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수 와우저가 보는 '클래식은 왜 흥했을까?'

조회수 2019. 9. 4. 15:1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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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클래식'
그걸 누가 하냐. 님 바보임?
▶ ㅋㅋ

'막상 해보면 재미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던 게임이 성공한 모습을 지켜보는 개발자의 입장은 어떨까?

  

한 게임의 미래에 대해 '아 그 게임은 아마 만들지 않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가, 나중에 '자 소개합니다! 빠밤!' 그 게임의 공개 발표를 직접 자기 입으로 말한 사람이 있다. "You think you do, but you don't" 란 말을 남긴 '제이 알렌 브랙'의 이야기다. 이 아저씨는 '마이크 모하임'의 뒤를 이어 '블리자드'의 사장님이 되신 분이고, '아마 안될 거야'라고 말씀하신 그때의 그 게임은 바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클래식'이다.

  

오래전부터 예고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클래식'이 드디어 나왔다. 사장님의 흑역사로 남을 뻔한 이 게임이 등장하기 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래도 결국엔 나왔다. 누군가는 망해가는 '와우'를 되살릴 비장의 카드라고 이야기했고, 누군가는 그저 '추억팔이'를 위한 수단이라고 이야기했다. 또 누군가는 추억을 기다렸고, 다른 누군가는 냉정한 평가를 준비했다.


'와우'는 확장팩 '불타는 성전'과 '리치왕의 분노'이후 그 인기가 계속 하락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고, 당연한 일이다. 10년이 넘도록 매번 새롭고 재밌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망했다' 와 '안 망했다'의 의견은 심심하면 나오는 토론 주제이고, '와우 망했나요?'는 공개 채팅창의 단골멘트다.

  

오래된 게임은 '고인물'과 새로 유입된 '청정수'로 세대가 나뉜다. '와우'처럼 10년 넘도록 서비스를 한 게임은 10대부터 50대까지 연령층이 다양하다. 똑같은 게임을 하면서도 바라보는 시각이나 접근하는 방식, 즐기는 콘텐츠의 종류도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특히 와우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부분, 이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제한적인 게임이다. '레게, 투게, 전게'같은 단어를 보면 알 수 있다.

출처: 레딧

하지만 대부분의 와우저들이 '예전만 못하다'는 점에는 공감한다. 지금 당장 나즈자타에 있는 와우저 아무나 한 명 붙잡고 '와우하면 인생 망하나요?'라고 물어본다면 '엥? 옛날 와우도 아니고 지금은 아닌데?' 라고 대답할 것이다.

  

2019년 현재 '격전의 아제로스'에서는 과거 2004년 등장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명성을 찾을 수 없다. 당시 '와우 오리지널'이 가지고 있었던 재미 요소들은 대부분 증발했고, 이젠 얼마 남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게임을 즐겨온 와우저들 역시 '불타는 성전, 리치왕의 분노' 두 확장팩을 기준으로 '옛날 와우'와 '지금 와우'를 나누고 있다. 솔직히 오랫동안 게임을 해온 한 와우저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지금의 '격전의 아제로스'는 '노가다'와 '숙제'와 '운빨'만 남은 '그저 그런 게임'이 됐다.

  

이처럼 참담하게 무너진 '격전의 아제로스'옆에 블리자드는 '와우 클래식'이라는 자신들의 위대한 과거를 다시 내놓았다. 자신들이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은 스토리는 수습할 자신이 없어서 였을까? 아니면 '액티비전'이 시켜서일까? 스토리, 콘텐츠, 밸런스 모든 것이 어긋나 있는 '본섭'을 다듬을 생각은 안 하고 뜬금없이 '와우 클래식'이라니.

  

개발자가 직접 '의지가 없음'이라 말했던 '와우 클래식'은 어떻게 등장하게 된 것일까? 

▶ 불의 세례를 받아라

노스탈리우스는 옳았나?

현재 블리자드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서서히 몰락해가는 게임들을 보며, 영광스러웠던 과거를 이야기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액티비전'과 '디아블로 M' 그리고 'PC'. 이 몇 가지 단어들로 처절하게 무너지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뒤바꿀만한 비장의 카드가 필요했을 것이다.

