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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김혜수 "데뷔 34년, 아직도 연기하기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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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 살이던 1986년 우연히 TV광고 모델로 데뷔한 김혜수는 곧 톱스타가 되었다. 1993년 영화 ‘첫사랑’으로 제14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실력파 연기자임을 증명했다. 당시 스물세 살이었던 그가 세운 최연소 여우주연상 수상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이후 1995년 ‘닥터 봉’과 2006년 ‘타짜’로 청룡영화상에서만 3번의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지금까지 윤정희와 함께 최다 여우주연상 기록을 갖고 있다. 짝, 장희빈, 얼굴 없는 미녀, 직장의 신, 차이나타운, 시그널, 하이에나... 대표작을 꼽자면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다. 

11월 중순 개봉한 영화 ‘내가 죽던 날’에서는 주연을 맡아 배우 이정은, 노정의, 김선영 등 실력파 조연들과 호연을 펼쳤다. 영화 속에서 김혜수는 예기치 못한 남편의 외도로 충격을 받아 삶의 의지를 잃고 방황하는 형사 ‘현수’로 등장한다. 그녀는 아버지의 금융 범죄에 개입된 한 소녀의 실종 사건을 맡게 되고, 외딴섬 벼랑 끝에서 유서 한 장만 남기고 사라진 소녀에게 동질감을 느끼며 수사에 몰입한다. 

사진=영화 '내가 죽던 날' 스틸컷

‘내가 죽던 날’이란 제목부터가 범상치 않은데요. 작품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러 시나리오 가운데 영화같이 ‘내가 죽던 날’이라는 제목이 눈에 줌인돼 들어왔어요. 장르가 무엇인지, 어떤 역할인지 보기도 전에 왠지 이 영화를 해야 할 것만 같은 그런 운명적인 느낌이 들었죠. 대본을 읽어가면서 만나지 않은 사람들 간에 연대감 같은 것이 느껴졌고, 어떤 위로도 느껴졌어요. 이런 감정을 스크린에 담아내려면 배우뿐 아니라 연출도 쉽지 않겠다 싶었어요. 제가 대본을 보면서 느낀 감정을 관객분들께도 고스란히 전하고 싶었어요.


현수가 악몽을 꾸는데, 죽은 자신의 몸을 보며 ‘저거 좀 누가 치워주지’라는 대사가 독특하게 느껴졌어요. 그게 김혜수 배우 본인의 이야기라고 해서 정말 놀랐습니다.


영화를 촬영할 때 아이디어를 많이 내는 편이에요. 그 장면은 제 아이디어 중 하나였어요. 짐이 가득한 원룸 오피스텔에서 친구 민정(김선영)의 걱정 섞인 훈계에 자신의 마음과 상황이 얼마나 힘든지 고백하는 장면이었죠. 


죽어 있는 자신의 몸을 보는 악몽은 실제로 제가 몇 해 전 1년 내내 꾼 꿈이었어요. 꿈속에서 죽은 제 몸을 이렇게 내려다보는데 아무도 내가 죽은 걸 모르는 것 같더라고요. 속으로 ‘저걸 빨리 치워야 하는데, 누가 좀 치워주지. 제발 치워라도 주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의 제 상황과 현수의 상황이 맥락을 같이하는 것 같아서 그대로 연기했고, 그 장면은 관객에게 현수를 이해시키는 과정의 하나였다고 생각해요.

사진=영화 '내가 죽던 날' 스틸컷

당시 왜 그런 악몽을 꿨나요.


괴로웠던 시기가 있었어요. 다들 아실 거예요. 2012년 즈음 가족 관련 일(모친이 사업 투자를 목적으로 지인 등에게 약 13억원을 빌렸다가 갚지 않은 사건)로 힘든 상황을 맞았죠. 그때 주변에서 정말 몰랐냐고 하는데, 정말 (그런 일이 있는 줄) 몰랐어요. 내가 한 일은 아니지만 나로 인해 비롯된 일이란 생각 때문에 고통스러웠어요. 


그때 1년 내내, 꿈만 꾸면 영화의 몇 컷처럼 죽은 제 모습을 바라보는 장면이 나왔어요. ‘내가 정말 마음이 죽어 있나 보다’ ‘심리적으로 죽어 있는 상태구나’ 싶었죠. 그렇다고 막 ‘이겨내야 한다’는 생각조차 갖지 못했어요. 전 힘들면 현실적으로 해야 할 일들은 하되 전체적으로 내버려두는 편이거든요. 조바심? 마음속에 그런 게 들어올 공간이 전혀 없었어요.


지금은 완벽히 해결이 됐나요.


세상에 ‘완벽히’ 해결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지금도 내상은 남아 있죠.

홀로 타이틀 롤을 맡은 덕분에 비교적 최근작인 ‘국가부도의 날’ ‘굿바이 싱글’ ‘관상’ 등에 비해 부담이 컸을 것 같아요.


