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겜 개발사 너티 독의 길고 긴 역사들

조회수 2018. 3. 20. 17:0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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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두 명의 중학생이었다.

‘언차티드’와 ‘더 라스트 오브 어스’로 2010년 이후 최고의 게임 개발사로 등극한 너티 독. 수많은 갓겜들을 만든 만큼, 개발사 너티 독의 명성은 게이머들이라면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번 에피소드에서는 갓겜 개발사 너티 독의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한다. 게임 업계의 변천사의 산증인이자, 페이스북과 구글 창업신화에 뺨치는 대단함을 보여주는 너티 독. 너티 독은 어떻게 플레이스테이션 진영 최고의 개발사가 되었을까? 

두 명의 중학생과 가내수공업

▶ Jason Rubin과 Andy Gavin

때는 1984년, 후에 너티 독의 공동 창립자가 되는 Andy Gavin과 Jason Rubin은 자신들의 이름을 따. ‘JAM(Jason and Andy's Magic) 소프트웨어’를 설립한다. 두 명의 동갑내기는 애플 2 컴퓨터를 이용해, 닌텐도에서 발매한 ‘펀치 아웃!!’을 완벽히 뺏겨내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저희는 그걸로 다른 격투 게임을 만들 수도 있었지만, 그러는 대신에 모든 캐릭터를 완벽하게 복사해 넣었습니다. – Andy Gavin (interviewed with IGN)

중요한 사실은, 이때 이들의 나이가 겨우 만 14세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14살의 소년들은 백업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었고. 그들이 겨우 ‘만들어낸’ ‘펀치 아웃!!’의 해적판은 그렇게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백업의 소중함을 깨달은 대신, 소중한 데이터들을 날려버린 두 명의 14살 소년들은 자신들만의 새로운 게임을 만들기로 결정한다. 이렇게 JAM 소프트웨어의 첫 번째 타이틀이자, 두 동갑내기의 첫 번째 정식 타이틀인 ‘Math Jam’의 제작이 결정되었다.

1985년에 발매된 ‘Math Jam’은 산수에 대해 가르쳐주는 교육용 게임이었다. Gavin과 Rubin은 15살의 나이에 ‘Math Jam’을 출판하였고, 지퍼 백에 5인치 디스크와 설명서를 넣어 학교들 대상으로 판매를 시작했다.

   

Rubin과 Gavin은 15살의 나이에 게임 판매를 위해 직접 영업도 뛰며 마케팅도 하는 비범함을 보여줬다. 그러나 어차피 게임을 만들 것이라면, 차라리 두 명 모두 좋아하고 즐길만한 게임을 만드는 게 더 즐거운 일이며, 비즈니스적으로 현명한 일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윽고 16살의 나이에 제작한 ‘Ski Crazed’는 1,500장의 판매수를 기록했고, 이는 16세의 나이로는 충분히 의미 있는 기록이었다. 물론 1,500장의 판매량으론 구매하고자 했던 신형 디스크 드라이브를 사기엔 턱도 없이 모자랐지만. 둘은 퍼블리셔의 지원을 받아, 신형 디스크 드라이브를 구매해 새로운 게임을 제작할 수 있었다.

▶ 초창기에는 JAM 소프트웨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1987년. 다음 작품이었던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 ‘Dream Zone’은 큰 성공을 거둬 1만 장의 판매량을 달성한다. 둘은 17세에 1만 5천 달러의 수익을 거뒀고, 둘은 연속된 성공으로 더 높은 꿈과 야망을 꿈꾸기 시작했다. 

   

둘은 기존의 퍼블리셔와 관계를 정리하고, EA(그 EA 맞다)에 전화로 직접 연락하여 퍼블리셔 계약을 따낸다. EA로부터 1만 5천 달러(물론 이 정도론 턱도 없어 더 지원을 받긴 했다)를 지원을 받아, 1989년 RPG ‘Keef the Thief’을 발매하기로 결정한다.

두 명의 대학생 ‘너티 독’이 되다.

▶ 둘은 스스로를 ‘버릇없는 개’라고 부르는 걸 좋아했다. /너티 독의 초창기 로고

10대의 나이에 대형 퍼블리셔들에게 직접 전화하여 계약을 따내는 것이 비범치 않은 일인 것은 Gavin과 Rubin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야망과 넘치는 자신감을 표현하고자,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버릇없는 개(Naughty Dog)’라고 소개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얼마 안가 둘은 사명을 ‘너티 독’으로 변경하게 된다. 