  

'와우'를 직접 하지 않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오해가 '이제 와우가 망해서 잘 나갈 때의 게임을 가지고 왔다'라는 점이다. 정말 단순하게 '격전의 아제로스 트레일러가 나왔을 때는 반응이 참 좋았어. 그게 보니까 와우의 기본 갈등 호드 vs 얼라라는 것에 초점을 둬서 그랬나 봐. 결국에는 이게 먹힌다 이거지? 그러면 오리지널을 들고 와보자. 그때만큼 양 진영에 대한 대립이 확실한 건 없었으니까' 라는 생각 때문에 '와우 클래식'이 등장하게 된 걸까?

  

다행히 블리자드는 그 정도까지 추하진 않다. 단지 '와우 클래식'의 탄생은 블리자드의 의지 보다, 게이머들의 소망이 이뤄낸 결과라고 봐야 한다. 게이머들이라면 '그때의 그 게임 다시 할 수 있을까? 함께 하던 사람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그때의 추억처럼 다시 한번 가슴 뛰는 경험을 해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 번쯤 해봤을 것이다. 지금은 '오글거린다'는 표현으로 비아냥대지만, 분명 이런 감정을 공유하고 싶은 게이머들이 있을 것이다. 꼭 게임이 아니어도 음악, 영화, 사진, 책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과거를 회상하고, 소위 '추억팔이'에 빠져 다른 사람과 감정을 공유하고 싶은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다.

  

게임에서는 이런 과거의 감정을 공유하고픈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있다. 바로 '프리서버'다. '와우 클래식'이 다시 돌아오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것이기도 하다. 과거를 쉽게 지우지 못하고, 그 시절의 '와우'를 기억하고 싶은 와우저들은 사설 프리서버로 모였다. 하지만 게이머들의 의도가 아무리 선하다고 해도 특정 게임의 사설 서버를 운영하는 것은 불법이다.

블리자드도 사설 서버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다만, 자신들의 게임을 좋아하는 팬들의 추억까지 훼방 놓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처음엔 '그거 뭐 해봤자 얼마나 하겠어' 정도의 대응에 그쳤다. 하지만 그 '얼마나'의 규모는 블리자드의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았다. '오리지날 와우'를 원하는 게이머들은 의외로 많았고, 그들은 자신들의 추억을 블리자드가 다시 만들어 주길 바라고 있었다.

  

이 바람은 2013년 블리즈컨을 통해 공식적으로 전달된다. '야 너네 혹시 예전 오리지널을 다시 내줄 생각은 없어?'라는 게이머의 물음에 '제이 알렌 브랙'은 'You think you do, but you don't' 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아니. 그거 막상 해보면 별로'라는 뜻이다.

  

'불타는 성전'과 '리치왕의 분노' 이후 와우가 점점 몰락해 간 건 사실이었지만, 블리자드는 '와우 오리지널'이 아닌 '드레노어의 전쟁군주'를 선택한다. 이때까지 '와우 오리지널'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이런 '관심 1도 없음'의 마음을 움직인 건 사설 서버 '노스탈리우스'의 등장이었다. '제이 알렌 브랙'의 대답에 반박이라도 하듯 수많은 게이머들이 '노스탈리우스'에 모여들었다. 불어나는 유저 수를 보며 이제는 조용히 넘어갈 만한 수준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블리자드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법적 대응을 예고했고, 이후 '노스탈리우스' 서버는 폐쇄된다. 그제서야 블리자드는 '아니 도대체 왜 이렇게 오리지널을 원하는 거야?'라며 관심을 갖게 된다.

  

'노스탈리우스'에 있던 게이머들 입장에서는 아쉽고 서운했겠지만, 그래도 사설 서버를 운영하는 것은 명백히 불법이다. 그래도 다행히 '노스탈리우스'의 모든 것이 없어지진 않았다. '클래식'이 세상에 나올 수 있는 기반이 된 데이터 '노스탈리우스 사후 분석'이 남아있었다. 이 보고서에는 당시 '노스탈리우스'서버에 있던 게이머들의 연령대, 동시접속자 수, 플레이 패턴 등의 데이터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오리지널 와우'라는 게임을 얼마나 많은 게이머들이 플레이 했는지를 데이터로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였다.

