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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할 각오 하고 시작한 사업, 목표 1000% 이뤘습니다"

조회수 2020. 12. 10. 13:3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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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데기는 가라, 알맹이만 오라.’


지난 6월 서울 마포구 망원동에 문을 연 제로 웨이스트숍 ‘알맹상점’은 무포장 제품만 판매하며 포장재를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세제나 화장품은 친환경 대용량 제품으로 갖추고 고객이 원하는 만큼 재활용 용기에 덜어 판매한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플라스틱 쓰레기 발생량이 급증하면서 쓰레기 없는 소비인 ‘제로 웨이스트’를 실천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높아졌지만 실현 가능성은 미지수였다. 그렇게 매장을 열고 6개월여가 흐른 지금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고금숙 알맹상점 대표는 “망해도 의미 있는 도전이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매출 목표를 1000%이상 달성했다”며 활짝 웃었다. 

고금숙 대표는 “알맹상점을 망할 각오로 시작했다”고 말한다. [지호영 기자]

-성공 가능성이 불투명하던 가게를 연 이유가 무엇인가.


“2018년 여성환경연대를 그만두고 동네(망원동)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내가 사는 곳부터 바꾸고 싶어졌다. 망원시장에서 ‘알맹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검정 비닐봉지를 없애고 장바구니를 쓰자’ ‘선포장하지 말자’ 같은 운동이었다. 나와 생각이 같은 망원동의 ‘알짜’(알맹이만 원하는 자)들이 중심이 돼 망원시장 옆 카페 한편에서 친환경 세제를 원하는 만큼 덜어 사갈 수 있는 ‘세제소분숍’도 운영했다. 그러면서 알맹상점 같은 공간의 필요성을 느꼈다. 알짜 멤버들과 알맹 캠페인을 지지하는 분들은 이용할 테니 전기요금은 낼 수 있겠다 싶어 시작했다.”


원래 패션지 기자를 지망했던 고 대표는 대학 1학년 때 페미니즘 교지를 접한 것이 계기가 돼 삶의 방향이 바뀌었다. 졸업 후 10년 동안 여성환경연대에서 일하면서 유해물질과 건강을 다루며 대형마트 영업시간 제한, 생리대 유해물질 이슈화, 화장품 미세플라스틱 사용 금지 등의 변화를 이끌어냈다. 


지금은 환경단체 ‘발암물질 없는 사회 만들기 국민행동’에 주3일 출근하고, 그 외 시간에는 플라스틱 프리(plastic-free) 활동가로 일하면서 알맹상점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플라스틱 프리 실천법을 담은 책 ‘우린 일회용이 아니니까’를 펴내기도 했다.

-왜 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먼저 했나.


“시민단체에서 13년간 일하면서 무수히 많은 대안적 가게가 사라져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시장이 얼마나 잔혹한 곳인지 누구보다 잘 안다. 자영업자가 하루 12시간 쉬지 않고 일해도 먹고 살기가 힘든 현실이다. 환경을 지키고 싶다고 우리가 4차 산업혁명에 뛰어들 수는 없지 않나. 그 대신 성공 가능성이 낮으니 망해도 잘 망하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뭔가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가득했다. 무엇보다 리필 스테이션이 잘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대기업에서 리필 스테이션을 먼저 시작할 수는 없다. 대기업은 ‘된다, 호응이 있다’는 걸 보여줘야 따라 나서기 때문이다.”


망할 각오를 하고 시작한 사업이지만 최근 월매출 2000만 원을 찍으면서 알맹상점은 가능성을 보았다. 주차도 되지 않는 건물 2층에 자리잡은 가게이지만 고객이 하루 최소 50명, 주말에는 7~80명 방문한다. 고금숙 대표와 양래교, 이주은 공동대표 모두 월급을 또박또박 가져간다. 


월급은 최소 기본급을 정하고, 각자 일한 시간만큼 시급 1만원씩을 더해서 가져가는 시스템으로 정했다. 세 공동대표들의 사정으로 일주일에 36시간만 영업을 하는데도 이 정도면 매출이 적지 않은 편. 경기도 일산, 광명에서 백팩을 메고 찾아와 3kg 통에 세제를 리필해 가는 고객도 있다.

고금숙 대표는 소분 판매를 위해 ‘맞춤형 화장품 제조관리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지호영 기자]

-요즘 하루가 다르게 제로 웨이스트숍이 생겨난다.


