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400명 '우울증 상담사'로 훈련시킨 짐바브웨 의사

조회수 2018. 10. 19. 19: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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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나 어(語)로 우울증은 '생각이 너무 많다'는 뜻"

아프리카 정신건강연구소(AMARI·African Mental Health Research Initiative) 대표 딕슨 치반다(Dixon Chibanda)씨는 짐바브웨 수도 하라레에서 정신과 의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2006년부터 지금까지 400명이 넘는 할머니들을 심리상담사로 훈련시키고 누구든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우정 벤치’ 프로그램을 마련해 국민들의 정신건강에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최근 영국 BBC는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려 십수 년 째 노력 중인 치반다 씨의 행보를 조명했습니다.

출처: 2017년 11월 TED 강연 중인 딕슨 치반다 씨. 사진=TED

치반다 씨가 뛰어들기 전까지 짐바브웨 공공의료 분야에서 정신건강은 덜 중요한 분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후천성면역결핍증(에이즈)과 싸우는 데만도 일손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수십 년에 걸친 내전과 대학살 등 아픈 역사 때문에 모든 세대가 심리적 문제를 갖고 있었지만 당장 생명을 위협하는 HIV바이러스에 대처하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치반다 씨는 ‘이런 상황일수록 정신 건강을 챙겨야 한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가 이런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은 체코에서 유학하던 시절의 경험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아직 학생이었던 시절 치반다 씨는 정신과가 아니라 피부과나 소아과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체코 유학 시절 친구의 자살 사건을 접하고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언제나 활기찼던 친구가 사실은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그는 깊이 고민하다 진로를 변경했습니다.

2005년 무가베 독재정권이 강행한 '무람바츠비나 작전'으로 70만 명에 달하는 빈민들이 지낼 곳을 잃었다. 사진=유튜브 캡처

고국에 돌아와 정신과 의사가 되었지만 치반다 씨가 진정으로 우울증의 심각성을 실감하게 된 것은 2005년 이후였습니다. 1987년부터 2017년까지 장기 집권한 독재자 무가베는 2005년 무람바츠비나 작전(Operation Murambatsvina·오물제거 작전)을 지시해 빈민가의 무허가 건축물을 강제 철거하고 사람들을 내쫓았습니다. 이 작전으로 70만 여 명이 하루아침에 집을 잃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나날이 분노와 고통, 우울, 절망이 자리잡고 이로 인한 사회문제가 급증하자 치반다 씨는 정신과 의사로서 뭐라도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담당하던 우울증 환자의 사망 소식도 그를 더 조급하게 만들었습니다. 환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 치반다 씨는 “진작 (환자를) 내게 데려왔어야 했다”며 그의 어머니를 책망했지만 돌아온 답변에 할 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병원까지 갈 차비가 없었어요.”


정신과 진료를 보는 병원이 많지 않다 보니 극빈층은 타 지역에 있는 전문의를 한 번 보러 가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치반다 씨는 고심 끝에 ‘병원이 환자를 찾아갈 수 없으니 상담자가 환자를 찾아가게 하자’는 아이디어를 떠올렸습니다.

출처: friendshipbenchzimbabwe.org

● 우울증 환자들 아군 되어주는 ‘짐바브웨 할머니 군단’


“인구 1600만인 짐바브웨에 정신과 의사는 12명밖에 없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의 다른 나라들도 사정은 비슷해요. 아예 정신과 의사가 단 한 명도 없는 나라도 있어요.”


지역 봉사자들의 힘을 빌리기로 결정한 치반다 씨는 동네 할머니 자원봉사자들에게 심리상담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치반다 씨도 자기 일에 대해 반신반의했다고 합니다. 할머니들은 정신건강에 관한 전문적 지식이 아예 없다시피 했으며 학교 교육도 거의 받지 못 한 이들이 대다수였습니다. “할머니들에게 뭘 맡기려고 하느냐”는 주변 동료들의 우려에 잘 될 거라고 말은 했지만 내심 불안한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들은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치반다 씨는 전문용어를 써 가며 상담기법을 교육했지만 할머니들은 “마음이 힘든 사람들에게 진짜 필요한 건 부모 입장에서 건네는 따뜻한 말 한 마디”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치반다 씨와 할머니들은 의논을 거듭한 끝에 쇼나 부족(짐바브웨 인구의 70%를 차지하는 부족)의 전통적 사고방식을 상담에 접목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우울증은 쇼나 어로 ‘kufungisisa’ 라고 하는데,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병’이라는 뜻입니다. 봉사팀은 우울증 환자들이 ‘우정 벤치’에 앉아 복잡한 생각을 내려놓고 할머니와 함께 대화하는 시간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출처: friendshipbenchzimbabwe.org

우정 벤치 프로그램에 십 년 넘게 참여 중인 봉사자 루도 친호이(Rudo Chinhoyi·72) 할머니는 “우울해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줄어들었으면 하는 마음에 계속 이 일을 하고 있죠”라고 말했습니다.


친호이 할머니는 그 동안 HIV감염자, 약물 중독자, 가난과 배고픔에 시달리는 극빈자, 불행한 결혼생활로 고통 받는 부부, 독거노인, 미혼모 등 수많은 취약계층 사람들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할머니는 상담을 통해 범죄를 막은 적도 있습니다.


“아내가 집주인 남자와 바람이 났다며 둘 다 없애버리고 싶다던 남편이 있었어요. 그 사람과 벤치에 앉아 얘기를 나누며 ‘당신이 그들을 죽이고 감옥에 가면 아이들은 어떡하나. 죄를 저지를 만 한 가치가 없는 일이다’라며 설득했죠. 결국 그 남자는 화를 누르고 아내와 이혼했고 지금은 새 부인을 맞아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답니다.”

출처: friendshipbenchzimbabwe.org

놀라운 점은 또 있었습니다. 상담해 주는 입장인 할머니들에게도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제각기 힘든 삶을 살아 온 할머니들은 크든 작든 정신적 괴로움을 안고 있었는데, 남을 위로하고 돌보는 과정을 통해 스트레스가 낮아지고 자신감이 향상되는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치반다 씨와 할머니들이 만든 우정의 벤치는 국경도 넘었습니다. 말라위와 잔지바르에도 우정 벤치가 생겼고 바다 건너 미국 뉴욕에도 예쁜 오렌지색 벤치가 마련됐습니다. 할머니뿐만 아니라 성별을 불문하고 다양한 연령대의 봉사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영국 유행병학자 빅토리아 심스(Victoria Simms) 씨는 “우정 벤치 프로그램은 저소득국가들에만 유용한 해결책이 아닙니다. 뉴욕에는 인구 6000명 당 한 명의 정신과 의사가 있을 정도로 의료 시스템이 잘 돼 있지만 그것만으론 우울증 문제를 해결하기 힘듭니다”라며 전 세계 모든 나라가 우정 벤치 프로그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평했습니다.


이예리 기자 celsett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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