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남의 눈치를 본다면, 000 때문?

조회수 2019. 7. 12. 11:0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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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내게 칭찬을 하면 안심하다가,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말을 들으면 휘청거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상대가 제때 ‘고맙다’ ‘미안하다’ 해주지 않으면 금세 섭섭하게 여기거나 마음이 어두워지는 이들도 있지요.


타인의 말에 쉽게 무너지고 영향을 받거나, 타인에게 인정받고 칭찬받아야만 자신을 그나마 괜찮다고 여기는 것은 자신을 부적절하게 여기는 마음인 수치심에서 비롯되는 것일지 모릅니다.


만약 그 중심에 수치심이 들어 있다면 어떠한 행동으로도 그것을 가릴 수 없습니다. 무엇을 해도 도망칠 수 없지요. 상황이 조금만 안 좋아져도 이내 내면의 수치심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돈으로도 권력으로도 친구나 연인으로도 가릴 수 없습니다.

‘네가 정말 나의 본모습을 알면 실망할 거야’라는 믿음을 가진 이들은 칭찬을 들어도 그때뿐입니다. ‘나는 더 노력해야 해. 더 잘해야 무시받지 않을 거야. 더 잘해야 받아들여질 거야’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면 끝없이 자신을 혹사하면서 병들어갈 뿐입니다.


내가 나를 받아들이지 않고, 내가 내 마음을 돌보지 않는데 누가 나를 받아들이고 내 얘기에 귀 기울일까요?


그런데 왜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에게서 ‘내게 문제가 있다. 부족하다, 적절하지 않다’는 ‘수치심’이 발견될까요? 수치심은 왜 이렇게 만연해졌을까요? 비교적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랐는데 왜 그럴까요? 이런 현상을 이해하려면, 어린 시절 신체적・언어적・성적 학대를 경험한 이들의 병리적 수치심만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관점으로 수치심을 들여다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기술의 발달로 외부인과 자신의 경계가 모호해집니다. 개인의 내면에는 명확한 행동규범이나 삶의 방향을 잡아주는 기준이 아니라, 외부 메시지에 민감히 대응하고 때로는 널리 퍼뜨릴 수 있는 레이더가 만들어집니다. 자신의 가치에 대한 확신이 없고 남들로부터 인정을 갈구하기 때문에 만성적 ‘불안’에 시달리지요.

대중매체와 인터넷, 소셜미디어를 통해 타인지향적 소비를 하고 맹목적 욕망에 시달리는 현대인에게 ‘개인’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로지 타인의 시선만 있을 뿐이지요. 게다가 한국사회는 유교적 질서가 지배하는 집단주의에서 개인주의로 채 넘어가기도 전에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의 시대를 맞았습니다. ‘개인’을 경험하고 성장시킬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부모세대는 ‘집단에 폐 끼치지 않고 집단에서 밀려나지 않고 사는 것’을 중시했다면 자녀세대는 ‘남보다 못하지 않고 남들보다 뒤떨어지지 않게 사는 것’을 중시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모세대의 수치심 민감성은 자녀세대의 불안 민감성와 맞물려 모든 세대가 ‘수치심’과 ‘불안’에 날을 세우게 된 것처럼 보입니다. 수치심은 불안을 낳고, 불안은 다시 수치심을 조장합니다.

  

“지금 내 마음은 어떤걸까?"

남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정작 내 마음을 들여다볼 시간이 없었던 건 아닌가요?

나를 힘들게 하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지만, 결국 내 감정을 돌봐줄 사람은 나 자신뿐입니다. 


슬픔, 그리움, 분노, 수치심, 배신감...

자신의 감정들을 찬찬히 들여다보세요.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모습은 지나간 경험과 현재의 조건과 미래의 전망에 따라 끊임없이 바뀝니다. 역설적으로, 그 가변성 덕분에 우리 일상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감정을 알아차리고, 관점을 바꾸면, 결국 삶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불편하고 막연하게만 느껴졌던 감정이 어떻게 작동하며 달라지는지 조망하다 보면, 비로소 감정의 주도권이 우리 손에 돌아옵니다.

감정이 변하면, 삶의 풍경이 바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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