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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친 얼굴을 모티브로 한 에일리언 탄생비화

무비판타지백과 - 에일리언의 창조자, H.R. 기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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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지만, 영화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의 손이 필요한 종합적인 문화 콘텐츠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배우와 감독은 전면에 나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일이라 대중들에게도 잘 알려져있지만, 화려한 조명 뒤에서 묵묵히 일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어 우리가 보는 영화가 만들어지죠.


그렇게 보통은 잘 알려지지 않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름을 걸만한 유명한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이번에는 화가 출신이지만 영화의 콘셉트 디자인을 맡아서 기괴한 영화를 창조해낸 20세기의 거장 한명을 소개해볼까 합니다.

에일리언의 창조자, H.R. 기거

1979년 처음 개봉되어 지금까지 많은 시리즈와 외전격의 영화까지 내놓은 SF 호러 영화 <에일리언> 시리즈에 등장하는 ‘에일리언’. 

마치 악몽에서 본 듯한 형상을 지닌 이 외계 생명체는 어둡고 광택이 나는 단단한 외골격으로 싸인 몸 덕분에 어두운 곳에서는 잘 눈에 띄지 않으며, 벽이든 천정이든 가리지 않고 이동할 수 있는 단단한 팔과 다리를 갖고 있습니다. 또 먹이가 되는 생명체의 심장을 꿰뚫을 수 있는 날카로운 이중 턱과 날카로운 꼬리를 무기로 사용합니다. 또 고열과 저온, 진공 상태 등의 극한 상황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질긴 생명력을 갖고 있습니다.


게다가 지능도 좋은 편이라 자신이 불리한 상황이라 판단되면 몸을 숨기고, 잘 보이지 않는 곳을 찾아서 먹이를 사냥하는 선천적인 사냥꾼 종족이며, 어떻게든 피해를 입히는데 성공했다고 해도 공기와 접촉하면 산성이 되어버리는 피 성분 때문에 부가적인 피해를 입게 됩니다.

▶에일리언의 치명적인 이중 턱


하지만 무엇보다 이녀석들이 끔찍한 이유는 다른 생명체(특히 인간)를 숙주 삼아서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알에서 부화한 유충 단계의 ‘페이스 허거’는 숙주의 머리를 붙잡고 촉수를 입 안으로 집어넣어 안에 ‘에일리언의 태아’를 넣고 빈 껍질만 남기고 죽습니다.


숙주는 페이스 허거에게 붙잡혔을 당시의 상황을 기억하지 못하고, 안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도 느끼지 못한채로 에일리언을 ‘임신’하고 지내다가 어느 정도 성장을 마친 에일리언 유충 ‘체스트 버스터’가 가슴 뼈를 뚫고 뛰어나올 때 사망하게 됩니다.

▶페이스허거에 붙잡힌 모습


이런 괴이한 생명체를 디자인한 사람은 한스 루에디 기거(1940~2014), 일명 H.R.기거라 하는 스위스의 화가입니다. 인간과 기괴한 생명, 그리고 기계를 조합한 듯한 그림이 특징인 그는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에일리언 뿐 아니라 여러 SF나 호러 영화의 콘셉트 디자인에 참여한 작가이기도 합니다. 

▶기거와 그의 작품들


기거가 처음부터 영화계에 널리 알려졌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순수 미술이 아닌 인테리어 및 산업 디자인을 전공했으며, 졸업 후에는 자신의 전공을 살려서 인테리어 디자인으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기거가 디자인한 가구들


그러다가 SF 소설 <듄(Dune)>의 영화화 작업에 고용됩니다. 프랭크 허버트의 <듄>은 가상의 행성에 ‘스파이스’라는 자원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전쟁을 그린 작품으로, SF 소설의 고전 명작으로 유명합니다. 우리에게는 데이빗 린치 감독의 <듄(1984)>가 유명하지만, 1974년에 이미 유명한 감독인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의 듄 영화화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제작되던 듄의 광고지


듄이 외계문명을 그리는 만큼 독특한 디자인이 필요했기 때문에 제작에 관여되었던 스태프들도 굉장한사람들 뿐이었습니다. 스페인의 초현실 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 프랑스의 만화 작가 뫼비우스, 핑크 플로이드, 오슨 웰스 등 쟁쟁한 사람들이었죠. 여기에 기거도 인테리어 및 콘셉트 디자인에 참여하게 됩니다.