    

EA의 밑에서 일하면서 둘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맛보게 된다. 또한 1991년 발매한 ‘Rings of Power’가 세가 제네시스(메가 드라이브)로 10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큰 성공을 보이자, 둘은 콘솔 게임이 PC 게임에 비해 가지는 장점들에 깨닫게 된다.

▶ ‘Rings of Power’와 ‘EA 매든 92’. 매든 시리즈는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게임 시리즈이다.

한편 동시에 자신들이 원하는 게임을 만들 수 없다는 씁쓸함도 느끼게 된다. ‘Rings of Power’는 게임 매장에서 매진될 만큼 잘 나갔던 게임이었지만, 스포츠 게임을 중시하던 EA 마케팅 부서의 판단으로, 메모리 칩 생산 비용이 더 나가던 ‘Rings of Power’의 생산을 중단하고 ‘존 매든’ 시리즈를 더 찍어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결국 너티 독은 잠시 동안 게임 제작을 그만두기로 결정한다. 서로 다른 주(州)에서 대학을 다니며, 모뎀으로 서로의 결과물을 공유하며 작업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고, 무엇보다 대학 졸업을 앞둔 시기에선 게임 제작에 집중할 여유가 더욱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 큰 무대로 나아가는 너티 독

물론 둘은 얼마 못 가 다시 게임산업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들이 게임 개발을 잠시 쉬는 사이, 게임 업계에는 3D가 유행하기 시작했고. 자신감과 열정이 넘치던 두 청년에게 3D는 도전해볼 대상으로 여겨졌다.

   

이때, EA와의 쌓은 인연이 너티 독에 큰 도움을 주었다. EA의 창립자였던 ‘Trip Hawkins’가 3DO의 개발자용 기기를 써보지 않겠냐고 너티 독에 직접 연락한 것. 1991년에 EA를 나와 ‘The 3DO Company’를 차린 ‘Trip Hawkins’는 너티 독이라면 3DO를 위한 좋은 게임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출처: Evan Amos
▶ 콘솔 경쟁에 야심 차게 뛰어들었지만 흑역사로 끝나버린 3DO

너티 독은 1993년 곧바로 3DO로 게임 개발을 시작했다. 하지만 EA에서 겪었던 퍼블리셔의 간섭과 제한에 대한 불쾌한 경험으로, 너티 독은 자체적으로 자금을 조달해 게임을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개발이 길어지자, 모아둔 돈이 다 떨어져가며 둘은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다. 특히 Rubin은 게임을 만들며 동시에 MIT 석사 코스를 밟고 있는지라 라면을 먹으며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힘든 고난 끝에. 너티 독은 사비를 들여 1994년 CES(소비자 가전 전시회)에서 ‘Way of the Warrior’를 공개한다. 퍼블리셔들 간의 입찰 경쟁이 시작되었고, 너티 독은 The 3DO Company와 유니버셜 그리고 Crystal Dynamics(툼 레이더의 제작사) 중 한 곳을 골라야 했다.

   

Crystal Dynamics는 ‘Way of the Warrior’의 엔진을 이용해 새로운 격투게임을 만들고 싶어 했고, 너티 독을 개발에 활용하고 싶어 했다. The 3DO Company의 창립자인 ‘Trip Hawkins’는 공정하고 좋은 조건들을 제시했지만, 3DO 콘솔 자체의 미래가 불투명했다.

   

결국 너티 독은 게임 제작에 별다른 간섭과 제한을 두지 않으며, 자본적으로도 안정적이고, 스튜디오의 위치도 좋았던 유니버셜과 계약을 하기로 결정한다.

새로운 동료를 영입하다

너티 독은 여태껏 2명이서 개발했지만, 둘은 ‘Way of the Warrior’을 개발하며 한계를 느꼈다. 예전과는 달리 게임 개발은 전문화와 세분화가 이뤄져 협업이 필요해졌다. 결국 개발자의 영입이 필요해졌고, 유니버셜의 지원하에서 시각효과 작업에 경험이 있는 Taylor Kurosaki(‘인피니트 워페어’의 각본가 맞다)와 Gavin의 MIT 친구 Dave Baggett를 영입하였다.

