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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년에 귀농한 판사 출신 농부의 현실적 조언

조회수 2021. 2. 13. 09: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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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에서 농사를 짓고 산 지도 오랜 시간이 흘렀다. 1993년 법관사회 정풍(整風)을 주장한 일로 현행 헌법상 처음으로 법관 재임명에서 탈락했다. 그것이 너무 지나친 처사였다는 동정론이 일며 법관으로 다시 임명한다는 말이 있어 기다렸다. 하지만 무용한 일에 매이는 것 같은 심정이 들어 1994년 1월 추운 날, 어린 자식 둘 손을 잡고 경주에 내려왔다.


변호사 일을 해 얻은 수입으로 조금씩 농토를 마련해 집을 짓고 농사일을 시작했다. 다시는 경주 바깥으로 발을 내딛지 않고, 흙 속에 바람 속에 나머지 삶을 묻어버리겠다고 모질게 마음먹었다. 


사람들 짐작과 달리, 나는 밭농사는 물론 논농사도 지었다. 농협조합원이기도 하고, 법제도상 ‘농업인’으로 엄연히 등록돼 있다.

지난해 8월 4일 경기 파주시 적성면 한 농장에서 귀농 교육 프로그램 참가자들이 체험 활동을 하고 있다. [귀농귀촌종합센터·지역아카데미 제공]

자연의 일부가 됐다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태풍을 숱하게 겪었다. 꼭 수확기 가까운 시점에 태풍이 부니 이삭 달린 벼는 위가 무거워 쓰러지기 십상이다. 이를 빨리 일으켜 세우지 않으면 쓰러진 벼에서는 싸라기밖에 나오지 않는다. 


장화를 신고 진창이 된 논에 들어가 벼를 일으킨 뒤 볏짚으로 감는데, 이게 극한노동이다. 농사일 중 가장 힘들다. 한 단을 묶은 뒤 발을 옮겨야 하는데, 푹 빠진 진창에서 발을 빼내기가 쉽지 않다. 허리는 끊어질 듯 아프고, 일의 진척은 느려 한 시간 일해 봐야 기껏 한두 평 작업하기도 힘들다.


그래도 논농사에는 멋이 있다. 햇볕을 받아 고르게 잘 자라는 벼 사이로 들어가 피를 뽑을 때 발밑에는 맑은 물이 졸졸 흐른다. 신기하게도 잠자리나 나비 같은 곤충이 아무 겁 없이 내 몸에 앉는다. 앞에 있는 들쥐도 나를 흘끔흘끔 쳐다볼 뿐 도망갈 생각을 않는다. 그야말로 무아일체의 빛나는 풍경 속에 박혀 그림의 일부가 된다.

귀농을 꿈꾸는 이를 위한 조언

귀농이나 귀촌을 꿈꾸는 이를 위해 선배로서 몇 가지 현실적인 조언을 하고 싶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농작업이나 살림에 필요한 도구를 잘 다루는 것이다. 농사일 하러 시골에 와놓고 그 일을 남에게 맡길 수는 없다. 생활하며 발생하는 자질구레한 일을 대부분 자신이 해야 한다. 


시골에 오기 전 목공일을 얼마간이라도 배워오면 엄청난 효용을 발휘한다. 작은 기술을 발휘해 동네 어르신 불편을 조금 덜어주면 큰 인심도 얻을 수 있다. 물론 자기 생활도 훨씬 나아진다.


목공까지는 아니라도 여러 작업기구를 몸에 착 붙여 사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대표적인 것이 사다리다. 사다리는 최소 두 개 이상 마련한다. 하나는 높이가 낮아도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 다른 하나는 상당한 높이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사다리를 줄였다 늘렸다 하며 용도에 맞게 써야 하는데, 이게 익숙해지지 않으면 사다리가 사람을 압도해버린다. 사다리를 내 몸처럼 움직일 수 있게 되면 여러 일에 두려움이 없어진다.


낫, 호미 같은 것은 용법이 간단해 얼마 안 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사람 피부가 얼마나 약한가. 날카로운 것이 살짝 스치기만 해도 벗겨지고 잘린다. 경운기 같이 덩치 큰 농기구는 위험성이 더 크다.


또 농사일에서 생산성을 높이려면 농약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지금 전국 농가에서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제초제는 맹독성이다. 월남전 때 사용된 고엽제가 바로 제초제다. 월남에서 돌아온 군인 상당수가 수십 년 세월이 흐른 지금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제초제를 담았던 분무기를 씻다 손에 묻어도 몸 안을 타고 들어가 장기를 녹여버린다고 하니 무시무시한 일이다. 이처럼 농사일은 목가적인 즐거움으로만 가득 찬 게 아니다. 항상 몸을 다치게 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주의하지 않으면 큰 낭패를 겪게 된다.

예비 귀농귀촌인들이 충북 단양에서 농사 체험을 하고 있다. [단양군 제공]

현실적으로는 ‘어디서 살 것인가’를 정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때 너무 이상에 흐르지 말 것을 권한다. 촌일수록 텃세가 심해 까딱 잘못하면 발을 붙이지 못한다. 


내가 보기에 사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인과의 관계’다. 이웃과 관계를 돈독하게 할 자신이 없으면 그곳에 가서는 안 된다. 사전답사를 하면서 지역 인적 구성을 면밀히 파악해야 한다. 어떤 마을에 들어서면 왠지 마음이 푸근하고 정감가는 곳이 있다. 그런 곳은 인심이 후하기 마련이다.


요컨대 경제적인 것보다 인간관계가 더 중요하다. 지금 시골에는 큰 비용 들이지 않고 정착할 수 있는 곳이 수두룩하다. 발품을 팔면 엄청나게 좋은 조건을 찾을 수 있다. 꼭 농토를 살 필요도 없다. 싸게 빌릴 수 있는 좋은 땅이 널려 있다. 다만 집은 많은 비용을 들여 고쳐야 하니 가급적 구입하는 게 바람직하다.


결국 내가 어떤 지역에서 인간적 품위를 지키며 주위와 조화롭게 삶을 영위할 수 있느냐를 따져 그럴 수 있다는 판단이 들 때 그곳에서 살 결정을 하는 것이다. 고향 쪽으로 가면 대체로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이것을 강력히 추천한다.

자연의 넉넉한 품안에서

경주 고분들이 겨울 황혼에 넋이 빠져 있다. 자주 고분 사이로 저녁 산책을 잡는다. 집에서 나서면 10분이 채 안 돼 갈 수 있다. 인적이 드물다. 가끔 망자와 생자의 구분이 흐릿해지는 느낌이 온다. [신평 제공]

나는 삶에서 번번이 가다가 넘어지곤 했다. 비통한 심정으로 일어나 다시 걸었다. 흉중에 품은 뜻을 실현할 기회가 단 한 번도 주어지지 않았음을 한탄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골살이는 이 모든 감정의 굴곡을 펴게 했다. 나는 자연의 품 안에 조용히 안기며 내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다른 모든 이와 마찬가지로 살아오며 고통과 행복의 순간이 있었다. 그런 자잘한 일들이 뭉쳐져 내 삶을 결정하는 것이다. 내가 나서서 무슨 일을 하려는 욕심을 버리니 마음이 고요하다. 


거친 풍파가 찢어놓은 겉모습과 다르게, 실은 내 삶 길목 곳곳에 축복의 손길이 미쳤음을 요즘 부쩍 많이 느낀다. 나에게 어울리지 않게 과분한 대우였음을 깨닫는다. 미안하면서도 오직 감사하게 받아들인다.


신평 변호사·㈔공정세상연구소 이사장 lawshi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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