하지만 원작 소설을 단 두어시간만에 전부 담으라는 것은 원작에 대한 모독이라며 16시간짜리 영화로 만들려던 조도로프스키 감독이 사퇴했고, 프로젝트는 흐지부지되면서 엎어지고 말았습니다.


기거의 첫 영화 데뷔는 아쉽게 이렇게 끝맺음하나 했지만, 이때 맺었던 인간 관계마저 쓸모없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듄의 각본을 작업했던 댄 오배넌은 기거의 작품을 눈여겨봤고, 그의 그림인 ‘네크로놈 IV’에서 영감을 얻어 새로운 각본을 썼습니다. 이것이 바로 <에일리언>입니다.

▶기거의 네크로놈 IV

▶기거가 디자인한 에일리언


1979년, 때마침 <스타워즈> 덕분에 불어닥친 SF 영화 붐에 힘입어 <에일리언>도 영화 제작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댄 오배넌은 기거를 1편의 감독 리들리 스코트에게 추천했고, 감독의 마음에도 들었던 기거는 에일리언 뿐만 아니라 영화 초반에 에일리언의 알을 발견하게 되는 미지의 우주선과 우주 유적, 그리고 ‘스페이스 조키(Space Jockey)’라는 외계인의 시체까지 디자인하게 됩니다. 

▶기거가 디자인한 외계 우주선. 이후 <프로메테우스>에 더 자세한 구조가 나옵니다.

▶에일리언 1의 우주선 안에 있던 외계인, 일명 ‘스페이스 조키’. 역시 프로메테우스에서는 에일리언을 비롯해서 인간마저도 창조한 ‘엔지니어’라는 별칭의 고대 외계인이라는 설정이 됩니다.


이렇게 탄생한 에일리언은 흥행에도 성공했고 평가도 좋아서 아카데미 시각 효과상을 수상하고 미술상에 노미네이트되었으며, 지금까지도 SF 영화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걸작 영화로 손꼽힙니다.


이후 기거는 에일리언 시리즈에 전반적으로 콘셉트 및 크리처 디자인을 담당했는데, 제임스 카메론이 감독을 맡아 1편을 능가하는 명성을 올린 에일리언 2는 물론, 시리즈가 점점 기울기 시작한 신호탄이 된 3편에서는 다른 디자인도 많이 했지만 영화상에 직접 사용되진 않았다고 하네요.

▶단, 에일리언 2의 퀸 에일리언은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직접 작업했습니다.

아름답지만 치명적인 그녀, 스피시즈

그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영화는 1995년의 <스피시즈>입니다. 아름다운 외모의 외계인이 등장하는 이 영화에서 기거는 주인공 역의 ‘실’의 크리처 디자인을 맡았습니다.


어느 날 외계에서 날아온 전파 메시지에 외계인과 인간의 DNA를 합성하는 방법이 실려있었고, 이를 합성해서 창조한 인간 소녀 ‘실’은 폐쇄된 실험실 안에서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뭔가 잘못된 것을 알게 된 과학자들이 그녀를 죽이려고 하자 실은 탈출하게 됩니다.

▶영화 <스피시즈>


실은 완전한 성인 여성의 모습으로 성장해서 길거리를 누비면서 ‘남성’을 유혹합니다. 그녀가 찾는 남성은 ‘완벽한 남성’입니다. 잘생기고 근육질인 남성들을 주로 유혹했지만, 그가 건강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가차없이 죽여버립니다. 

▶스피시즈의 일명 ‘죽음의 키스’


정확하게 말하자면, 건강하지 않은 남자임을 알아챈 실이 성관계를 거부했고, 이대로 돌아섰으면괜찮았겠지만 100이면 100 남자들이 강제로 관계를 가지려다가 죽는 것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마침내 찾아낸 이상형의 남자도 실의 정체를 알아채자 죽여버리니 그녀와 관계된 남자들은 다 죽는 셈이 되버린 거죠. 

▶진짜 모습을 드러낸 실


영화 자체는 배우의 누드 장면이나 잔인한 폭력씬을 감상(?)하는 B급 호러 영화지만 ‘야하고 잔인한 영화’로 입소문을 타서 흥행에 성공했습니다. 특히 주연 여배우인 나타샤 헨스트리지의 탈의 장면이 나온다고 언론에서 대서특필(?)했던 것이 흥행에 굉장히 잘 먹혔다고 합니다. 

