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깜짝 놀랄 '뭉크의 사연'

조회수 2020. 10. 25. 16:0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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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에게 행운과 불운의 양이 평등하지 않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불안과 슬픔과 죽음의 사신들이 내 옆에 서 있었다. 저녁에 눈을 감을 때면 그들은 내 옆에 서서 죽음과 지옥, 그리고 영원한 징벌로 나를 위협한다.”


유성혜, 《뭉크》, 아르테, 2019, p. 231

출생은 거대한 제비뽑기와 같다. 부모를 골라서 태어나지 못하니, 모든 인간에게 행운과 불운의 양이 평등하지 않다


부잣집에 잘생기고 똑똑한 사람은 그가 무엇을 잘해서 상을 얻은 게 아니고, 가난한 집에 못생기고 머리가 좋지 않게 태어난 이도 그가 무엇을 못해서 벌을 받은 게 아니다. 그것들은 전적으로 우연의 산물이다. 그런 사실을 말끔하게 받아들이기 힘겨우니, 전생과 죽음 다음의 생을 다루는 종교에 마음을 의탁하게 되는 것이다.

에드바르 뭉크 - <절규>

현대인의 내면의 고통을 표현한 독창적인 그림 <절규>로 유명한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는 가난한 집에서 병약한 몸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순간에 이미 죽음을 경험했다는 그의 말은 과장이 아니다.


다섯 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9년 후에는 어머니의 역할을 하던 누나가 같은 병으로 죽었다. 그 사이에 어린 뭉크는 피를 가득 토하여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여겼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에게 죽음은 방 안에 놓인 침대처럼 익숙하고 당연한 무엇이었다.

그에게 죽음은
방 안에 놓인 침대처럼
익숙하고 당연한 무엇이었다.

어머니와 누나의 죽음과 그의 객혈은 모두 결핵 때문이었다. 공기 좋은 곳에서 좋은 식사와 휴식으로 고칠 수도 있었지만 뭉크의 집은 너무나 가난했다.

뭉크의 아버지는 의사였으나, 당시 의사의 사회적 지위는 지금과 같지 않아서 경제적으로 몹시 곤궁하여 끼니를 겨우 때울 정도였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로 아버지는 종교에 처절하게 매달렸다.

죽어가는 딸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었다. 기도는 죽어가는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 없었으니, 그 무기력한 기도에 소년 뭉크는 회의했다. 아버지와 불화했고 종교는 그의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지 못했다.


뭉크는 죽음과 함께 태어났고, 죽음의 불안과 공포와 더불어 성장했다.


몸이 조금이라도 아프면 ‘이제 내 차례인가?’, ‘나도 엄마와 누나처럼 피를 토하며 죽겠지!’라는 두려움을 떨치지 못했다. 피를 토하는 날에도 슬픔에 찬 눈으로 기도하며 자신을 보는 가족들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러한 사정을 이겨내기 위한 뭉크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죽음의 두려움에 그림으로 맞서다

“나는 미술이라는 여신에게 충실했고, 그녀는 나에게 충실했다 (…) 우리는 죽지 않는다. 세상이 우릴 떠날 뿐 (…) 내 부패한 육신에서 꽃들이 자랄 테고, 난 만발한 꽃들 속에서 살아가게 되리라.”


수 프리도, 《에드바르 뭉크》 , 윤세진 옮김, 을유문화사, 2008, p.570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뭉크는 그림으로 대응했다. 없애지 못할 두려움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 셈이다. 출생의 불운과 단점을 창조적인 작업으로 승화시켰다.

내가 죽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나를 떠난다.

뭉크는 그림을 그리며 죽음의 불안과 두려움을 조금씩 극복해냈고, 그래서 ‘자신이 죽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자신을 떠난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됐다. 죽음과 삶을 하나로 인식했고 죽음이 있어야 삶이 뚜렷해짐을 알았다.


파란색만으로는 그것이 얼마나 파란지 알 수 없으니, 그 곁에 빨강을 나란히 두면 그 파랑의 정도가 분명해지는 것과 비슷하다.

특히 <아픈 아이>에서는 두려움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려는 용기가 느껴진다. 마치 아픈 상처를 꾸욱 눌러서 아픔을 잊듯이, 수많은 시간을 불안과 두려움으로 떨었던 그가 그 원인을 응시하겠다는 다짐이 배어 있다.

가족력으로 인한 폐결핵이 그를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에 시달리게 만들었다면, 어머니와 누나 소피가 죽은 후에 처음 그린 <아픈 아이>는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간절한 바람을 담고 있다. 뭉크는 <아픈 아이>를 죽을 때까지 여러 번 다시 그렸다.

“나는 예술로 삶과 그것의 의미를 설명하고자 노력한다. 그래서 내 그림들이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삶을 좀 더 명확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도 원치 않고 태어난 것들이 있지만

우리도 원치 않았지만 갖고 태어난 것들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잘못해서 받은 벌이 아님을 알지만, 그 사실을 건조하게 받아들이긴 몹시 어렵다. ‘내가 뭔가 잘못해서 이렇게 태어났을 거야’, ‘그러니 나는 불행하게 살 것이다’처럼 자기 탓을 하거나 남들의 시선에 대항하지 못하고 고개를 수그리게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더 이상은 내 잘못이 아닌 걸로 자신을 책망하지 말자.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 탓이 아니라고, 별일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큰 소리로 말해주자. 몸의 장애를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에 대한 몰입으로 이겨낸 뭉크의 태도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몸의 힘만큼 정신의 힘도 중요하다는 걸 보여준다. 몸과 마음을 튼튼히 하여 세상의 잘못된 시선에 나를 길들이지 말고, 언제 어디서나 내가 행복을 느끼는 곳을 찾아 최선을 다하자.

“누구도 완벽하진 않아. 중요한 건 서로에게 얼마나 완벽한가 하는 거야.”


_영화 <굿 윌 헌팅>


나답게 살아갈 힘을 키워주는 문장들

“이토록 불완전해도, 남과 좀 달라도

그것이 너를 아름답게 하니까”


최고의 예술가들이 전하는

오늘 더 빛날 당신을 위한 인생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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