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 나가면 돈만 들지"..'집돌이'의 하루

조회수 2018. 4. 17. 08: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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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 밖은 위험해

“이불 밖은 위험해!” 이 말은 이제 유행어로 완전히 자리 잡았다. MBC가 지난해 방영한 3부작 파일럿 프로그램의 제목이었다. 당시 출연진은 배우 이상우, 워너원 강다니엘, EXO 시우민(김민석), 하이라이트 용준형, 박재정 등이었다.

출처: [사진 제공=하이트 진로, MBC]
워너원 강다니엘의 무대 위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왼쪽)과 MBC 예능프로그램 ‘이불 밖은 위험해’에서 보여준 수더분한 모습. {강다니엘}

이들은 ‘집돌이’로 꼽히는 대표적 연예인이다. 강다니엘과 시우민은 차진 ‘케미’로 화제를 모았다. 이들 집돌이가 집 안에서 시간을 보내며 행복해할 때마다 이들이 먹고 즐긴 것들이 인터넷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상위에 올랐다. 

출처: [사진 제공=MBC]
'이불 밖은 위험해'에서 활약하는 EXO 시우민. {시우민}

이후 ‘이불 밖은 위험해’는 정규 편성돼 4월 5일 첫 회가 방영됐다. 강다니엘과 시우민만 그대로 출연하고 나머지 멤버는 다 바뀌었다. MBC 측은 “강다니엘은 먼저 출연 의사를 밝혀왔다”고 전했다. 방송에서 뽐낸, 이불 속에서 만화책 보며 젤리를 먹다 잠이 들 때 제일 행복해하던 집돌이 포스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닌 셈이다. 


첫 방송에서 뒤늦게 아무도 없는 숙소에 도착한 강다니엘은 “너무 배고프다”며 계속 혼잣말을 했다. 이후에는 “사람이 밥을 먹어야 힘이 생긴다”고 혼잣말한 뒤 주방에서 짜장라면 2개를 끓여 먹었다. 그다음에는 연신 젤리를 까 먹으며 ‘폭풍 먹방’을 선보였다. 

흔한 집돌이의 일상.

집돌이와 집순이에게 ‘혼밥’ ‘혼잣말’은 익숙하다. 이불 밖이 위험해 이불 속, 집 안에서 노는 사람을 집돌이, 집순이 또는 ‘방콕족’ ‘홈(Home)족’이라고 부른다. ‘집돌이·집순이들은 100% 공감한다는 순간’ 등의 글과 웹툰은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올 때마다 매번 큰 공감을 얻었다. 


조금씩 디테일은 다르지만 대략 공통된 내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집 밖으로 나오는 것은 모두 스케줄이다 △밖에 나온 김에 미뤄놨던 일을 모두 처리한다 △집에 있어도 세상에서 제일 바쁘다 △한 번 외출하고 돌아오면 한동안은 ‘방콕’(방에 콕 박혀 있다는 뜻의 조어)한다 등. 


이 내용에 전적으로 공감한다는 자타공인 30대 집돌이에게 물었다. 왜 쉬는 날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느냐고.


나가면 돈 쓸 일만 생기잖아요. 일할 때 아니면 굳이 나갈 필요성을 못 느껴요. 집에 플레이스테이션 들여놓고, 넷플릭스 유료 결제해놓고, 커피머신까지 갖춰놓으니 정말로 나갈 일이 없네요.(웃음)”


집에서 ‘방콕’하며 여가시간을 즐기는 이가 늘어나자 마케팅업계도 이들의 소비 방식에 주목하고 있다. 집돌이와 집순이가 이불 속에서 꼼지락대며 조금씩 바꿔나가는 세상을 살짝 들여다봤다. 어쩌면 이들에게는 이불 밖이 위험한 게 아니라 이불 속이 가장 편안한지도 모른다.

쉬는 날엔 ‘인간 디톡스’가 필요해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발표한 ‘2016 문화향수 실태조사’에 따르면, 여가시간을 혼자 보내는 비율이 2014년 56.8%에서 2016년 59.8%로 증가했다. 


혼자가 편하다는 인식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2016년 11월 시장조사 전문기관 트렌드모니터가 전국 만 19~59세 성인남녀 2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전체 응답자의 83.7%가 ‘밖에 나가지 않더라도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충분히 많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서울 신촌에서 자취하는 직장인 김지은(29) 씨는 스스로를 집순이라고 평한다. 금요일 퇴근 후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며 본격적으로 ‘불금’을 시작한다. 맥주 여러 캔과 안주, 그리고 주말 동안 먹을 음식을 사 오면 기본 준비는 끝. 


이후에는 주말 내내 극세사 재질의 파자마를 입고 머리를 질끈 묶은 채 침대에서 시간을 보낸다. 편안하게 인터넷 서핑을 하려고 침대용 테이블도 구매했다. 3m짜리 휴대전화 충전 케이블이 있어 어떤 각도로 누워도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거나 동영상을 보는 데 전혀 무리가 없다. 


