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하나 팔아서 떼부자 될 수 있었을까? [조선 잡史]

조회수 2018. 7. 21. 10: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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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보화만큼 귀한 조미료, 소금. 20세기 이전 사람들은 소금을 ‘백색 황금’이라 불렀다. 그보다 과거에는 소금을 화폐처럼 사용하기도 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소금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도 잇따랐다. 그만큼 소금이 인류에게 귀한 물품이었다는 증거다.

조선시대에도 예로부터 소금은 매우 중요한 생활필수품이었습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한반도에서도 제주도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의 바닷가에서 소금을 생산했다고 합니다.


과거엔 소금을 생산하는 곳을 염소(鹽所) 염장(鹽場) 염전(鹽田)이라 했고, 생산자를 염한(鹽漢) 염간(鹽干) 염정(鹽丁) 염부(鹽夫)라 불렀습니다.


관청에 속한 염부는 염장관(鹽場官)의 관리하에 소금을 생산하고 그 판매 수입으로 생활했습니다. 민간업자도 비교적 자유롭게 소금을 생산할 수 있었고요. 그리고 이렇게 생산된 소금을 운송하여 판매하는 사람들을 염상(鹽商)이라고 했습니다.

출처: 프랑스 국립기메박물관
김준근, ‘소금장수’

조선 후기에 소금 방문판매업자로서 염상의 활동은 매우 활발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서울만 하더라도 도성 안에 있었던 내염전, 용산염전, 마포염전, 이현에 있었던 경염전 등 4곳이 있었으며 소금 상인 중에는 거상이 많았다고 합니다. 한양에 유통된 소금이 무려 수십만 섬 이상으로 추정되고, 주로 생산지에서 선박을 이용하여 한양으로 운송하고 염상에 의해 민간에 판매된 것으로 연구되고 있습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염전.

이러한 염상들의 활동은 구비문학과 야담 등에 그대로 수용되어 나타나기도 하는데요. 노명흠(1713∼1775)의 ‘동패낙송’에 실려 있는 ‘염상으로 부자가 된 김 서방 이야기’가 가장 대표적입니다.

“소금을 짊어지고 돌아다니며 외상으로 판매해 단골을 만든 김 서방은 3년이 지나자 3000냥을 벌었다. 다시 3년이 흐르자 김 서방은 부자가 됐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는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소금은 인삼이나 담배처럼 이득이 많이 남는 상품은 아니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생필품입니다. 따라서 염상은 많은 자본이 필요 없었고, 신체가 건강하고 성실하기만 하면 판로를 확대할 수 있었죠. 이 같은 이유로 서민들이 직업으로 삼기 충분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 이 기사는 강문종 제주대 교수가 쓴 동아일보 <[조선의 잡史]<58>소금장수 ‘염상’은 큰돈을 벌었나>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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