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이색 직업­, 호랑이 잡는 '착호갑사'

조회수 2018. 7. 11. 07: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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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환(虎患)이 가장 무서운 재앙 중 하나로 여겨지던 조선시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고 돈도 버는 직업이 있었으니, 바로 착호갑사(捉虎甲士)다.

과거 한반도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호랑이 사냥터였다. 고려때는 원나라에서 호랑이 전문 사냥꾼인 착호인(捉虎人)을 보내 호랑이를 사냥했을 정도였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조선시대에도 최상위 맹수 호랑이는 조정의 큰 걱정거리였다. 호랑이는 한양 도성 안에도 출몰했고, 마을 인근에 서식하며 사람을 물어 죽였다. ‘어우야담’을 남긴 유몽인은 호랑이를 통해 사회를 비판하는 내용의 ‘호정문(虎穽文)’에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호환을 묘사했다.


호환을 막기 위해 조정이 시행한 정책 중 하나가 바로 착호갑사(捉虎甲士)와 착호인이었다. 착호갑사는 말 그대로 호랑이 잡는 특수 부대였다. 착호갑사는 서울, 착호인은 지방에서 호환을 방비했다.


착호갑사는 1416년 임시 조직으로 편성됐고, 이후 정식 부대가 됐다. 1421년에는 40명에 불과했지만 세조 때는 200명으로 크게 늘었다. 성종 때 완성한 법전 ‘경국대전’은 ‘착호갑사’ 수를 440명으로 명시했다.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현존하는 조선시대 최대 호랑이 그림.

착호갑사가 되려면 180보 밖에서 목궁을 한 발 이상 명중시켜야 했고 두 손에 각각 50근(30kg)을 들고 100보 이상을 한 번에 가야 했다.


착호갑사는 다른 부대와 마찬가지로 활과 창으로 무장했다. 차이가 있다면, 일반 부대는 휴대가 용이한 각궁을 썼으나, 착호갑사는 쇠뇌나 목궁을 썼다. 쇠뇌와 목궁은 무겁고 컸으나 강력한 대전(大箭)을 쏠 수 있어 호랑이 같은 덩치 큰 맹수를 상대하기에 알맞았다. ‘국조오례의서설’에 따르면 대전은 길이가 5척 7촌 5분, 현재 도량형으로 환산해 160∼170cm에 달했다. 호랑이를 추적해 먼저 대전을 쏜 후 창으로 급소를 찔렀다.


호랑이 가죽은 비싼 사치품이었다. 1744년(영조 20년)에 간행한 ‘속대전’에서 면포 1필 가격은 2냥으로 책정되었다. 대짜 호랑이 가죽 한 장은 보통 100냥 정도였고 이는 서울의 초가집 한 채와 맞먹는 액수였다.  


하지만 포상이 아무리 무거워도 목숨보다 더할 수 없다. 착호갑사는 나라의 안위를 지키고 백성을 돌본다는 사명감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사명감이야말로 착호갑사가 목숨을 걸고 호랑이와 마주했던 이유였다.


홍현성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 이 기사는 동아일보 <[조선의 잡史]<57>호랑이 잡는 특공대 ‘착호갑사’> 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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