제가 어쩌다 선배가 돼 이 어려운 시기에 여성 연기자로서 책임감을 느껴야 하는 부분이 있어요. 그러나 부담이나 책임감을 가져가지는 않아요. 제가 할 역할에 충실할 뿐이죠. 그런데 그게 매번 너무 벅차요. 어릴 때 우연히 일을 시작하게 돼 정신없이 10대를 지나 20대가 됐어요. 그때 뒤늦게 사춘기가 오듯, 일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게 됐죠.


어느 순간 잠자리에 누웠는데 ‘왜 이 일을 하는 거지’라는 생각에 마음이 복잡해지기도 했고요. 청춘을 일만 하며 보낸 게 아까워서, 누군가 나를 평가하는 것보다 창의적이고 즐거운 일을 하고 싶기도 했죠. 막상 뭔가 해보려 했지만 벽에 부딪혀 좌절감도 느꼈고요. 


그렇게 30대를 보내고 여러 시도를 하며 수많은 영향을 주고받았고, 속으로 ‘만 40세가 되면 그만두리라’ 생각하기도 했어요. 왜냐면 내 삶과 연예인으로서의 삶을 분리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게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미 내 삶과 배우라는 직업은 분리할 수 없는 상태가 됐더라고요. 이 일을 하면서 취향이라는 게 생기고, 나라는 사람이 형성됐고, 거기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니 그만둘 수가 없었어요.


많은 여성들이 배우 김혜수를 보고 위안을 얻고, 살아갈 힘을 얻기도 해요. 그런 시대의 아이콘이 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겉으로 그렇게 보여도 속은 혼란스러워요.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제 힘만으로 온 것 같지 않아요.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없었으면 저도 없었겠죠. 뒤돌아보면 영화 속 순천댁 같은 구세주가 늘 있었고, 그런 면에서 전 운이 좋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요. 세상에 연기 경력이 빼어난 좋은 배우가 많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교하자면) 제 경우는 행운 같은 게 끊임없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저도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에요. 부족하고 자책하면서도 때론 별거 아닌 것에 기뻐하는 그런 사람요.


그러면 인생의 즐거움은 어디에서 찾나요.


사람, 음악, 시, 글, 아이들, 자연…. 그런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에서 충전이 되니까 사는 것 같아요.

SNS에 소소한 일상 사진도 올라와 있는데, 바닷가에서 친구들과 쓰레기를 줍는다든가 환경문제에 대한 생각을 밝히는 등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습이 멋져 보여요.


제가 엄청난 의식을 갖고 하는 건 아니라서 쑥스러워요. 10여 년 전, 태안 앞바다에 기름이 유출됐을 때 친구들과 봉사를 하러 갔어요. 그 이후로도 종종 바다에 가면 널려 있는 쓰레기를 주워 오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요. 전 해보니까 좋아서 계속하는 거고, 다른 분들은 하셔도 좋고 안 하셔도 좋은 거죠.


데뷔한 지 34년이 흘렀어요. 감회가 어떤가요.


숫자에 전혀 연연하지 않아요. 나이가 많아질수록 연기적으로 어떤 변화나 성과를 얻을 수 있다면 저는 정말 최선을 다해 나이를 먹을 거예요. 그러나 그런 게 아니잖아요. 데뷔한 지 몇 년, 내 나이 그런 건 기사를 통해 ‘그렇구나’ 느끼는 정도지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아요.

사진=영화 '내가 죽던 날' 스틸컷

인터뷰를 보면 유독 자신의 연기에 대해서만큼은 점수를 짜게 주는 것 같아요.


배우들 중에 자기 연기에 만족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걸요. 많은 배우들이 작품을 시작하고 마칠 때 공통적으로 갖는 마음이 있어요. ‘두려움’이죠. 연예인이 예민해서 공황장애에 많이 걸리는 걸까요? 아니에요. 얼마나 힘들고 기묘한 일인지 경험하지 않으면 몰라요. 두려움이 전제되지 않은 현장은 없거든요. 


배우라는 한자의 어원을 보면, ‘배(俳)’ 자는 사람 인(人)에 아닐 비(非)를 쓰고 우(優)는 넉넉하다는 뜻을 갖고 있어요. 직역하자면 사람이 아닌 걸 넉넉하게 잘해야 한다는 뜻인데, 굉장히 모순되는 단어예요. 그걸 해낸다는 건 굉장히 경이롭고 신비롭고 두려운 일이죠.


그래도 연기를 한다는 건 행복한 일이지 않나요.


하나도 즐겁지 않아요. 물론 사람마다 다를 수 있어요. 저의 경우 고통스럽지만 즐기는 태도로 하는 거예요. 연기하는 것은 그 자체로 고통이고, 일을 한다는 그 자체도 힘들기는 해요. 다만 현장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소통하는 것은 즐거울 수 있어요. 이번 영화처럼 서로 공감하는 좋은 배우들을 만날 수도 있죠.


글 정혜연 기자 · 사진제공 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강영호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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