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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을 고쳐주는 남자, 피규어 수리 전문가 안경섭 씨

조회수 2018. 5. 26. 10: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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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규어 계의 이국종 교수’.


안경섭 씨의 솜씨를 본 네티즌들이 붙여 준 별명입니다. ‘곰나으리’라는 정겨운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안 씨는 파손된 피규어를 감쪽같이 복원하는 피규어 수리 전문가입니다.

출처: 안경섭 씨 블로그

만화, 게임, 영화 등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입체 형상으로 구현한 피규어나 스테츄(statue)는 섬세하게 만들어져 있어 파손되기 쉬우며 한 번 파손되면 원상복구하기도 까다롭습니다. 웬만한 손재주가 아니고서는 부러지거나 칠이 벗겨진 부분을 완벽하게 수리하기 어렵습니다.


애정으로 수집한 피규어가 망가져 상심한 사람들의 ‘SOS’신호를 받아 주는 안경섭 씨. 그는 “남을 돕는 게 좋아서 이 일을 계속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공방에서 작업 중인 안경섭 씨

- 보통 피규어 관련된 일을 한다고 하면 ‘덕업일치’가 아닐까 하는 인식이 있는데요. 피규어 마니아가 아니시라고 들었습니다.


네, 지금은 거의 피규어 수리 쪽으로 전업한 셈이지만 원래는 영상 일을 했습니다. 취미로는 피규어보단 직접 조립할 수 있는 프라모델을 더 좋아하는 편이에요. 


스탑모션 애니메이션 편집 일을 하다가 영상에 쓰이던 소품 도색을 맡았는데, 그걸 보고 아는 분이 자기 피규어가 파손됐는데 고쳐줄 수 있겠냐고 물어보셔서 수리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 파손된 부분을 감쪽같이 고칠 뿐만 아니라, 고친 게 원본보다 더 낫다는 평도 있던데요. 아예 유실된 부분을 만들어서 붙인다거나 이미 칠해져 있는 도료와 거의 똑 같은 색깔을 만들어서 칠하시는데 비법이 있나요. 그냥 감으로 하시는 건가요.


원본보다 낫다는 칭찬은 과분하고요. 눈으로 보고 대강 가늠해서 감으로 합니다. 색 조합 같은 것도 딱 봐서 ‘이 색은 무슨무슨 색을 섞으면 나오겠다’싶으면 그렇게 조색해서 바르죠. 원래 칠해져 있는 색과 잘 어우러지게 펴 바르면 더 자연스럽습니다. 아주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좀 티가 날 수도 있지만요.

다양한 작업도구로 가득한 공방

- 지금이야 달인이 되셨지만 처음 수리 시작하셨을 때 걱정되거나 부담스럽지는 않으셨나요. 


물론 부담이 됐죠. 그런데 ‘이미 부서진 거니까 완벽하게 원상복구는 안 될 수도 있어요’라고 확인 받고 시작했더니 좀 편했습니다. 


사실 지금도 미세하게 갈라졌다거나 색이 살짝 벗겨진 것들보다는 아예 와장창 부서진 걸 복구하는 게 심적으로 부담이 덜 됩니다. 아주 약간 문제가 생긴 건 그만큼 섬세하게 고쳐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어요.

출처: 안경섭 씨 블로그
완전히 부러진 다리도...
출처: 안경섭 씨 블로그
복원 성공!

- 망가진 피규어를 고쳐달라고 들고 오는 분들 사연도 가지각색일 것 같아요.


피규어가 망가졌다고 하면 명절에 친척 아이가 억지로 갖고 놀다 망가뜨렸다거나 하는 경우를 많이들 연상하시는 것 같은데, 생각보다 그런 사연은 거의 없어요.


보통은 ‘피규어를 샀는데 배송 도중 어디가 부러져서 왔어요’라거나 ‘진열장에 올려놨는데 고양이가 툭 쳐서 떨어뜨렸어요’같은 게 많습니다. 고양이가 사고를 많이 칩니다(웃음). 배송 도중 파손 사고는 판매자가 충격방지 포장을 꼼꼼하게 안 해서 생기는 경우가 많아요.


기억에 남는 분이 한 분 있는데 대학원생이었어요. 어머니가 방을 청소해 주시다가 실수로 피규어를 떨어뜨리셨다고 하더라고요. 이 분은 아끼던 수집품이 망가진 걸 보고 그만 순간적으로 버럭 화를 냈는데, 그게 너무 마음에 걸렸다는 거예요.