▶ 프리서버 당시의 데이터가 담긴 '노스탈리우스 사후 분석'. 이미지를 클릭하면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PDF 문서)
▶ 동시 접속자 수 데이터. 어지간한 MMORPG에 맞먹는 수치였다.
▶ 이용 연령대. 20대가 주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히 '추억팔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추억팔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2004년도 당시 게임을 즐기던 30~40대의 연령대가 가장 많아야 하지만 20대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는 점. 당시의 다른 MMORPG와 맞먹는 1만 명 이상의 동시접속자 수 등의 자료는 '단순한 추억팔이가 아니라 실제 수요가 있는 게임'임을 증명했다.

  

'해보면 별로일 거라고? 진짜로 원하는 게이머가 이렇게 많은데?' 하는 데이터를 접한 블리자드는 그제야 지금의 '와우 클래식' 개발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그것이 정말 게이머들의 마음을 읽고, 요구에 응답하는 것이었는지, 상업적 의도가 섞여 있었는지는 몰라도 블리자드는 정식으로 '그래. 한번 해볼게'라는 입장을 발표한다.

  

'제이 알랜 브랙'이 자기 게임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눈뜬장님이었다는 게 만천하에 드러난 꼴이 됐고, 질문자를 무안케 할 만큼의 자신감은 사장님의 흑역사로 남았다.

  

어쨌든 블리자드 입장에서 봤을 때 '와우 클래식'의 개발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사설 서버를 운영하는 것과 기업이 공식 서버를 운영하는 것은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냥 옛날 것 가져다 쓰면 되는 거 아니야?' 하는 정도로 쉽게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기술적 문제를 이야기하기보다는 그 결정에 주목하고 싶다.

  

현실에서의 추억은 아무런 힘이 없지만, 와우저들은 그들의 추억을 공유했고(비록 불법적인 방법이었지만), 블리자드는 이에 응답했다. '와우 클래식'이 나오기까지 블리자드도 어려운 결정을 했고, 고단한 과정을 거쳐왔다. 시작이 '노스탈리우스'였다면, 그 과정을 거쳐 결과를 만들어낸 것은 '그래도 블리자드'였다. 이렇게 '와우 클래식'은 예전 2004년의 모습을 담고 2019년의 게이머들을 찾아왔다.

이제는 더 본질적인 것에 물음표를 던져볼 차례다. '노스탈우스'의 와우저들은 왜 당시의 '오리지널' 기반의 '와우'를 플레이했던 것일까? 더 편하고, 개선되고, 진화한 확장팩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들이 믿고 있었던 '야 우리가 봤을 때는 이거 잘 될 거 같은데?'라고 여긴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MMORPG는 게이머가 게임 속의 캐릭터가 되고, 모험을 떠나며,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과정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 속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MMORPG의 재미라고 할 수 있다. 아마 '와우 오리지널'에는 게이머들이 원하는 '근본적인 재미'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요소를 제대로 제시한 MMORPG가 '와우 오리지널' 말고는 없었다. 오죽하면 10년도 더 된 게임, 그것도 정식 서비스가 아닌 사설 서버를 찾았겠는가.


고전의 저력

CLASSIC. 클래식. '고전'이라는 단어가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한다. 고전은 유행을 타지 않는다고 한다. 시대, 역사, 종교, 문화를 뛰어넘어 인간 본성의 감정을 관통하는 보편적인 가치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 '클래식'이란 단어를 붙인 건 적절했다고 본다. '와우'는 그럴만한 가치를 가진 게임이다.

  

대중문화에서 '클래식'을 주제로 한 드라마나 영화, 음악이 관심을 받을 때마다, 한쪽에서는 '그냥 지나가는 것', '유행에 뒤처지는 것', '지루함'이라는 평가가 따라붙었다. 클래식은 유행을 타지 않지만, 유행을 선도하기는 어렵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고전을 찾는 사람들은 소수이긴 했지만, 꾸준히 존재했다.

