘깐풍기집’을 했지만 돈 버는 재주는 없었다. 가게를 1년 만에 접었을 때 마침 특수구조대에서 근무하던 특전사 동기가 소방관직을 권했다. 비로소 천직을 만났다.


“제 장기가 참는 거예요. 육체적으로 참는 것과 누가 뭐라 해도 심리적으로 화를 안 내는 것. 남보다 빨리 달려본 적도 없지만 그렇다고 포기한 적도 없죠. 늘 중하위권이지만 끝까지 달렸어요. 소방관이 되니 잘 참는 게 도움이 되더라고요. 사고 현장에서 단시간에 체력을 쏟아부으면 지칠 때가 있어요. 마치 단거리 속도로 장거리를 뛴 느낌이랄까. 온 힘을 쏟아냈는데 아직도 할 일이 한참 남아 있을 때, 그럴 땐 특전사 시절 훈련과 극지 마라톤을 하면서 목에 피가 나는 듯한 그 느낌을 떠올려요.”


소방관이 된 뒤 누군가를 구조했거나 불을 껐거나 그 행위만으로 한 사람의 인생이 바뀔 수도 있음을 알았다. 20대 시절 먼 나라에 가서 구호물자를 나눠주고 집을 짓는 봉사활동을 할 때는 문득 이것이 과연 이 사람들의 삶에 얼마나 변화를 줄까 공허하기도 했으나 소방관이 된 뒤로는 회의가 더는 생기지 않았다.

돼지도 뛰고 사람도 뛰고

소방관 하면 화재를 떠올리지만 시골에서는 불 끄는 일 말고도 의외의 일이 터진다. 그중 봄이 되면 가장 잦은 출동이 동물 구조다. 


지난여름 섬진강 제방이 무너져 마을이 물에 잠겼다가 하루 만에 물이 빠진 뒤 소가 지붕 위에 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구조차를 타고 수해로 엉망이 된 마을에 들어서니 황소가 정자 안에 들어가 있고, 돼지는 강가에서 더위를 피하고, 선발대로 온 소방관들이 돌진하는 소를 피해 후다닥 전봇대 뒤에 숨는 코미디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신고가 들어온 농가에 도착했을 때 구조대원들은 이내 웃음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지붕이 다 뜯겨나간 축사에서 소 한 마리가 천장에 목이 걸려 죽어 있고, 다른 한 마리는 한쪽 다리가 천장에 걸린 채 거꾸로 죽어 있었다. 눈 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찌는 듯한 더위에 방화복을 입고 고중량 유압장비를 들고 작업하려니 대원들은 지쳐갔다. 소문을 듣고 모여든 농민들이 저마다 우리 집 일도 도와달라며 하소연을 하니 일은 점점 늘었다. 체력과 인내가 바닥을 드러낼 즈음 팀장님이 대원들 기색을 살피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늘에서 좀 쉬었다가 한 번 더 도와줍시다. 이거 우리 아니면 누가 하냐, 응? 괜찮지?”


짜증이 날 법도 한데 소방관들은 묵묵히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그날 최 소방사는 ‘한국에서 소방관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썼다.

우리가 아니면 누가 이런 일을 할까. 어떠한 부름에도 현장에서 답을 만들어내야 하는 게 우리 소방관들의 사명인데 속으로 이건 시청 일이네 업체 일이네 이러고 있던 내가 부끄러웠다.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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