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 애착형성, 잘 되고 있는 걸까?

조회수 2018. 12. 27. 08:0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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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애착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없는 부모들은 자신이 좋은 부모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최선을 다하면서도 늘 자기비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특히 아이들에게 문제라도 생기면 일차적 책임을 자신에게 돌린다.

아이가 말이 늦거나, 분리불안이 심하거나,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면 양육의 잘못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자책은 아이와의 관계를 건강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되기보다 많은 경우 악순환에 빠진다. 자신을 나쁜 엄마라고 생각하고 오히려 자기혐오나 자기소진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과연 이게 맞는 걸까?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 중 하나는 애착의 형성과 손상을 일방적으로 부모 책임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문제가 어느 한 사람만의 잘못으로 벌어지는 일은 없다. 애착손상도 마찬가지다. 갓난아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인간에게 애착은 곧 생존 문제이므로 아이는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빤히 쳐다보기, 표정 따라 하기, 구슬피 울기, 환하게 웃기, 붙잡고 매달리기 등.


이렇게 애착형성이 쌍방향으로 일어나듯, 애착손상 역시 쌍방향적이다. 부모의 양육태도도 중요하지만 아이의 기질 또한 무시할 수 없다는 얘기다.


예를 들면 심한 낯가림, 예민한 감각, 과도한 칭얼거림, 의존적 성향, 유난히 고집스러운 성격, 지나친 공격성 등 유전적으로 타고난 기질도 크게 영향을 끼친다. 학자들마다 수치의 차이가 있지만, 10~33퍼센트는 어떤 부모가 키우더라도 ‘까다롭고 힘든 아이’에 속한다. 어떤 아이들은 누가 키워도 대체적으로 잘 자라고, 어떤 아이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가 키워도 애착손상을 받기 쉬운 아이로 태어나는 것이다.


고집스러운 아이, 불안한 성향을 가진 아이는 애착손상이 잘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들은 평범한 엄마를 만나더라도 자기 성향 때문에 쉽게 좌절감과 불안감을 느낀다. 모든 게 서툰데도 꼭 자기 방식대로 하려고 하고, 불안감이 지나쳐서 양육자에게서 잠시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이러한 기질이 잘 다듬어지지 않은 채 어른이 되면 인간관계에서 비슷한 문제를 일으킨다. 상대를 자기 식대로 통제하거나 이기려 하고, 불안감 때문에 계속해서 상대에게 의지하거나 상대를 믿지 못하기 쉽다.


특히 유전적으로 불안성향이 높은 아이들은 늘 인간관계가 버거울 수밖에 없다. 어른이 되어서도 낯가림이 심하고, 남 앞에 나서기를 유독 두려워하고, 상대의 표정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고, 거절에 예민하고, 어쩌다 한마디하고 난 뒤에는 걱정과 고민을 놓지 못하는 편이라 사람을 상대하는 일에서 스트레스를 크게 받는다. 교사라면 문제학생이 많은 학교가 아니라 일반적인 학교에 근무하더라도 하루하루가 스트레스의 연속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과도한 불안성향과 예민함은 애착손상의 결과라기보다 애착손상의 원인에 가깝다. 애착손상의 원인은 부모에게도 있지만 아이 자신에게도 있는 것이다.


애착은 ‘복구’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최근 심리학과 관련된 이야기에는 주로 애착과 자존감이 등장한다. 그러다 보니 ‘애착 노이로제’ ‘자존감 노이로제’에 빠지는 부모들이 있다. 많은 육아서와 심리도서에서 보여주는 부모의 모습, 특히 늘 아이를 지지해주고 아이의 감정에 공감하며 정서적으로 안정된 엄마의 모습이란 마치 바비인형의 몸매처럼 비현실적이다. 아이에게 하루에도 몇 번씩 소리칠 수밖에 없는 현실의 엄마들에게 육아서 속 엄마는 멀게만 느껴진다.


‘안정적 애착이란 애착손상을 주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크나큰 오해다. 그 누구보다 따뜻하고 지혜로운 양육자가 제아무리 애착손상을 주지 않으려고 애쓴다 해도 아이에게 애착욕구를 좌절시키지 않을 수는 없다. 초보 엄마일수록 더욱 그렇다. 처음부터 엄마인 사람이 어디 있겠나?

애착손상을 주지 않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애착손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애착은 한번 깨지면 붙일 수 없는 유리그릇 같은 것이 아니다. 수없이 넘어지고 다치면서도 오히려 더욱더 단단해지는 인간의 몸과 같다.


