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딸을 낳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건..

조회수 2020. 7. 14. 08: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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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지만 우리 첫째 딸

울음소리가 어마어마하게 우렁찼다. 이 녀석의 오빠는 태어나자마자 뱉어내는 울음에도 수줍음이 묻어 있었는데 이 녀석은 엄마 배 속에서부터 참아왔던 걸 한꺼번에 터뜨리는 느낌이었다. 어찌나 기세가 대단한지 아이를 맡은 간호사마저 “아이가 힘이 좋은가 봐요”라고 할 정도였다.


대부분 아이가 건강하다고 얘기하는데 이 녀석에게는 그 표현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뒤로 바로 “딸입니다”라고 친절히 성별을 알려주었다. 힘이 좋은 딸이라니 일반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일반적인 기준을 워낙 싫어하는 나는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래, 힘이 좋고 소리가 우렁찬 우리 딸.’

‘그래, 힘이 좋고 소리가 우렁찬 우리 딸.’

시하를 처음 만났을 때는 입에 산소 호흡기를 갖다 대면서 “아빠야”라고 얘기하는 것이 너무 쑥스러웠다. 옆에 계신 장모님이 재촉하며 불러보라고 하지 않았다면 “시하야, 아빠야”라고 하지 못했을 것이다.


둘째는 역시 달랐다.

“아빠야” 뿐만 아니라 어쩌고저쩌고하며 말도 못 알아듣는 갓난아기한테 얘기도 참 많이 했다. 네 울음이 어떤지, 얼굴은 어떻고, 아빠 기분은 어떤지……. 내가 뭐라고 떠들던 신경 쓰지 않고 우리 딸은 역시나 힘이 좋고 우렁차게 울어댔다. 나도 질 수 없어서 더 많이 재잘거렸던 것 같다.

딸을 처음 안아본 엄마, 원지도 아들을 처음 안을 때와는 아주 달랐다. 훨씬 여유가 있어 보였는데 무엇보다 용감해 보였다. 왜 그렇게 보였는지 모르겠지만 딸을 안은 원지는 확실히 용감해 보였다. 나중에 원지에게 아이 둘이 생기고 가장 달라진 점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더 이상 무서울 게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럴 수가, 용감해 보인다고 생각했던 그 모습이 진짜 용감해진 것이었다니…….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가장 무서운 대상이 하나 더 늘었다. 아주 사적인 비밀이지만 난 세상에서 무서운 대상이 둘이다. 무서움의 크기는 다르지만 첫 번째는 원지고 두 번째는 시하다.

사람마다 감당할 수 있는 감정의 크기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감당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감정의 끝에 가까운 경험을 했다. 워낙 허망하게 돌아가시기도 했지만 그동안 갖고 있던 아버지에 대한 마음의 짐이 너무 컸다. 그래서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더해지면 내 마음의 짐은 결국 가라앉아서 영영 뜨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장례를 치르고 너무 두렵고 무서웠다. 이때 알게 되었다.사람에게 정해진 감정의 크기는 결국 본인이 가늠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렇더라도 결국은 본인이 감내하게 된다는 것을.


아버지가 들으면 서운하겠지만 특히 원지에 대한 내 감정은 전혀 가늠할 수 없다는 걸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원지와 결혼을 하고 아주 크게 다툰 적이 있다. 살면서 가장 무서운 순간이었다. 내가 나를 짐작할 수 없게 되는 상태, 나도 모르는 내가 마음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아, 큰일 나겠구나.’ 싶을 때 다행히 내가 원지에게 사과를 하고 있었다.

‘겨우 살았다!’라는 말이 안심이 되어 나왔다.

원지와는 다르지만 시하에 대해서도 내 감정의 크기가 가늠되지 않는다. 시하가 열이 펄펄 끓어서 자다 깰 때면 “아빠!” 하고 나를 찾을 때가 있다. 빠끔히 눈을 뜨며 정신을 바짝 차리려고 애쓰는 얼굴을 하고선 나에게 와락 안긴다. 그런 시하에게 해열제를 먹이고 체온을 다시 재고 침대에 눕힌 다음 등을 토닥거리며 재운다. 이 일련의 과정 중에 시하는 0.00000000000000000000001%의 의심도 없이 온전히 내게 의지한다. 그게 너무 무섭다.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믿음을 주는 존재라는 사실이…….

첫 모유 수유를 하고 돌아온 원지의 표정이 무척 건강해 보였다. 다행히 젖을 물리는 데 어려움이 없다고 한다. 울지도 않고 잠도 잘 자고 시하보다 더 순한 아이인 것 같다고 원지가 얘기하는데 덜컥 겁이 났다.

‘내가 혹시라도 모르고 지나치는 게 많아지면 어쩌지? 그래도 본비가 이해하고 넘어가면 어쩌지? 그냥 짜증 내고 투정 부리고 화냈으면 좋겠는데. 본비가 아빠도 잘못할 수 있다고 내색하지 않고 날 보면서 매일 웃어주면 어쩌지? 내가 죽을 때도 아빠 딸로 태어나서 행복하다고, 고맙다고 얘기해주면 어떡하지? 난 이미 죽은 상태니까 못 듣는 거 아닌가? 이거 정말 큰일이다.’

이제 막 태어난 아이라 아직은 직접 눈을 마주 볼 수도, 안아볼 수도 없다. 신생아실 너머 두꺼운 유리를 사이에 두고 어떻게든 전달될 거라 생각하며 본비에게 이런저런 얘기와 감정을 던진다. 태어난 지 아직 하루도 채 되지 않은 첫째 딸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힘세고 목소리 우렁찬 아이, 착하지 않은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다. 우리 첫째 딸.’


우리 가족은 꽤나 진지합니다: 봉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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