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관계에 지친 직장인들 "모르는 사람과 소통, 더 편해"

조회수 2019. 12. 30. 14:4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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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8일 오후 서울 성동구 한 아파트에 직장인 5명이 모였습니다. 집주인은 간단한 먹을거리를 준비하고 참석자들을 기다렸습니다. 먼저 도착한 이들은 다른 참석자가 도착할 때마다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여느 연말 송년회 풍경과 다를 것 없어 보이는 이 모임은 ‘남의 집 프로젝트’ 였습니다. 참석자 다섯 명은 모두 이날 처음 본 사이였습니다. 

처음 만난 직장인들이 ‘번아웃 증후군’에 대해 얘기하는 모습. 이들은 “기존 인간관계에 한계를 느낀다.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대화하며 색다른 매력을 느낀다”고 했다. 이주호 씨 제공

소통 불능의 시대라는 요즘, 아예 모르는 사람과 소통하려는 일회성 모임이 늘고 있습니다. 상대가 누구든 공감할 의지와 대화거리만 있다면 얼마든지 소통이 가능하다는 게 모임의 취지입니다. 이들은 친구나 지인, 가족처럼 끈끈한 관계와 달리 강제성 없는 느슨한 관계가 오히려 소통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봅니다. ‘남의 집 프로젝트’도 이런 시류를 반영하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 느슨한 관계의 매력


“이제 다 오신 것 같으니 시작할까요?” 집주인이 말문을 열었습니다. 모임 주제는 직장인 번아웃 (일에 몰두하다 극도의 신체·정신적 피로로 무기력해지는 현상) 증후군. 참석자들은 번아웃 증후군 자가 테스트 용지를 들여다보며 각자 점수를 매겼습니다. 일정 점수를 넘겨 심각한 수치를 보인 참석자도 있었습니다. 자연스레 직장에서 힘들었던 경험담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야근이 너무 잦아 일과 생활이 구분이 안 됐다” 

“퇴사를 자주 하고 싶다” 

“상사와의 관계가 너무 힘들다” 

“상사보다 더 어려운 건 후배다” 등 성토가 이어졌습니다. “주변 친구, 가족에게 이유 없이 짜증을 내는 일이 늘었다”는 대목에서는 모두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습니다.


참석자들은 증권회사 애널리스트, 게임회사 디자이너, 식품무역업 종사자 등 다양한 직군 사람들이었습니다. 남의 인생을 이해하기 힘들고 자기 고민 역시 위로 받지 못 할까 봐 걱정했지만 오히려 처음 보는 사람과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 놀라웠다는 반응이었습니다. 


정해진 시간인 세 시간을 조금 넘기고 모임은 종료됐습니다. 참석자들은 서로 작별인사와 새해 덕담을 나누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런 모임은 대개 단발성으로 끝납니다. 후속 모임에 대한 강제성이 전혀 없어 부담감도 적은 게 장점입니다. 직업군, 나이와 상관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며 취미모임과는 달리 대화 자체가 목적입니다.


김성용 ‘남의 집 프로젝트’ 대표는 동아일보에 “현대인들은 모르는 이들과도 얘기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시시콜콜한 주제건 깊이 있는 테마건 상관없다. 이 수요는 더 커질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일회성 소통 모임에 자주 참석한다는 30대 직장인 정모 씨는 “끈끈한 관계에서는 어떤 얘기로 시작하든 결국엔 깔대기처럼 직장, 집, 결혼, 육아 얘기로만 귀결된다. 반면 느슨한 관계에서는 다양한 주제를 다룰 수 있는 매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출처: ⓒGettyImagesBank

● 오글거리는 질문도 ‘생판 남’과 나누면 더 편해

온라인에서 인기인 대화형 커뮤니티 ‘라이프쉐어’도 비슷합니다. 이 커뮤니티는 모르는 이와 소통하며 스스로를 더 잘 이해하고 인생관, 자존감을 발견하자는 목표를 갖고 있습니다. 아는 사람에게 터놓기 힘든 ‘오글거리는’ 질문도 모르는 사람과 주고받아야 합니다.


“당신에게 가장 행복했던 하루는?”

“우리의 사랑은 어떻게 다를까?”


처음에는 민망하다며 망설이던 참가자들도 몇 분 지나면 거리낌 없이 인생 가치관을 말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상담 애플리케이션 ‘트로스트’도 모르는 사람과의 소통 욕구를 겨냥해 만들어졌습니다. 상담사 자격증을 가진 이들에게 간단한 자기소개와 고민글을 보내면 상담사들이 조언해 줍니다. 친구 사이에 해 줄 수 있는 위로나 대안 제시 수준을 넘어 전문적 해결 방법까지 알려준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트로스트 측은 “정신과를 찾기 어렵거나 꺼내놓기 힘든 고민들도 많이 접수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일면식 없는 사람과의 소통이 자존감 회복에 더 도움이 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퇴사 뒤 작가로 변신한 곽모 씨는 “주변에서는 내 새로운 도전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많았지만, 처음 보는 사람들은 도전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응원해 줘 힘을 얻었다”고 말했습니다.


“나이와 직장에 따른 사회적 편견 없이 누군가 있는 그대로 저를 바라봐 줄 때 더 큰 위로와 자극을 받습니다. 뼈 있는 조언이나 생각지도 못 했던 혜안을 만날 때도 많습니다.” (30대 사업가 이주호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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