애착은 그런 것이다. 한 번도 손상되지 않았기에 애착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깨지면서도 이를 다시 복구하고 연결시키기 때문에 단단해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세 살짜리 아이가 밤늦게까지 자지 않고 계속 칭얼거려 “야! 너 정말 안 잘 거야?”라고 큰 소리를 질렀다고 해보자. 깜짝 놀란 아이는 더 울며 보챈다. 엄마는 울지 말라며 더 큰 소리를 낸다. 이런 상황을 만들지 않으면 좋겠지만, 이를 피해갈 수 있는 엄마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다음이다. 다음 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넘어갈 게 아니라 아이의 마음에 말을 걸어보는 것이다. “○○야, 잘 잤어? 그런데 어젯밤에 엄마가 소리쳤을 때 마음이 어땠어?”라며 ‘속대화(마음을 나누는 대화)’를 시도해보는 것이다. 

아이의 마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이의 내적 경험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의 마음도 모르고 “소리쳐서 미안해!”라며 섣불리 사과하거나 “엄마도 지쳐서 빨리 쉬고 싶을 때가 있어”라며 화난 이유를 먼저 이해시키려는 대화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애착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알아서 해주는 부모가 아니라 아이의 마음을 궁금해하고 물어봐주는 부모다.


뒤늦게라도 아이의 좌절된 욕구와 위로받지 못한 감정을 이해해주는 대화가 이루어진다면 아이의 애착손상은 충분히 회복된다. 그렇다고 항상 이렇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열에 한두 번 정도라 해도 이런 회복 경험은 아이에게 인간관계의 좌절을 영구적 좌절이 아니라 일시적 좌절로 받아들이도록 돕는다. 부모와의 관계에서 애착손상을 회복한 경험이 없는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금이 간 관계를 회복시키기가 어렵다. 안정적 애착이란 끝없는 ‘단절-회복brake-repair’의 경험으로 만들어지는 동아줄이지, 부모의 초인적 인내와 정성으로 한 번도 금가지 않고 빚어낸 도자기가 아니다. 그러니 제발 천사 같은 부모가 되려고 하지 마라. 일시적인 단절을 받아들이되 다시 연결을 회복시켜주는 부모가 돼라.


애착이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유년기의 애착경험만으로 한 아이가 험난한 세상을 잘 헤쳐나갈 수는 없다. 어릴 때 아프지 않았다고 커서도 아프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상처받기 쉬운 존재이고, 세상은 시련으로 가득하다. 사람들은 부모처럼 우리를 대해주지 않고, 세상은 가정처럼 안전한 곳이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에게는 ‘적절한 애착손상’이 필요하다. 애착손상이 전혀 없는 것은 애착손상이 심각한 것만큼 문제가 될 수 있다. ‘적절한 애착욕구의 좌절’은 세상을 헤쳐나갈 독립심을 주고, 자아중심성에서 벗어나 상호적인 관계를 맺어갈 기초가 되고, 대상의 좋은 면과 안 좋은 면을 바라보고 통합할 수 있는 시야를 준다. 좌절은 발달의 중요한 요소다. 

우리는 안정 애착의 신화에서 벗어나야 한다. 애착은 인생 성공의 보증수표도 아니다. 부모만큼이나 또래를 비롯한 사회적 관계가 중요하다. 하와이군도 서북쪽 카우아이섬에서 펼쳐진 역사적인 심리학 연구가 이를 입증해준다. 심리학자 ‘에미 워너’는 1955년부터 30년 넘게 이루어진 이 종단연구에서 애착손상이 심각했던 201명의 고위험군을 관찰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부모의 가난, 질병, 범죄, 불화 등으로 인해 돌봄을 받지 못하고 자란 이 아이들 중에 무려 3분의 1인 72명이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건강한 성인으로 자라난 것이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조부모・친척・성직자・교사・친구 등 주변 인물 가운데 적어도 한 사람 이상이 이들을 사랑해주고 지지해주었다는 점이다.


인간의 뇌처럼 인간의 발달에도 ‘가소성’이 있어 수정되고 개선될 수 있다. 유전자와 유년기 경험이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치지만 삶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유전자의 영향을 거스를 수 있고, 유년기 경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손상된 애착이 복구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지금의 관계를 복구시킬 수 있다. 우리가 누군가와 친밀하다는 것은 갈등과 좌절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갈등과 좌절을 풀고 관계를 다시 회복했다는 것이다. 모든 친밀함은 고통을 동반한다. 다만 그 고통을 해소하여 자원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상처를 주고받지 않으려는 것보다 관계의 상처를 잘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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