김씨는 “요즘에는 최신 영화도 조금만 기다리면 IPTV에서 볼 수 있어 굳이 영화관을 찾지 않는다. 집에서 따끈한 음식에 맥주 한 캔을 곁들이며 예능프로그램이나 영화를 보는 게 삶의 낙”이라고 말했다.

직장인 박진호(31) 씨는 지난 주말 자취방에 깔아놓은 이불을 아직 개지 않았다. 매일 퇴근하면 이불 속에서 TV를 보다 잠드는 것이 일상이라 굳이 치울 필요를 못 느끼기 때문이다. 박씨가 TV에 빠진 것은 셋톱박스가 계기였다. TV로 일반 방송은 물론, 유튜브 동영상과 넷플릭스, 왓챠플레이, 푹(pooq) 같은 VOD 서비스도 이용 가능하니 리모컨을 놓을 수가 없다. 


그는 “식사도 TV 앞에서 하려고 최근 앉은뱅이책상을 하나 샀다. 주변에서는 모처럼 맞는 주말이니 밖에서 사람도 만나고 하라지만 영업직이라 평일에 만나는 사람만으로도 지친다. 주말에는 이렇게 혼자 지내면서 ‘인간 디톡스’를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집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는 집돌이도 있다. 서울 은평구에 사는 회사원 오모(38) 씨는 여가시간 대부분을 온라인 게임에 할애한다. 10여 년 전부터 친한 친구들과 즐기는 게임이라 특별히 게임을 할 생각이 없어도 접속해 잡담을 나누곤 한다. 


그는 “30대 초반에 직장을 옮기면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갑자기 고향을 떠나 타지에 살게 돼 외로웠다. 그런데 게임을 통해 고향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 보니 주말에는 보통 컴퓨터 앞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말했다. 

출처: [사진 제공=Shutterstock]

직장인 양모(40) 씨는 뒤늦게 콘솔(거치형 게임기) 게임에 푹 빠졌다. 양씨는 “요즘에 나오는 온라인 게임은 농구나 축구처럼 매번 승부를 결정하는 식이라 실력이 떨어지면 다른 사람에게 욕먹기 일쑤다. 하지만 혼자 하는 게임은 그런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서 좋다. 온라인 연결로 여러 사람과 즐길 수도 있지만, 대부분 협동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라 스트레스 풀려고 게임을 하면서 얼굴 붉힐 일은 없다”고 말했다. 

출처: [사진 제공=Shutterstock]

서울 광화문 인근 오피스텔에서 자취하는 프리랜서 작가 박영선(34) 씨는 반려동물을 키우면서 비자발적 ‘집순이’가 된 경우다. 박씨는 “동물보호단체에서 자원봉사를 하다 안락사 위기에 처한 고양이를 만나게 됐고, 고민하다 집에 들였다. 동물을 키우기 시작하니 여행을 멀리, 오래 가는 것도 신경 쓰인다. 고양이는 개와 달리 밖으로 나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외출 빈도가 줄었다”고 말했다. 


평소 원고를 쓸 때 집 근처 카페에서 노트북컴퓨터로 작업하던 박씨는 집에 혼자 있을 고양이가 신경 쓰여 최근 큰맘먹고 커피머신을 구매했다. 고양이에게 사료를 준 후 커피 한 잔을 내린다. 그리고 라디오를 켜놓고 작업을 시작한다. TV를 보고 있으면 고양이가 슬그머니 무릎 위에 올라온다고. 박씨는 “고양이를 여러 마리 키우는 친구 집에 놀러갈 때 말고는 거의 집에서 고양이와 놀며 시간을 보낸다. 제대로 놀아주지 않으면 새벽에도 놀아달라고 조른다”고 했다. 


지난해 빅데이터 전문기업 다음소프트 집계에 따르면 ‘집순이’ ‘집돌이’라는 단어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언급량은 점차 증가하고 있다. 2013년 ‘집순이’와 ‘집돌이’는 SNS에서 1만210건 언급되는 데 그쳤지만, 2016년에는 18만7990건으로 10배 넘게 증가했다. 3년 만에 언급량이 크게 늘어난 만큼 홈족에 대한 인식도 좋아졌다.


집에 있으려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피로감 때문이다. 사회생활로 지친 심신을 회복하고자 쉴 때는 오롯이 일신의 편안함만을 추구하려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외출하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낯선 환경이나 집단과 마주치게 된다. 쉬는 날에 굳이 시간과 에너지까지 써가며 새로운 관계를 맺고 싶지 않으니, 말 그대로 이불 밖이 귀찮게 느껴질 수 있다”고 진단했다.


고강섭 한국청년정책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입시, 취업난 등 생존경쟁에 내몰린 현대인은 대인관계에서도 손해 보는 것을 피하고 싶어 한다. 집 밖에서 누군가를 만나 함께 보내는 시간이 즐거우리라는 확신이 없으면 나가지 않으려는 경우가 늘고 있다. 게다가 식사부터 여가까지 모두 집에서 해결 가능하니 어쩔 수 없이 외출해야 할 이유도 점차 사라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구희언 기자 hawkeye@donga.com

박세준 기자 sejoonk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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