▶여배우 미모 덕을 톡톡히 본 스피시즈의 한 장면


기거는 스피시즈의 감독인 로저 도날드슨이 기거의 대표적인 화집 ‘네크로노미콘’을 본 후 최적의 작가라고 생각해서 직접 캐스팅했다고 합니다. 기거는 여성의 몸에 여러 가지 변형을 가하고, 남근이나 여성기를 상징하는 기괴한 그림을 잘 그렸기 때문에 애초에 ‘야한 SF 호러 영화’를 표방하고 제작했던 스피시즈와는 딱 맞는 선택이었던 거죠. 

▶괴물화된 실의 옆 모습


기거는 이외에도 영화 <폴터가이스트 II>와 일본의 판타지 소설 <제도물어(테이토 모노가타리)>의 영화화에도 참여해서 그만의 독특한 디자인을 선보였습니다. 

▶기거가 그린 제도물어의 콘셉트 아트

▶폴터가이스트 2에 나오는 괴생명체의 모습

▶역시 폴터 가이스트의 콘셉트 디자인


<배트맨 포에버>의 배트 모빌 디자인에도 참여했는데, 이 디자인은 사용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X자 모양이 인상적인 배트 모빌 디자인

미녀와 괴물

그는 왜 여성의 신체를 변형한 괴이한 작품들을 많이 남기게 되었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원래 그가 상상력이 뛰어나고 ‘변태적인’ 습성을 가졌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그는 모종의 사건이 있은 후부터는 더욱 음울한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갓 대학을 졸업한 후 기거는 아름다운 배우이자 모델인 리 토블러(Li Tobler)를 만나서 사랑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1:1의 일상적인 로맨스가 아니라 복잡한 관계였습니다.

▶리 토블러(1947~1975)


기거와 토블러가 처음 만나서 사귈 때에 이미 그녀에겐 다른 남자친구가 있었으며, 심지어 그 남자친구와 토블러, 그리고 기거는 동거를 했습니다. 남자가 동거 관계를 청산하고 떠나자 그떄부터 둘 만의 로맨스가 시작되었죠.


하지만 토블러는 어디 하나에 얽매이는 사랑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짧고 강렬하게’ 살자는 인생관을 가진 사람이었거든요. 그래서 기거와 사귀는 도중에도 그녀는 다른 남자들과도 관계를 수시로 맺었다가 헤어지는 등,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사는데 평온할리는 없었습니다. 당연히 경제적으로도 넉넉하지 않았고, 약물 남용 문제도 있었으며, 심각한 우울증을 앓기도 했습니다.

▶기거의 그림엔 여성의 신체를 변형시켜 그린 그림들이 많습니다.


토블러를 뮤즈로 삼아 점점 더 기괴하고 우울한 그림을 그려나갔던 기거의 당시의 그림들은 그녀를 모델 삼아서 이것을 변형시킨 것들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초기 기거의 대표작 중에 Li I과 Li II라는 여인의 얼굴 그림은 바로 리 토블러의 얼굴을 모델 삼은 그림이었습니다. 

▶기거의 그림 ‘Li I’. PC 게임 <다크 시드>는 이것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의 얼굴임에도 기괴한 기계나 돌연변이된 생체와도 같은 것들과 조합해서 그린 것을 처음 본 토블러는 그림을 찢어버렸다고 합니다. 왜 찢어버렸는지 그 정확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얼굴로 기괴한 그림을 그린 것을 납득하기 어려웠겠지요. 지금 남아있는 그림은 찢어진 그림을 최대한 기억을 되살려 다시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기거의 작품들


이렇게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어려운 상황에 약물 남용까지 했던 리는 1975년 끝내 자살하고 맙니다. 기거는 그녀의 자살이 자신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회고했습니다.


기거는 1979년에 결혼을 했지만, 1년 반만의 결혼 생활은 파경에 이르러 이후 독신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기거는 2014년, 계단에서 넘어진 후 급격하게 건강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납니다. 그가 떠난 후에는 불경한 농담이 돌기도 했습니다. 그가 지옥에 간다면 상상했던 것들을 직접 볼 수 있게 되어 기뻐할 것이라고 말이죠.


그는 떠났지만 그가 남긴 영향은 아직도 많이 남아있습니다. 스위스에는 기거 박물관이 있으며, 기거가 직접 인테리어를 한 바도 남아있다고 하죠. 그리고 무엇보다 많은 작가들이 그로부터 영감을 받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내고 있습니다.

▶영화 <퓨처 킬>의 포스터. 기거가 그렸습니다.

▶스위스에 있다는 기거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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