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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된 파독 근로자들 “가족보다 그리웠던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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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여 년 전, 머나먼 독일 땅에서 밤마다 가족을 그리워하던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이제 노인이 된 그 시절 청춘들은 멋진 바다 풍경이 펼쳐진 남해독일마을에 모여서 살고 있습니다.

출처남해 독일마을. 동아 DB

남해독일마을 아래에 있는 어촌에는 동남아시아인 선원 수십 명이 일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열대야를 피해 캔맥주를 들고 바닷가로 나갔다가 며칠 전 멸치잡이 어선을 타고 어업조사를 할 때 동승했던 선원을 만났습니다. 그는 휴대전화에 저장된 가족사진을 보여주며 밝게 웃었습니다. 쉬는 날에는 인도네시아인 동료들과 고향 음식을 해 먹으며 그리움을 달랜다고 합니다.

윗마을에 사는 파독 근로자들도 50년 전에 그랬습니다. 서독 생활을 이야기해 주던 노인들은 의외의 이야기를 했는데, 세월이 흐를수록 부모형제와 친구들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지고 대신 음식에 대한 향수는 깊어지더랍니다. 독일에서는 한국 음식이, 한국에서는 독일 음식이 간절히 그리워지는 걸로 봐서 혀의 기억은 머리나 가슴의 기억보다 오래가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서독은 1950년대 중반부터 경제 호황으로 노동력이 부족했습니다. 특히 자국인들이 기피하는 업종인 광부와 간호사 인력을 보충하기 위해 외국인 노동자를 받아들였습니다. 파독 광부 첫 모집에 지원자가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1964년 한국 광부들이 지내던 독일 아헨 기숙사. 동아일보 노상우 특파원 촬영

동아일보(1963년 8월 31일자)의 ‘좁은 루르 갱구(坑口)의 길목 광부’라는 옛날 기사 중에는 “경쟁 5 대 1, 20대 태반… 고졸만 50%”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광부 선발 조건은 20~35세 남성으로 1년 이상의 경력자였습니다. 그러나 실제 선발된 인원 중 광부 경력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과거사위원회 조사 결과에 의하면 1963~1966년 전문대를 포함한 대학 졸업자의 파독 비율이 24%였습니다. 당시 평균을 훨씬 웃도는 고학력자들이었습니다.

간호사로서 독일에 간 여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국에서 간호사는 전문직으로 선망받는 직업이었으나 독일에서는 간병인 업무에 가까웠기에 기피 직종이었습니다. 1957~1976년에 걸쳐 여성  1만 명 이상이 독일로 건너갔습니다. 이들은 독일에서 성실함을 인정받아 ‘동양에서 온 연꽃’이란 뜻으로 ‘로투스 블루메(Lotus-Blume)’라 불렸습니다. 취직할 곳이 없어서, 형편이 어려워서, 외국에 대한 동경… 이유는 달랐지만 서독행을 택한 청춘남녀가 1만 8000여 명이었습니다.

독일마을에 거주하는 노인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서독 생활 초기의 고단한 삶, 그리고 독일과 독일인에 대한 좋은 추억입니다. 이야기를 들으면 아랫마을의 외국인 선원들을 떠올렸습니다. 그들도 고국으로 돌아가 한국을 그리워하고, 한국은 멋진 나라였다고 가족들에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원문: 동아일보 <파독 근로자와 외국인 선원[김창일의 갯마을 탐구](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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