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을 것 귀했던 조선시대, 채소는 흔했을까?

조회수 2018. 9. 5. 11: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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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랫동안 민간에 있으면서 보니, 농가에서는 채소를 전혀 심지 않아 파 한 포기, 부추 한 단도 사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정약용, 목민심서

먹을 것이 귀했던 조선시대에도 채소 정도는 실컷 먹었을 거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농부들은 채소 농사를 잘 짓지 않았는데요. 벼농사 때문에 채소를 심을 땅도 없고 키울 겨를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채소 심을 땅이 있으면 그 자리에 곡식을 심는 게 낫고, 벼농사와 채소농사를 병행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한양 도성 내에서는 원칙적으로 농사가 금지돼 있었습니다. 한양 근처 산들은 마구잡이 벌채 때문에 민둥산이 되어 산나물을 찾아보기도 힘들었습니다. 한양 사람들이 먹는 채소는 모두 근교 채소밭에서 재배한 것이었습니다. 한양뿐만 아니라 큰 고을 주변에는 늘 채소밭이 있었습니다.

신윤복, ‘여속도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채소를 도성 안으로 들여와 파는 사람들은 행상 또는 채소전(菜蔬廛) 주인들이었습니다. 채소전은 한양 시전 가운데 여성이 운영권을 갖고 있는 몇 안 되는 가게 중 하나였으며, 채소 행상들도 대부분 여성이었습니다.


벼농사 위주였던 조선 시대 채소값은 결코 싸지 않았습니다. 조선 후기 국가조달물자 가격을 기록한 ‘물료가치성책’을 보면 배추 한 근 가격은 쌀 두 말, 파 한 단은 쌀 한 되, 상추 한 단은 쌀 다섯 홉입니다. 농사기술이 발달한 지금처럼 크고 좋은 것도 아니었을 테니 귀한 음식이었던 셈입니다.


조선 초기에 이미 온실을 만들어 겨울에도 채소를 재배할 수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일반 농민들은 엄두조차 내기 어려웠습니다. 채소가 워낙 귀하다 보니 염장이나 건조 기술도 그리 발달하지 못 했습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유수원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 보관하는 채소는 무김치가 고작이다. 산나물은 산골 사람 외에는 보관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했습니다.

출처: 동아일보DB
조선시대 초기만 해도 김치는 왕가나 상류층만 먹는 최고급 요리였다. 하지만 그 탁월한 맛 때문에 수요와 공급이 늘어나며 가격이 하락해 점차 대중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이렇듯 귀한 채소였지만 조선시대 사람들도 채식이 건강에 좋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조선 후기 안산에 살던 유덕상은 만년에 채식을 하게 되었다는 뜻에서 호를 만채(晩菜)라고 지을 정도로 열정적인 채식주의자였습니다. 


그의 친구이자 같은 채식주의자 이용휴는 유덕상을 위해 글을 지어 주기도 했습니다. 


“동물을 도살하면 피와 살점이 낭자하다. 먹고 싶은 마음을 조금 참고 어진 마음을 베풀면 안 되겠는가. 고기를 먹어 오장육부에서 비린내와 썩은내가 나는 사람과 채소를 먹어 향기가 나는 사람은 차이가 크다. 나 역시 아침저녁으로 채소 한 접시만 먹고 있다. (이용휴의 ‘만채재기(晩菜齋記)’ 중)” 


수요를 간파하고 채소 농사를 지어 살림을 넉넉하게 꾸린 이도 있었습니다. 개성 사람 김사묵은 선죽교 옆에 채소밭을 일궈 먹고 남는 것은 내다 팔았는데 채소가 귀해 잘 팔렸다고 합니다. 채소 판 돈으로 쌀과 고기를 사서 온 식구가 먹고 살았다고 하니 제법 괜찮은 장사였나 봅니다.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책임연구원



※ 이 기사는 동아일보 <[조선의 잡史]여성이 운영권 가졌던 ‘채소전’>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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