“맞다. 반가우면서도 걱정될 만큼 많이 생기고 있다. 그분들이 공통 묻는 질문이 ‘얼마 버느냐’ ‘이런 사업으로 먹고살 수 있느냐’다. 정부 지원 없이 운영된다는 점에서도 고개를 갸웃한다. 보통 이런 일을 할 때는 지원 사업을 따내 도움을 받는다. 과거 공익캠페인을 할 때 우리도 그랬는데, 문제는 서류작업에 내 시간의 절반을 들여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원 사업 없이 살아남는 걸 보여주는 게 희망이라고 생각했다. 최대한 인건비를 낮게 책정한 이유다. 올해는 성공한 모델을 만들고 싶었다면 내년에는 지속가능한 모델을 만들고 싶다. 임금도 적정하게 책정하고 4대 보험도 가입하고.”


-제조사로부터 포장재 없이 납품을 받기가 쉽지 않았다고 들었다.


“매장에 입고할 제품 리스트를 만드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가장 문제는 원하는 만큼 덜어 팔 수 있는 대용량 제품을 공급받는 일이었다. 화장품은 공장에서 생산되기 때문에 최소 100kg, 200kg 단위로 공급받아야 하는데 우리는 1년 안에 제품을 모두 판매할 자신이 없었다. 구매 비용 또한 부담이었다. 그래서 20kg짜리 공급을 요청했는데 다 거절당했다.


그러다 아로마티카를 만났다. 원래도 친환경 제품을 만드는 회사였는데 우리의 제안을 듣고 맞춤형 화장품 제조관리사 자격증(‘화장품법’ 제3조에 따라 맞춤형 화장품 제조 및 소분 판매 시 전문 자격증을 지닌 맞춤형 화장품 제조관리사를 둬야 한다)을 취득할 예정이라며, 리필과 플라스틱 줄이기를 사명으로 생각한다는 말과 함께 공장에서 우리만을 위한 20kg짜리 제품을 생산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돈이 안 되는 일인데 참 대단한 회사다. 리필통 재사용 시스템까지 만들어 위생적인 사용이 가능하도록 해준다.”

출처: 알맹상점 인스타그램
아로마티카 리필 제품

-리필통 관리는 어떻게 하나.


“세제의 경우 절반은 세척과 소독 과정을 거쳐 재사용하고, 그렇게 안 될 때는 폐기한다. 안타깝지만 그래도 개인이 사서 버리는 것보다 플라스틱 쓰레기가 줄어든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세척과 소독은 업체에서 해주는 경우도 있고, 우리가 해서 보낼 때도 있다. 화장품은 100% 통으로 주고받는다. 모든 업체가 통 관리를 해주지는 않는데, 업체에서 관리하면 미생물 검출 실험기를 활용해 좀 더 철저한 위생 관리가 가능하다. 기기 가격이 120만 원이라 우리도 휴대용으로 하나 살까 고민 중이다. 이렇게 관리가 안 될 때는 역시 일정 기간 사용하고 통을 폐기한다.”


올해 들어 아모레퍼시픽, 이마트, 올가가 리필 판매를 시작하며 대기업들도 리필 문화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고 대표는 “좋은 흐름이라고 생각한다”며 “자금력 있는 대기업이 나서야 멋진 소분 기계가 나온다”고 설명했다. 대기업과 동네 리필숍의 역할은 다르기 때문에 더 많은 대기업들이 재사용 문화 활성화에 나서 주었으면 한다는 게 고 대표의 입장이다.

-이제 다음 계획은 무엇인가.


“밀레니얼 세대가 추구하는 것 중에는 채식이 있다. 나는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있으면 즐겨 먹는데, 망원시장에 채식 가게가 없다. 온라인으로 채식만두 하나만 주문해도 어마어마한 포장재가 함께 온다. 그래서 제로 웨이스트와 채식을 결합한 ‘알맹푸드’를 생각하고 있다. 편의점처럼 아주 간편하게 채식 음식을 팔고 다양한 샐러드 소스를 자기 통에 담아주는 가게. ‘알짜’ 중에 비건 셰프가 있다. 오늘 그분을 만나 정말 그런 형태의 숍을 할 건지 말 말 건지, 투자금은 얼마나 감당할 수 있는지, 일주일에 몇 시간 일할 수 있는지 등을 본격적으로 논의하려고 한다.”


-굉장히 즐거워 보인다.


“즐겁다. 내가 생각한 그 이상의 성과를 거뒀기 때문에 더 멋진 일들을 하고 싶다. 연말 캠페인으로는 아파트가 거의 없는 망원동, 서교동, 합정동 지역에서 폐지 줍는 어르신들을 돕고 싶다. 쓰레기로 번 돈을 쓰레기 처리의 말단에 있는 분들을 위해 쓰는 거다. 알맹상점에서는 우리 인건비만 나오면 된다. 그 이상의 수익으로는 쓰레기 처리 생태계를 지지하는 사업을 하고 싶다.”


이한경 기자 hklee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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