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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영화를 찍느니 차라리 배우를 그만두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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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최고 인기 배우로 활동하면서도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예술로써 항일 독립투쟁에 나선 영화배우.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이자 한국 영화사 100년을 맞은 올해, 한국과 중국 학계에서 항일 예술인에 대한 조명을 새롭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특히 주목을 끈 것은 영화 황제 ‘김염’에 대한 연구입니다.


상하이에서 활동했던 유명 배우와 시인, 음악가 등이 잠들어 있는, 문화예술인을 위한 추모공원 푸서우위안(福壽園)에는 아들 김첩과 함께 묻혀 있는 배우 김염(1910∼1983)의 비석이 있습니다.

1930년대 중국에서 ‘영화 황제’라고 불릴 정도로 큰 인기를 누린 김염은 수십 편의 항일 영화에 출연하며 예술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출처한재은 단국대 초빙교수 제공

그는 1930년대 중국 최고의 인기 배우이자 일제의 침략에 맞서 영화로 독립운동을 펼친 인물입니다.


24일 중국 상하이 푸단(復旦)대에서 열린 한중 공동 학술대회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중국 상하이’에서 한재은 단국대 초빙교수는 “‘영화 황제’ 김염의 항일 영화인 형상”이라는 논문을 공개하며 “중국의 최고 인기 배우로 활동하면서도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예술로써 항일 독립투쟁에 나선 김염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실제 그의 비석에는 비석에는 “조선인 출신인 그는 영화 황제(映畵 皇帝)로 불렸다”는 문구가 쓰여 있습니다.

1910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염의 집안은 독립운동가로 가득합니다. 


아버지 김필순(1878∼1919)은 1908년 제중원의학교 1회 졸업생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의사입니다. 구한말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의 주요 인물이었던 그는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이후 고향을 떠나 만주에서 독립군 주치의로 활동하며 의술로 독립운동을 펼치다 1919년 의문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를 여읜 김염은 중국 상하이로 이동해 고모부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무총장 등을 지낸 김규식(1881∼1950)에게 의탁하게 됩니다.

김염은 1928년 우연히 단역에 발탁되면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처음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이듬해 쑨위(孫瑜) 감독의 눈에 띄면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죠. 


1929년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풍류검객’이 기록적인 흥행을 거두면서 일약 대스타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때부터 10여 년간 중국 영화계를 호령한 그는 1933년 영화 전문 신문사인 ‘전성일보’에서 진행한 인기투표에서 남자 배우 1위를 차지하며 ‘영화 황제’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단순한 ‘인기 배우’의 삶은 아니었습니다. 1932년 상하이 사변을 일으키며 대륙 침략을 노골화한 일제는 당시 상하이의 대스타 김염에게 친일 영화에 출연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일제의 요청을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영화를 찍지 않을지언정 아무 의미 없는 반진보적인 영화를 찍어 관중에게 해독이 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

이후 그는 일제에 맞서는 내용을 담은 영화 ‘들장미(野매괴)’, ‘대로(大路)’ 등에 출연하며 영화로 독립운동을 펼쳐갔다고 해요.

한 교수는 “1945년 광복 이후에도 중국에 남은 그는 중국 정부로부터 ‘국가 1급 배우’로 선정되는 등 한국 출신 항일 배우로서의 삶을 이어갔다”고 설명했습니다. 

※ 이 기사는 동아일보 유원모 기자의 <항일배우 김염 “친일 영화를 찍느니 차라리 영화를 그만두겠소”> 기사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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