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5번 방문해 위안부 피해자 만나고 온 작가

조회수 2018. 12. 29. 13:4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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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240명. 지난 12월 14일 이귀녀 할머니가 별세하면서 생존자는 25명으로 줄었다. 


이 240명을 제외하고도 한반도에는 또 다른 위안부 피해자가 존재한다. 바로 북한의 위안부 피해자이다. 재일동포인 김영 작가(59)는 이들의 기억을 기록하는 일을 하고 있다.


김 작가는 지난 11월 북한 위안부 피해자의 실태를 알리는 세미나에 섰다. 임신을 하자 태아를 꺼낸 뒤 임신하지 않도록 자궁을 들어내는 수술을 받았다고 고백한 리경생 할머니, 팔에 문신을 새기려는 군인에게 저항하다가 총으로 눈을 맞아 왼쪽 눈을 실명한 김도연 할머니의 사연도 공개했다.

출처: 뉴스1

그가 실제로 만난 북한 위안부 피해자는 4명(김영숙, 리계월, 리상옥, 박영심 할머니)이다. 


김 작가는 2003년부터 2018년까지 총 다섯 차례 방북해 위안부 실상을 조사해왔다. 발표 일정을 모두 마친 그를 서울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부근에서 늦은 밤에 만났다.


북한 위안부에 대한 조사는 어떻게 시작했나요.


대학을 졸업한 후 선배와 요코하마에 사는 재일동포 여성들을 5년 동안 취재해 ‘바다를 건넌 조선인 해녀’라는 책을 펴냈어요. 이런 경험이 있어선지 위안부도 조사해보라는 권유를 받았죠. 제가 국적이 조선적(광복 후 일본 정부가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동포에게 부여한 외국인 등록상 명칭. 1965년 한일협정 체결 후 조선적인 재일동포들은 한국 또는 일본 국적을 취득했는데, 일부는 조선적을 유지함)이라 북한에 쉽게 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법정을 준비하는 재일동포 중 조선적 국적자는 저밖에 없었죠.  

북한에 들어가 조사하는 것이 수월했나요.


글쎄요. 2000년 법정 증언을 준비하기에 앞서 7명이 위안부 피해자의 실태를 알기 위해 방북 조사를 신청했는데 북한 정부는 일본인 6명의 방북을 허용하고, 저의 신청은 거절했어요. 지금은 상황이 바뀌어 북한에서 조선적인 저만 오라고 합니다.


2000년 법정 당시 박영심 할머니의 기소장을 만드셨다고요.


저는 일본분들이 북에서 촬영해온 박영심 할머니의 증언 영상을 보면서 피해 사실을 정리했죠. 기소장 문구는 북측 분들과 상의하면서 조금 다듬었고요.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신뢰가 쌓인 것 같습니다.


조사 초기 도요타재단이 연구비를 지원한 것은 좀 의외예요.


도요타재단이 2002년부터 2007년까지 ‘군대와 성폭력’ 연구비를 지원했어요. 그걸로 2003년과 2005년 방북 조사 비용을 충당했죠. 이후로는 일본 기업에서 이런 연구를 지원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세 번째 방북 조사 때부터는 자비를 들였어요. 방북할 때마다 북한에 7박 8일씩 머무르는데 매번 30만~40만 엔(약 300~400만원)을 썼지요. 생업이 있으니 비용 마련이 어렵진 않았어요.

현재 병원으로 사용되는 방진 위안소.

북한 위안소는 어떤 형식으로 운영됐나요.


군이 배치된 곳에 위안소가 있었어요. 지금까지 알려진 곳으로 함경북도 방진 위안소와 경흥 위안소가 있는데, 방진 위안소는 현재 병원으로 사용 중입니다. 올해 경흥 위안소 터에 다녀왔는데 경흥은 일본군 국경수비대가 주둔했던 곳입니다. 북한 주민에 따르면 이곳에는 10대 후반의 여성들이 있었고 방마다 여자 사진이 붙어있었다고 합니다.


북한 위안부의 상황은 어떤가요. 


북한은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도 위안부 할머니에 대해서는 우선 배급을 하고, 의료지원을 해줬어요. 북한 정부에 위안부 219명이 피해 사실을 신고했는데 그중에 공개 증언자는 52명에 불과하고 그마저도 다 돌아가셔서 현재로서는 증언을 듣기 어렵습니다.


북한 위안부 할머니들은 남한 할머니들에 비해서 피해 사실을 공감해줄 사람을 만날 기회가 적은데 바로 이 점이 남과 북의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또 북한 위안부는 남한 위안부와 마찬가지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꾐에 넘어가 위안부가 된 경우가 많은데요. 북한 정부는 이 할머니들이 납치, 유괴와 같은 극악무도한 방법으로 위안부가 됐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러니 그와 다른 방식으로 위안부가 된 할머니들은 피해 사실을 증언하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북한의 위안부 조사 상황은 어떤가요.


열악해요. 북한 위안부 증언은 조대위가 출간한 책 ‘짓밟힌 인생의 외침’에 40명의 피해 사례가 적혀 있고, 노동신문 등에 12명의 피해 사실이 기록돼 있을 뿐이죠.


북한 위안부를 조사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부담스럽지 않았나요.


별로 부담되지 않았는데 이번에 한국에 와서 기자님들이 저를 열심히 인터뷰하는 모습을 보면서 성과를 내야 한다는 부담을 느꼈어요(웃음). 


그동안 북한 위안부 선행 연구가 너무 부족해 연구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북한에 갈 때마다 ‘이번 방북이 마지막이겠구나’ 생각했는데, 관련 증언이나 자료가 나오면 마음이 바뀌어서 또 갔어요. 이 문제를 기억해 정리하는 작업은 계속 이어가고 싶습니다.


이 글은 여성동아 '북한 위안부 기록자 재일교포 김영, 또 다른 절반의 이야기' 기사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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