  

게임의 영역에 있는 '와우 클래식'이 발표됐을 때의 반응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라떼는 말이야를 외치는 와저씨 와줌마들의 추억팔이에 그칠 것', '그 당시의 불편함과 답답함을 참을 수 없을 것', '대기업이 된 스트리머들이 다시 돌아와 며칠 하다가 끝날 것' 등 온갖 추측과 냉소적인 반응들이 '와우 클래식'을 기다리는 와우저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리고 8월 27일 마침내 서버가 열렸다. 처음 '일반 서버 하나'라고 공개했던 것과 달리 전쟁 서버가 추가됐다. 서버 대기 인원은 8000이 넘었고, '트위치'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카테고리는 50만 명 이상의 시청자가 몰려들었다. 많은 스트리머들은 그들의 시작이 된 '와우' 방송을 다시 시작했고, 그 스트리머의 팬들도 '와우 클래식'을 플레이하며 이야기를 공유했다. 대기열을 기다리는 와우저들은 '월드 오브'워크래프트'의 스토리가 담긴 콘텐츠를 찾아보기도 했다.

▶ 트위치 카테고리 최상위는 당분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가 차지할 것 같다.

각종 커뮤니티에서는 '와우 클래식'의 이야기를 담은 게시글이 늘어났다. 각종 공략이나, 도움이 되는 애드온, 해외의 소식이 공유됐다. 처음 '와우 오리지널'이 등장했던 시기의 모습과 비슷했다. 그리고 대부분 '이 정도로 인기 있을 줄은 몰랐다'는 반응을 보였다.

  

결국, 노스탈리우스에 있던 와우저들의 의지, '클래식의 저력'은 어느정도 증명한 셈이다. 10년도 더 된 게임이 이렇게 많은 인기를 얻는 이유, 초기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가 추구했던 MMORPG의 본질이 2019년의 많은 게이머들에게 전달된 것이다.

  

나즈자타에서 진주 노가다를 하던 나도 '도대체 뭐 어떤 재미가 있길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대기열을 기다리면서까지 클래식을 하려고 하는 걸까?'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이제는 끝난 장르'라고 생각한 MMORPG, 그것도 10년이 더 지난 게임에 열광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대기순위는 1만명에 육박하고 있다.

연약한 필멸자

'와우 오리지널'을 해본 적 없지만, '대격변'부터 오랫동안 와우를 플레이한 입장에서 '와우 클래식'은 '전혀 다른 게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전반적인 인터페이스는 지금의 '격전의 아제로스'와 크게 다를 게 없었지만, 전반적인 플레이 방식이 완전히 다른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도 그랬다.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고, 불편했고, 하나 제대로 알려주는 것도 없었다. '뭐야. 미니맵에 느낌표도 없어?' 말 그대로 내 캐릭터는 아무것도 없이 필드에 떡하니 던져졌다. 요즘 MMORPG에서 유행처럼 사용하는 '어디로 가세요. 누구 클릭하세요. 몇 마리 잡아 오세요. 스킬을 찍어볼까요? 잘하셨어요 보상을 드릴게요'하는 '강제 가이드'가 없었다.

  

뭘 알려주는 게 없으니, 자연스레 옆에 뛰어다니는 사람을 붙잡고 이것저것 물어보고, NPC들을 하나씩 찾아가며 대화를 걸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뼈다귀들이 '데스넬' 곳곳을 바쁘게 뛰어다녔다. 다들 '어떻게 하나요. 어디로 가나요. 같이 파티하실 분 계신가요'를 물어봤고, 퀘스트를 위해 그 내용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 퀘스트 몹 앞에서는 차례대로 줄을 섰다.

  

'브릴' 앞마당에 줄 서서 리넨 옷감과 가방을 교환했고, '언더시티'에서 나가는 길을 물어보고, 지나치는 마법사와 사제들은 자연스럽게 버프를 둘러줬다. 지금의 '격전의 아제로스'에서는 완전히 사라진 것을 경험했다. 그 와중에 '이거 뭐 언제까지 하는 거야. 만렙 멀었나? 근데 디스코드도 없던 시절, 던전은 어떻게 돌았고 레이드는 어떻게 깼지?'라는 생각을 했다. 오로지 편리함과 보상, 혼자 하는 게임에 익숙해진 습관이 그 짧은 시간의 불편함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정신 차리고 주변을 돌아보니 나와 비슷한 사람이 많았다. 웃긴 건 투덜거리면서도 열심히 뛰어다녔다는 점이다. 시간이 지나니 이 불편함은 오히려 진짜 오픈 월드에 놓여 있다는 느낌을 받게 했다. 같이 뛰고, 때리고, 거래하며 다양한 사람과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지금의 MMORPG는 대부분 혼자서도 모든 걸 할 수 있도록 짜여있다. '격전의 아제로스'와 비교하자면 쐐기나 레이드를 제외하고는 '누군가와 뭔가를 같이한다'라는 게 굉장히 드문 일이다. 쐐기나 레이드도 겉으로나 '팀플레이'를 표방하고 있지, 사실은 개인의 '레이더' 점수와 '로그'가 더 중요하다. '격전의 아제로스'에서 공유하는 것이라곤 '보급 어디 떨어짐'과 '녹슨 깃털 젠'뿐이다. 한 달 동안 '격전의 아제로스' 글로벌 파티에서 나눈 대화보다, '와우 클래식' 몇 시간을 하면서 대화한 경우가 더 많았다.