   

너티 독의 직원은 모두 4명뿐이지만 서로 동고동락하였고. 각자가 만들고 싶어 하는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오기 시작했다. 정말 다양한 아이디어와 영감들이 나왔고, 다음 작품은 3D 게임으로 해보자는 아이디어도 나왔다.

▶ 닌텐도 64, 플레이스테이션, 세가 새턴

당시는 3D 게임이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수준이었지만, 소니(SCE, Sony Computer Entertainment)와 닌텐도 그리고 세가는 모두 다음 콘솔 기기를 3D 게임에 핵심을 두었다. 너티 독은 이들 세 곳 중, 한 곳과 손을 잡고자 했으며, 그중 소규모 개발사에 가장 친화적이었던 소니를 선택했다. 너티 독과 소니의 만남이 시작된 것이다.

크래시 밴디쿳: 소니와의 협력이 시작되다.

출처: 너티 독
▶ Andy Gaviin과 Jason Rubin

화려하고 치열했던 당시 콘솔 경쟁 중에서 소니가 가장 불리했던 것이 있다면 바로 마스코트를 비롯한 킬러 타이틀의 부재였다. 마리오와 소닉이라는 지금도 강력한 캐릭터들을 상대로 소니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나 다름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 너티 독이 소니에 보낸 ‘크래시 밴디쿳’의 데모 플레이 테이프는 소니에게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전까지는 너티 독의 결과물에 일체 관심을 가지지 않던 소니지만, ‘크래시 밴디쿳’의 데모를 보고 난 뒤 직접 너티 독에 찾아갈 정도로 반해버리고 만다.

▶ 1996년 E3/ 사진출처: 너티 독
출처: 너티 독
▶ E3에서 ‘크래시 밴디쿳’을 플레이 중인 미야모토 시게루

행운일까? 마스코트의 부재로 고심하던 소니는 곧 다가올 1996년 E3에 ‘크래시 밴디쿳’을 간판 부스로 띄워 놓았다. 소규모 개발사였던 너티 독은 소니와의 첫 인연부터 ‘간판 취급’을 받기 시작한 셈이다.

   

한편 ‘크래시 밴디쿳’이 발매되었던 1996년엔 ‘슈퍼 마리오 64’와 ‘나이츠 인투 드림’도 발매되었다. 게임 역사계의 걸작이라 불리는 ‘슈퍼 마리오 64’였던 만큼, ‘크래시 밴디쿳’은 ‘슈퍼 마리오 64’에 비교되어 평가가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크래시 밴디쿳’은 독자적인 마스코트가 필요했던 플레이스테이션에겐 최고의 게임 중 하나였다. 물론 소니와 닌텐도 그리고 세가의 피 터지는 콘솔 경쟁에서 ‘크래시 밴디쿳’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지만, 소니와 너티 독 사이의 협업과 신뢰를 쌓기에 ‘크래시 밴디쿳’은 더없이 중요했다.

크래시 밴디쿳 그리고 유니버셜

(지금도 그런 경향이 없지 않아 있지만) 마스코트 캐릭터보다 플레이스테이션이라는 자사 브랜드를 더 중시했던 소니였지만, 크래시 밴디쿳을 비롯해 파라파 더 래퍼와 같은 게임의 흥행은 소니의 인식을 바꾸기엔 충분했다.

   

너티 독은 크래시 밴디쿳의 다음 작품인 ‘크래시 밴디쿳 2: Cortex Strikes Back’을 다음 년도에 발 빠르게 발매한다. 크래시 밴디쿳 2도 전작과 같은 훌륭한 흥행과 비평을 얻으며 전 세계적으로 성공하기에 이른다. 

   

소니가 너티 독에 흠뻑 빠지게 된 것은 ‘크래시 밴디쿳 2’의 일본 시장 성공도 컸다. 소니는 서구권에서 만든 게임이 일본에서 성공한 적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플랫포머 게임 캐릭터들의 고향에서 ‘크래시 밴디쿳 2’가 성공했다는 것은 소니에게도, 그리고 너티 독에게도 큰 의미를 가졌다.

   

한편 너티 독과 계약을 맺고 있던 유니버셜과의 관계는 점점 복잡해져 가기 시작한다. 분명 ‘크래시 밴디쿳 시리즈’의 판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유니버셜이었고, 너티 독에 자금을 지원하는 것도 유니버셜이지만. 게임 제작에 아무런 경험도 지식도 없던 유니버셜 밑에선 너티 독의 미래는 불확실해 보였다.

