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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기연민'은 어느 정도일까?

조회수 2018. 9. 6. 07: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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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겨운 감정을 다루기 위해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것으로 마음챙김에 근거한 세 가지 기술이 있다.


(1) 초점을 맞춘 자각, (2) 열린 자각, (3) 자애(慈愛). 지금까지 우리는 처음 두 가지를 배웠다. 한 가지 대상에 초점 맞추기는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혀 안정시키며, 열린 자각은 균형 잡힌 방식으로 일상의 도전에 반응하도록 돕는다. 이 두 가지 기술은 우리 삶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차리게 해준다. 이어 자애를 발휘함으로써 우리의 경험을 친절하고 편안하게 보듬는다.


자애는 누군가의 행복을 소망하는 마음이다. 연민은 그 사람이 고통에서 자유롭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자애는 언제 어디서나 경험할 수 있지만, 연민에는 고통이라는 전제조건이 따른다. 그러므로 연민은 자애의 부분집합이다.


연민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반응하여 ‘가슴이 따라 떨리면서’ 그 고통이 덜어지기를 소망할 때 일어난다. 자기연민은 고통받고 있는 우리 자신을 스스로 돕고자 하는 충동을 느낄 때 경험한다. 


나의 '자기연민'은 

어느 정도일까?

마음챙김은 심리학 분야에서 급속히 관심이 커지는 주제다.


자기연민에 관한 연구의 목표 중 한 가지는 자기연민과 그 밖의 개인적 자질들, 이를테면 삶에 대한 만족도·실패 극복하기·자존감·지혜 같은 자질들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다.


텍사스대학교 심리학자인 크리스틴 네프(Kristine Neff)는 자기연민에 관한 연구에서 대부분 활용되는 ‘자기연민척도(Self-Compassion Scale)’를 개발했다. 이 척도에는 자기연민의 주요한 요소들인 ①자기친절, ②인간 경험의 보편성, ③마음챙김 및 이와 상반되는 자기판단, 고립, 지나친 동일시를 측정하는 여섯 가지 하위 척도가 있다.


누구나 네프의 웹사이트에서 풍부한 관련 연구뿐 아니라 자기연민척도를 활용할 수 있다.

[1]

자기연민 테스트 사이트 접속

[2]

'Test your level of self-compa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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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자신의 정확한 자기연민 수준을 검사해보고 나서, 아마도 한 달쯤 지나면 다시 마음챙김과 자기연민 수행의 효과를 측정해보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자기친절은 자기판단과 정반대다. 예를 들어 자기연민척도에 나오는 “나는 나 자신의 결함과 부족함에 대해 너그럽다”라는 진술은 “좋아하지 않는 나 자신의 면모가 눈에 띌 때 나는 스스로를 싫어하게 된다”라는 진술과 정반대다.


우리는 스스로를 판단하는 경향이 있어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 마음의 상처를 입고 스스로에게 모욕까지 준다. 자기연민이 있는 사람은 일이 힘겹고 차질이 빚어져도 스스로를 가혹하게 비난하기보다는 따스하고 이해심 깊게 대한다.   

우리는 불운을 당할 경우,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오직 자신뿐이라고 느끼기 십상이다. 또한 마치 자신만이 불운에 책임이 있기라도 하듯, 불운을 당한 데 수치심을 느끼는 경향도 있다. 수치심은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강렬한 감정이 가라앉고 좀 더 넓은 시야로 상황을 바라볼 때, 오로지 ‘나’와 ‘내 실수’ 탓이기보다는 모든 일은 우주만큼이나 방대한 원인의 결과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마련이다. 모든 사건은 연속되면서 미미하게라도 상호 연관된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경험한다. 이러한 인간 경험의 보편성을 자각함으로써 혼자라거나 고립되었다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내 경우 자기연민을 느낀다면, 자기연민척도에 나오는 것처럼 “나는 어떤 점에서든 내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면, 다른 사람들도 누구나 그런 느낌을 받는다는 사실을 떠올리려고 애쓴다”는 말을 확신을 가지고 지지할 것이다. 만일 내가 외롭고 고립되었다고 느낀다면 아마 이렇게 될 것이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나는 남들이 대부분 나보다 더 행복할 거라고 느끼곤 한다.”

자기연민이 마음챙김 수행 속에 내재되어 있듯이, 마음챙김도 자기연민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 마음챙김이란 집착하지 않는 자각으로, 균형 잡힌 태도로 고통스러운 생각과 감정을 수용하는 능력을 준다. 마음챙김의 반대 현상인 지나친 동일시는 감정에 반응하는 과정에서 넋을 잃어버릴 때 생긴다. 너무 고통스러워하다 보니 인지 능력이 줄어드는 것이다. 반면에, 마음챙김을 통한 자각은 우리가 언제 고통 속에 있는지, 언제 스스로를 비난하는지, 언제 고립을 자초하는지 인식하도록 도움으로써 우리에게 나아갈 길을 제시한다.


자기연민척도에서 마음챙김 항목은 “기분이 좋지 않을 때, 나는 호기심을 갖고 열린 자세로 내 감정에 다가가고자 노력한다”다. 마음챙김의 반대는 “기분이 좋지 않을 때 나는 머릿속이 잘못된 것들로 가득 차 있고, 거기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라는 진술이다.


자기연민은 자연스러운가?