▶ 많은 뼈다귀들이 옷감을 모아 가방으로 바꾸기 위해 줄을 섰다
▶ 퀘스트 지역에서는 '파티 있나요?'를 쳤다.
▶ 목표가 지도에 표시되지 않는다. 퀘스트 내용을 잘 읽고 길을 직접 찾아가야 한다.

느리고 불편했지만 '와우 클래식'에는 성취감이 있었다. 퀘스트와 퀘스트를 거치면서 '아 내가 지금 뭔가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구나'하는 느낌이 들었다. 필드의 박쥐나 사냥개를 열심히 잡았고, 도로의 이정표를 보면서 '데스넬, 브릴, 언더시티, 밀농장'이 어디 있는지 자연스럽게 익혔다.

  

간혹 같은 퀘스트를 하는 사람을 보면 파티를 맺기도 했고, 높은 레벨의 몹이 있을 때는 다른 누군가가 올 때까지 기다렸고, 서로 물약이나 가방을 주고받기도 했다. 파티는 목표를 위한 '협력'을 기반으로 생성됐다. 확실히 '숙제 빨리하실 분들은 같이 합시다'하는 '격전의 아제로스' 느낌과 달랐다. 필드에 있는 대부분의 플레이어가 나와 비슷한 처지였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이 홀로 던져진 연약한 필멸자였고, 그래서 '우리'는 서로서로 도왔다.

  

내 캐릭터는 한없이 약한 존재였다. 얼라이언스는커녕 주변에 돌아다니는 박쥐 한 마리에도 쩔쩔맸다. 필드에 있는 몹 하나에도 최선을 다해야 했다. 1:1 도중에 다른 몹들이 달려들면 도망치기 바빴다. 늑대 하나를 잡기 위해 마나를 다 태웠고, 중간에 다른 늑대가 다가오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내가 가진 스킬이 어떤 효과를 주는지 직접 맞고 때려가며 알게 됐고, '피함, 빗나감, 저항' 과 같은 단어들을 보며 스킬들을 소중하게 사용했다. 느리고, 강하지도 않고, 타격감도 별로인 전투였지만, 퀘스트에 표시된 숫자를 채워나갈 때, 처절한 1:1 끝에 버섯을 먹으며 체력을 회복할 때의 뿌듯함이 있었다.

▶ 2:1은 절대 비겁한 것이 아니다. 생존을 위한 필수 전략이다.
▶ 천천히 강해지는 법을 배워나간다.

요즘같이 빠른 템포, 화려한 그래픽을 앞세운 MMORPG는 '최대한 많은 무리의 몹들을 몰아서 광역기로 정리'하는 방식을 제시한다. 그러나 기본이 '1:1'에 맞춰진 '와우 클래식'에서는 혼자 있을 때 몹 두 마리가 달려드는 순간 도망칠 준비를 해야 한다. 이렇게 느린 진행 방식은 답답하긴 했지만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확실히 알 수 있게 해줬다.

  

느림과 답답함 속에서도 스킬 레벨을 올릴 때마다 '아 내가 아제로스에서 모험을 하며 성장하고 있구나'라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격전의 아제로스'에서의 퀘스트는 '과제'와 같았다. 하지만 '와우 클래식'에서의 퀘스트는 '과제가' 아니라 '이야기'였다. 거북이를 바다에 닿게 하라는 밑도 끝도 없는 억지와는 달랐다. 과정 자체가 나만의 스토리였다.