    

‘크래시 밴디쿳: Warped’와 ‘크래시 팀 레이싱’까지 성공적으로 발매해가며, 너티 독과 소니의 협업관계가 두둑해져 가는 사이. 유니버셜에 대한 너티 독의 불안은 더욱 커져만 갔다. 너티 독은 더 나은 미래와 작업 환경을 위해 유니버셜과 작별할 수 밖에 없었다.

▶ 유니버셜은 ‘크래시 밴디쿳’의 제작과 관리를 방임하는 수준이었다.

유니버셜과의 작별은 현명한 판단이었다. 유니버셜은 곧 세계 최대의 미디어 그룹을 노리던 비방디에 인수되었다. 이후 비방디가 유니버셜과 블리자드에 가한 경영 실수와 구조조정들을 고려해본다면, 너티 독의 미래는 아예 산산조각 났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소니의 퍼스트 파티가 되다

유니버셜에서 독립한 뒤, 너티 독은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옛날의 너티 독은 2명 혹은 4명이서도 충분히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게임을 개발해가면서 너티 독의 규모는 점차 커져갔고, 30여 명 정도의 직원을 독립 자본으로 유지시키기란 꽤나 버거운 일이었다.

   

특히 플레이스테이션에서 플레이스테이션 2로의 변화는 더 다양한 작업을 할 수 있음을 의미함과 동시에 더 많은 개발비와 인력이 들게 됨을 의미하기도 했다. 너티 독은 예전처럼 두 명의 대학생이 꼴리는 대로 만들어가던 상황이 아니게 되었다.

    

너티 독의 공동 창립자인 Gavin과 Rubin은 소니의 도움을 받기로 결정했다. 소니와 너티 독의 관계는 이미 최고였고, 서로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소니가 예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저작권이다.

    

소니와 너티 독이 ‘크래시 밴디쿳 시리즈’를 힘들게 키워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막대한 마케팅비를 들여가며 기껏 플레이스테이션의 마스코트로 키워놨더니, 정작 캐릭터의 소유권은 소니도 너티 독도 아닌 유니버셜이 가지고 있었다. 소니는 유니버셜이 ‘크래시 밴디쿳’을 다른 콘솔 기기로 내놓더라도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 너티 독의 손을 떠난 크래시 밴디쿳 시리즈는 Xbox와 게임큐브로도 발매되었다.

결국 소니의 지원을 받기 위해선, 너티 독은 소니에 ‘완전히 소속’되어야만 했고, 소니는 너티 독의 저작물을 활용하고 지켜내기 위해선 너티 독을 ‘완전히 소유’해야만 했다.

   

게임 업계 역사에서 대부분의 인수 사례들은 불행한 역사로 남게 되었지만. 소니의 너티 독 인수는 양자에게 성공적인 거래가 되었다. 너티 독은 소니의 지원 덕에 재정적인 위험과 압력을 견뎌낼 수 있었고, 소니는 너티 독이라는 소중한 스튜디오(그리고 저작물)를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언차티드 그리고 플레이스테이션 3

소니의 퍼스트 파티가 된 너티 독은 이후 ‘잭 & 덱스터 시리즈’도 성공적으로 내놓으며 더욱 성장해갔다. 소니와 너티 독의 협업 관계는 날이 갈수록 발전했고, 둘의 신뢰도 계속해서 두터워졌다.

   

한편 플레이스테이션 3의 발매를 준비해오던 소니는 플레이스테이션 3를 위한 새로운 게임들을 원했다. 엑스박스 360에 비하면 후발주자였던 소니 입장에선 플레이스테이션 2와 플레이스테이션 3의 기술적 차이를 뚜렷하게 보여줄 수 있으며, 오로지 플레이스테이션 3에서만 플레이 가능한 게임을 원했다.

   

이런 상황에서 소니가 보유한 퍼스트 파티들이 빛을 발했다. 소니의 퍼스트 파티들은 소니가 자신들의 전략과 걱정거리들을 신뢰하고 논할 수 있는 대상이었으니 말이다.

▶ ‘기어즈 오브 워’로 대표되는 당시 엑스박스 360 게임들

소니는 6축 센서의 활용, 엑스박스 360보다 더 뛰어난 그래픽, 엑스박스 게임들에는 없는 새로움을 원했다. 당시 엑스박스 게임들은 ‘기어즈 오브 워’를 비롯해, 묵직한 갑옷과 마초 콘셉트를 지향했고, 소니는 엑스박스의 게임들과 대비되어 눈에 뛸만한 게임들이 필요했다. 