부러진 채 놓여 있는 피규어를 볼 때마다 어머니께 화 냈던 자기 모습이 떠올라서 부끄럽고 괴로우셨다 하더라고요. 피규어가 말끔하게 고쳐지면 자기 마음도 좀 가벼워질 것 같다면서… 그렇게 정성껏 써 내려간 장문의 메일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게 기억에 남네요. 



- 피규어 수리나 도색을 배워보고 싶다는 사람은 없나요.


있습니다. 지금도 학생이나 직장인 분들 대상으로 주말마다 공방에서 같이 작업하기도 하고 알려드리기도 해요. 사실 예전에 이 일을 전문적으로 배워보고 싶다면서 온 분도 있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힘들었는지 한 달을 못 채우고 자취를 감추시더라고요.


이렇게 공방에서 친한 사람들끼리 피규어 수리한다고 하면(이 날 공방에는 같이 작업하는 류재민 씨, 전진홍 씨가 같이 있었다) 되게 느긋하게, 즐겁게 농담하면서 재미있게 놀듯이 일할 거라는 인식을 가진 분들이 있나봐요. 전혀 아닙니다. 몇 시간 동안 묵묵히 사포질만 하기도 하고요. 마냥 재미있는 일은 전혀 아니에요.


또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재능이 없으면 실력이 빨리 늘지 않아요. 쉬울 거라고 생각하고 접근했다가 실망하시는 분들도 있죠. 미대를 나온 분이나 원래 센스가 좋은 분들은 빨리 배우시지만, 어디를 어떻게 해야 깔끔하게 고쳐지겠구나 하는 건 경험이 쌓여야 알 수 있습니다. 반복작업 할 수 있는 끈기도 정말 중요하고요.

출처: 안경섭 씨 블로그
수리 중인 피규어

- 수리 달인이신데, 피규어를 처음부터 직접 만들거나 리페인팅 생각을 해 보신 적은 없는지.


직접 만들거나 실사처럼 리페인팅하는 것보단 다른 게 더 좋아서요. 실사처럼 리페인팅하는 전문가 분도 계신데, 저는 그보다는 일러스트 같은 느낌으로 작업하는 걸 좋아해요. 


보통 수리 들어오는 게 한 달에 20개 정도인데 간단한 것도 있지만 며칠, 몇 주씩 걸리는 것도 있어서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이 친구(류재민 씨)가 도와주고 있는 용 꼬리도 며칠째 붙잡고 있어요. 좀 여유가 생기면 개인작업을 하고 싶습니다.

출처: 안경섭 씨 블로그

- 일하면서 어떤 부분이 제일 힘드신가요.


아무래도 작업 자체보다는 사람 대하는 게 힘든 것 같아요. 소위 갑질이라고 해야 하나, 예의 없게 말하는 분들도 있거든요.


시도 때도 없이 재촉한다거나 무작정 ‘돈이 없다’면서 터무니없을 정도로 수리비를 깎아 달라고 하는 분도 있죠. 한참 작업에 집중하고 있는데 대뜸 전화하더니 제대로 인사도 없이 자기 궁금한 것만 물어보고 뚝 끊는 분도 있어요. 그럴 땐 아무래도 스트레스를 받죠. 



- 그렇다면 언제 보람을 느끼시나요.


간절한 마음으로 수리 부탁하셨던 분들이 복구된 걸 보고 너무 좋아하시면서 감동하는 모습을 볼 때요. ‘와, 이게 이렇게 고쳐졌나요?’라면서 신기해 하시고, 고맙다고 하시는 걸 보면 뿌듯합니다. 또 제가 봐도 심각한 상태였던 걸 깔끔하게 고쳐냈을 때 성취감도 있고요.


신작이나 구하기 힘든 것들을 가까이에서 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비록 전체를 다 볼 수 있는 기회는 많이 없고 조각난 토막을 봐야 하지만요. 배송 중에 또 부서질 우려도 있고, 배송비나 부피문제도 있고 해서 고쳐야 될 조각만 받는 경우가 많거든요.

남을 돕는 데 재미를 느껴 수리를 계속하고 있다는 안경섭 씨. 그는 “한 번은 방송프로그램에서 문의전화 온 적도 있었어요. 제가 돈을 엄청나게 많이 버는 줄 아셨나 봐요. 월 수입을 대충 알려드리니 어색하게 통화가 끝났죠”라며 쾌활하게 웃었습니다.


“돈도 좋지만 그보다는 스스로 즐길 수 있는 선에서 의뢰를 받고, 도움이 필요한 분들을 도와준다는 생각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스트레스 없이 가능한 한 즐겁게 일하고 싶어요.” 



이예리 기자 celsett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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