  

위상으로 갈기갈기 찢어진 채 '당신은 영웅입니다. 당신이 있는 세계에서 많은 NPC들과 대화하며,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세요. 하지만 다른 플레이어는 당신이 있는 위상에 올 수 없습니다. 던전이나 레이드는 파티찾기 메뉴를 사용하세요' 하는 세계가 아니라, 실제로 나와 같은 처지의 나약한 존재들이 모여있는 브릴과 은빛 소나무 숲의 이야기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곳을 향한 발걸음,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험, 나보다 강한 존재에 대한 도전, 점점 강해지고, 좋은 아이템을 모아가는 기쁨,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 편리함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고, 오로지 자신의 강해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최근 MMORPG에선 찾아볼 수 없는 잔잔한 재미와 나만의 이야기가 느껴졌다. '아 이래서 재밌다고 하는 거구나'


격전의 힐스브래드

9월 2일 저녁. 8000명이 넘는 대기열이 줄어들기를 기다리며, '와우 클래식' 방송을 보고 있었다. 우연인지, 아니면 스트리머들끼리 약속이라도 했는지 당시 대부분의 와우방송은 '힐스브래드'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 '격전의 아제로스'에서는 정말로 보기 드문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추억팔이'의 하이라이트. '와우 클래식'을 하는 모두가 기대했던 '필드쟁'이었다. '격전의 아제로스'에서 추구하던 '호드를 위하여'와 '아제로스를 위하여'의 무대는 '나즈자타'나 '메카곤'이 아닌 예전 쪼렙들은 울고 넘었던 '힐스브래드'였다.

  

물론 '격전의 아제로스'에서도 이런 대규모 전쟁이 일어날 때가 있다. 하지만 필드쟁의 성격이 조금 다르다. '나즈자타'의 '새터' 앞에서 간혹 발생하는 이 '필드쟁'은 '주간 25명' 퀘스트의 보상을 위해서다. 일종의 '숙제'와 같은 개념이다. 서로의 경비병들을 끌어오는 줄다리기 몇 번을 하다가 주어진 25라는 숫자만 채우면 금방 파티를 떠나는 일종의 '주간 이벤트'와 같다.

  

하지만 이번 '힐스브래드'의 필드쟁은 이득을 위한 것보다 '호드', '얼라이언스'라는 소속감을 기반으로 발생했다. 스트리머와 시청자들, 퀘스트를 위해 지나가던 와우저들이 자연스럽게 모였다. 일부러 꾸며낸 것도 아니고, 사전에 약속한 것도 아니고, 보상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이런 이야기가 생긴 것이다.

  

이번 '힐스브래드 필드쟁'이야 말로 게이머들 '와우 클래식'에 기대하던 모습이었을 것이다. 나 역시 방송을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과 함께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누구나 최고일 필요는 없다.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할 때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MMORPG의 재미가 그곳에 있었다. 아이템 레벨이나 유물력이 아니라 단지 '호드', '얼라이언스' 라는 소속감으로 다양한 레벨의 게이머들이 뭉쳤다.

  

'얼라가 방해한다고?', '지금 힐스브래드 한 판 붙었다네요. 파티 짜서 가실 분'. 이런 것처럼 '와우 클래식'에서는 언제든 상대방 진영을 만날 수 있으며, 사소한 싸움이 결국 큰 진영 전쟁으로 번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가 아닐까 한다.

  

이런 과정들 하나하나가 개개인의 스토리가 되는 것이고, 이게 모여서 자연스레 '와우 클래식'의 새로운 역사가 될 것이다.

▶ 격전의 힐스브래드
▶ 새터 필드쟁은 주간 이벤트 같은 것이다.

결국엔 돌아올 '본섭'

지금 '와우'는 새로운 변화를 맞이했다. 기존의 가장 큰 갈등이 '호드 vs 얼라'라고 했다면, 이제는 '클래식 vs 본섭'의 구도가 추가됐다. 불편하고, 오래 걸리더라도 예전의 추억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은 사람들, 지금의 MMORPG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재미를 추구하는 게이머들은 '본섭'을 떠나 '와우 클래식'을 찾는다.