   

이에, 너티 독은 ‘언차티드’를 제시했다. ‘언차티드’의 콘셉트 안은 예전부터 논의되어 왔지만, 아직 ‘언차티드’를 제작할 준비는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니의 발 빠른 발매를 맞춰주기 위해, 개발은 매우 급하고 빠듯하게 이뤄져야만 했다. 너티 독에게 주어진 시간은 1년도 채 되지 않았고 필요한 작업량은 상상을 초월해 많은 개발자들이 이탈했다. 

특히 콘솔의 세대 차이는 가장 큰 문제가 되었다. 새로운 콘솔에서 작업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고, 특히 플레이스 테이션 2와 3처럼 기술의 차이가 클수록 작업에 어려움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니가 원하던 요구들까지 충족해주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계속된 야근을 거듭해가며 너티 독은 2007년 11월 ‘언차티드’를 발매했다. 플레이스테이션 3가 발매된 지 1주년이 된 시점이긴 했지만, 언차티드가 보여준 훌륭한 그래픽과 개성 있는 게임성은 플레이스테이션 3의 초기 작품으로 탁월했다.

‘언차티드’가 GOTY를 쓸어가기 시작하다

‘언차티드’를 통해 소니와 너티 독의 선택은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10개월이라는 시간 안에 급하게 만들어진 ‘언차티드: 엘도라도의 보물’은 완성도 면에서 아쉬움이 있었고. 소니의 흑역사인 6축 센서를 활용한 게임 플레이는 썩 좋은 경험은 아니었다.

   

너티 독은 ‘언차티드 2’의 제작에 좀 더 신중하게 접근했다. 전작에서 지적받은 문제점들을 개선했고, 직원들의 아이디어와 다른 회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얻은 아이디어를 게임에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전작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기술적으로도 더 개선된 ‘언차티드 2’는 2009년 최고의 게임으로 등극하게 된다. ‘언차티드 2’에 대해 입이 아플 정도로 쏟아지는 찬사들과 더불어 플레이스테이션 3는 콘솔 경쟁에서 부진을 해결할 수 있었다.

너티 독에게 더 이상 6축 센서와 같은 고통은 없었지만, 새로운 곳에서 문제가 생겼다. ‘언차티드 2’의 성공 덕에, 너티 독은 다가올 E3에서 ‘언차티드 2’이상의 임팩트와 비주얼을 보여줘야만 했고, 동시에 새로운 기술들 또한 선보여야만 했다.

   

이미 플레이스테이션 3의 기술력을 뽑아낼 만큼 뽑아냈던 ‘언차티드 2’였지만, 그 이상의 기술력을 보여주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여기에 ‘언차티드 2’의 네팔 그 이상의 임팩트를 보여줘야 된다는 부담감 역시 무시하기 힘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언차티드 3’의 수송기 추락 장면은 E3 용으로 더없이 좋은 장면이었다. 그러나 E3까지 1달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소니는 6축 센서 급의 새로운 기술을 추가할 것을 요구한다. 바로 ‘3D’였다.

지금은 VR의 열풍이 불고 있지만, 당시 2010~2011년에는 3D 입체영상의 열기가 모든 곳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게임산업뿐만 아니라 영상과 가전 제품에도 사업을 펼치는 소니였던 만큼, ‘언차티드 3’는 소니의 게임산업을 넘어, 소니의 전자기기 전반에 대한 홍보이기도 했던 셈이다.

    

너티 독은 E3 발표 당일까지 밤을 새가며 트레일러와 데모 그리고 3D 입체 기능을 동시에 작업했다. 플레이스테이션 3의 노후화된 성능, 바쁜 스케줄과 무수한 작업량에 너티 독은 ‘언차티드 3’를 만들며 많은 스트레스와 피로를 느꼈고, ‘언차티드 시리즈’는 재정비를 위해 한동안 휴식에 들어갔다.

더 라스트 오브 어스: 소니의 구원투수가 된 너티 독

한편 소니는 플레이스테이션 4를 준비하는 동시에, 플레이스테이션 3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다. ‘언차티드 시리즈’를 비롯해, ‘헤비 레인’과 같은 게임들로 플레이스테이션 3은 꾸준히 판매되고 있었고, 아직 남아 있는 유저층을 플레이스테이션 4로 팀킬을 하는 상황만은 막고 싶었을 테니 말이다.