자기연민은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런 것이다. 모든 존재는 고통에서 해방되어 행복하고픈 소망을 내면 깊숙이 품고 있다. 어머니 가슴을 더듬어 젖을 빨 때, 외로워 울부짖을 때, 핑크빛 캐딜락을 사려고 돈을 모을 때 우리는 이런 본능에 답하고 있는 셈이다. 한 마디로, 자기연민 수행은 행복하고 건강하고 싶고,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고 싶은 우리의 내적 갈망의 불길에 솔솔 부채질을 하는 것일 뿐이다.


실제로 나쁜 일이 벌어지면 사람들은 세 가지 유감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자기비난, 자기고립, 자기매몰.


왜 우리는 이렇게 반응할까?


나는 위험에 대한 본능적 대응, 곧 스트레스 반응이 투쟁(fight), 도피(flight), 경직(freeze)으로 이루어져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이 세 가지 전략으로 우리는 육체적으로 살아남는 데 도움을 받는다. 하지만 그런 전략을 정신과 정서 기능에 쓸 경우 어려움에 빠진다. 방어해야 할 적이 없으면 우리는 자신에게로 달려든다.


‘투쟁’은 자기비난이 되고, ‘도피’는 자기고립이 되며, ‘경직’은 자기매몰이 되어 자신의 생각 속에 갇히고 만다.


최근 과학자들은 스트레스에 대한 또 다른 본능적 반응을 밝혀냈다. ‘보살피기’와 ‘친구 되기’다. 위협을 받으면 (자식을) 보살피듯 반응하고, (친구가 되듯) 친밀하게 접속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투쟁 또는 도피 반응과 보살피기 또는 친구 되기 반응이 남녀 모두에게 공통적이기는 하지만, 여성들이 보살피기와 친구 되기 쪽으로 더 기우는 편이다. 보살피기와 친구 되기 반응은 모유 촉진 호르몬인 옥시토신과 관련되며,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은 대체로 옥시토신의 효과를 촉진시킨다. 그러므로 여성이 남성보다 자기연민, 곧 자신과 친구가 된다는 것에 친밀감을 훨씬 더 쉽게 느낄 수 있다. 그렇지만 옥시토신은 투쟁 또는 도피 반응의 피해를 막아주는 완충장치이므로, 자기연민은 스트레스로 고통받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익힐 가치가 있는 기술이다.


자기연민은 달성하기가 매우 어려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행복하고 고통에서 자유롭고 싶은 소망을 타고났다. 따라서 자기연민을 끝까지 외면할 수는 없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성공 가능성이 있다.


자기연민은 이기적인가? 

우리 대부분은 스스로에게 주목할 때 약간은 죄의식을 느낀다. “나보다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내 문제는 그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냐. 이만한 문제는 속으로 삼키고 불평하지 말아야 해!”


우리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항상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되도록 남들을 도우려고 애쓰는 게 옳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를 돌보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를 돌보는 데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도덕적 탈선은 아니다. 자기연민에 능숙해지는 데는 몇 초나 몇 분이면 충분하다. 우리 문제를 남들의 문제와 비교하는 것은 슬그머니 개인적 고통을 부인하면서 회피하는 방식일 수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성가신 문제에 필요 이상으로 오래 매달린다.


자기연민이 스스로를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만들어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킬 개인 보호막이 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다. 스스로에게 가슴을 활짝 열수록 남들에게 더욱 친밀감을 느낀다. 자기연민은 다른 사람을 향한 친절의 토대다. 자기 자신의 특별함을 받아들이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좀 더 마음이 열린다.


예를 들어 자기가 옷을 맵시 있게 입지 못한다고 자책하는 사람이라면 길거리에 보이는 촌티 나는 차림새의 사람들을 틀림없이 안 좋게 볼 것이다. 결함이 있는 자신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친절하게 대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웃는 얼굴로 부드럽게 인사를 건넬 것이다.


결함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우리 행동이 더 나아질 수 없고 나아져서도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수용은 바로 현재의 순간에 존재한다. 우리 각자에게는 성장할 여지가 있으며, 진정으로 성장해야 한다. 아무리 서툴고 불완전하고 미련하다고 해도, 바로 오늘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친근해지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순간순간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임으로써 우리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한결 수월하게 적응하고 변화될 수 있다.


자기연민이 자기동정(self-pity)에 빠지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연민의 초기 단계에는 사실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 포함될 수 있다. 그렇다고 잘못된 건 전혀 아니다. 나는 밥 딜런(Bob Dylan)의 노래 〈선더 온 더 마운틴Thunder on the Mountain〉에 나오는 다음 노랫말을 좋아한다.

출처: 주간조선
1984년 스위스 바젤에서 공연 중인 밥 딜런.
제발 그대 자신을 가엾게 여겨라!”

다만 자기동정은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단절시켜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축소시킨다. 반면에 자기연민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겪는 고통의 보편성에 눈뜨게 한다. 또한 자기연민은 고통에 대해 낙관적이지도 비관적이지도 않은 균형 잡힌 마음챙김의 감각을 갖게 한다. 예컨대 당신이 아플 때, 자기연민이 질병의 결과를 재난으로 만든다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는 사랑이 깃든 태도로 그저 아픈 상태에 머문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자기연민은 결코 개인적이지 않으므로 이기적이지 않다. 방 안을 가득 채운 사람들 중에서 가장 고통받는 사람, 가장 잘 아는 사람, 가장 잘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도와주는 건 사리에 맞다. 그 사람은 당신 자신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비행기에 빗대어보면, 객실 공기 압력이 떨어질 때 우선 자기부터 산소마스크를 착용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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