  

'와우 클래식'이 많은 관심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 가지 중요한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여전히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본섭'은 '격전의 아제로스'라는 점이다. 블리자드가 정말로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는 이상 '클래식이 잘 되네. 이제 격아는 내놓은 자식이야. 우리는 불성과 리분으로 간다!' 같은 막장 선택을 하지 않는 이상 '격전의 아제로스'이후의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

  

'와우 클래식'의 인기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엔 본섭으로 되돌아올 와우저들을 맞이할 준비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와우 클래식'도 이제 만렙유저가 나오기 시작했고, 레이드 보스의 킬 소식도 들려오고 있다. '클래식'도 언젠가는 '성장'이라는 콘텐츠가 소진될 것이고, 그 과정이 변질돼 '편하게, 빠르게'를 유도하는 게임 방식도 나타날 것이다.

  

무엇보다 '클래식'에는 기술적으로 불편한 요소들, '클래식'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할 껄끄러움이 남아있다. 144Hz의 모니터를 써보면 60Hz가 불편한 것처럼, USB를 쓰다가 CD를 사용하는 것처럼 '필연적인 불편함'에 많은 게이머들이 피로감을 느끼는 순간이 올 것이다. 

출처: 레딧
▶ 감성이라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굳이 이렇게 까지는

실제로 2019년의 편리함에 익숙해진 '격전의 아제로스' 와우저들도 초반 레벨업의 불편함을 견디지 못한 경우가 많다. 이들에게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이야기보다는 '만렙'이라고 하는 결과에 도달하는 것이 더 익숙할 것이다. 게임을 접하는 방식과 바라보는 관점을 두고 '옳다 그르다'를 판단할 순 없다.

  

하지만 분명 '불편함이 감성을 넘어가는 순간'은 올 것이다. '클래식'유저들 중에는 처음인 사람도 있겠지만, 현재의 MMORPG들이 제시한 편리함을 맛본 사람도 많다. 여기에 10여 년 전과 달리 더 편하고 빠르게 게임 진행을 도와줄 장치들, 게이머들의 상향 평준화된 실력도 작용할 것이다. 크게 들어온 물은 나갈 때도 크게 빠져나간다. 의외로 '와우 클래식'의 유저 이탈은 빠르게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

▶ 좋은 사람도 있고, 불편한 사람도 있는 법

'제이 알렌 브랙'도 이제는 알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게이머들이 어떤 것을 원했고, 또 앞으로 어떤 것을 기대하게 될지를. 더불어 블리자드 코리아도 이토록 많은 사람이 몰릴 것을 예상하지 못해 허겁지겁 서버의 수용 인원을 늘리고, 2번째 전쟁 서버를 열면서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게이머들 역시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MMORPG의 재미'를 느끼게 됐다. 지금까지 MMORPG 게임들이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던 재미가 어떤 것인지 새롭게 알게 된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블리자드의 대응이다. 지금까지 이끌어온 와우를 앞으로 어떻게 풀어나갈지를 고민해야 한다. '와우 클래식'은 앞으로 '불타는 성전'과 '리치왕의 분노'가 준비되어 있다. 점점 더 절정으로 가는 길만 남았고, 성공이 보장된 상태다. 그렇다면 '본섭'에 집중해야 하고, 그동안 유저들이 꾸준히 제기해온 불만 사항을 다시 한 번 돌이켜봐야 한다.

무너지는 스토리, 강제되는 유물력 노가다, 무작위 요소로 망쳐놓은 장신구 발동 효과와 벼림 아이템, 해저장비, 글로벌 쿨, 위상, 직업 밸런스 등 유저들은 꾸준히 그리고 오랫동안 의견을 제시해왔다. 지금 '와우 클래식'이 결국 '내 생각이 틀렸네. 유저들의 선택이 맞았어'를 증명했고, 이를 받아들인 것처럼 오랫동안 본섭을 지켜온 유저들의 요구사항과 진지한 의견에 귀 기울이는 계기가 되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와우 클래식'은 이미 어느 정도 방향을 제시했다. '노스탈리우스 사후 분석'이 '와우 클래식'에 영향을 미친 것처럼 '와우 클래식 리포트'와 같은 데이터가 '격전의 아제로스' 이후에 등장할 확장팩에 제대로 된 역할을 하길 바란다. 누군가는 '와우의 황혼기에서 클래식의 여명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제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라는 게임이 저무는 해가 되지 않도록, '격전의 아제로스'에서 황혼으로 접어들지 않도록 노력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글/ 더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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