   

소니의 계획대로라면 플레이스테이션 4은 런칭작을 통해 시각&기술적으로 진보됨을 어필하고, 플레이스테이션 3를 통해 기존 구매층의 지갑을 확보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플레이스테이션 4의 런칭작들은 기술적으로나 게임성으로나 지지부진한 성적을 보였고, 반대로 플레이스테이션 3로 나왔던 게임들은 게임 업계에 새로운 역사들을 써버리고 만다.

   

플레이스테이션 3의 마지막을 장식한 수 많은 게임들 중, 너티 독의 ‘더 라스트 오브 어스’와 락스타 게임즈의 ‘Grand Theft Auto 5’는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하지만 플레이스테이션 4로는 해당 게임들을 할 수 없었고. 결국 팔았던 플레이스테이션 3를 다시 구매하는 사람까지 나올 정도로 인기가 역행하고 만다.

이런 상황에서 소니는 너티 독을 구원투수로 등판시키기로 결정한다. ‘할 게 없는’ 플레이스테이션 4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일단은 ‘더 라스트 오브 어스’를 플레이스테이션 4에 리마스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더 라스트 오브 어스 리마스터드’의 결과는 훌륭했고, ‘블러드본’으로 플레이스테이션 4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잠재우기까지 ‘더 라스트 오브 어스 리마스터드’는 충분한 시간을 버텨주었다. (최근에는 PS4 PRO를 위해 네이티브 4K와 HDR 업데이트도 추가되었다.) 

소니에게 가진 최고의 와일드카드 너티 독

너티 독은 소니가 가진 최고의 와일드카드가 되었다. 소니는 어떤 행사더라도 너티 독을 등판시키는 것만으로 행사의 이목을 끌 수 있게 되었다. 소니가 발표해야 될 게임들의 조합이 썩 좋지 않더라도, 너티 독 하나만으로 행사의 분위기를 바꿀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실제로 ‘플레이스테이션 익스피리언스 2016(PSX)’에서는 꽤 많은 정보들이 공개되었지만, 결국 모두의 기억에 남은 것은 ‘너티 독의 게임들’뿐이었다.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와 ‘언차티드 4: 더 로스트 레거시’는 충분히 열광할만한 게임이 맞지만, 달리 말하면 이 두 게임을 제외하곤 소니의 패 조합은 썩 좋지 않은 상태였다. (즉, 꼴리는 게임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만으로 PSX 2016은 호응을 얻어낼 수 있었다.

너티 독은 단순한 ‘퍼스트 파티’라고 하기엔 이미 운명 공동체를 넘어. ‘플레이스테이션’의 상징이자 ‘플레이스테이션’ 그 자체인 게임 개발사가 되었다. ‘언차티드’와 ‘더 라스트 오브 어스’ 없는 플레이스테이션을 상상할 수나 있을까?

   

두 명의 중학생이 만든 게임 제작 그룹은 어느새 모두가 선망하는 최고의 개발사로 거듭나게 되었다. 너티 독은 예전처럼 무례하진 않지만, 그래도 아직도 아마추어 문화가 공존하고 있다. 어쩌면 ‘꼴리는 대로 만드는 버릇없는 작업 방식’이야말로 너티 독이 가진 최강의 무기이자, 갓겜을 만드는 비결이 아닐까

번외: 일상이 되어버린 야근과 불규칙적인 스케줄

‘언차티드 4’의 성공과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로 멈출 줄 모르는 인기를 누리고 있는 너티 독. 매 게임마다 흥행과 비평,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며 승승장구를 거듭해오고 있지만 이제는 새로운 문제를 해결해야 될 때가 되었다.

   

(한국에선 일상이지만) 제대로 된 휴가 기간도 주어지지 않은 채, 10년간 매일 회사에서 야근을 하고. 소니의 요구들과 여러 행사들의 스케줄을 맞춰가며 쉴 새 없이 작업을 하는 것은 결코 건강에 좋은 환경이 아니다. 

   

너티 독이 갓겜들을 만들어내는 최고의 개발사인 것은 지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크래시 밴디쿳’과 같은 신선한 게임을 위해서, 그리고 직원들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이제는 잠시 쉬어가도 좋을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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