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이름이 없는 소설이 있다구요?

조회수 2018. 8. 13. 09: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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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는 어때요?
개츠비, 앤, 톰 소여. 많은 사람들이 소설을 기억할 때 주인공의 이름을 먼저 떠올립니다.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이름도 소설에 몰입하고 기억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 같은 러시아 작가의 작품을 읽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등장인물의 이름과 호칭이 복잡하기 때문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이름의 중요성은 더욱 커집니다. 그러나 어떤 작가들은 이런 중요한 요소, 활용 가능한 장치를 과감히 포기하고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주인공 혹은 등장인물의 이름이 없거나 모호한 작품들을 만나보겠습니다.
고양이가 화자가 되어 주인과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매력 넘치는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나는 고양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 고양이는 고양이로 부르면 충분하다 할 수도 있겠지만 나비, 뽀송이, 에핑이처럼 이름으로 부르는 것보다는 덜 친근하지 않나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우연히 인간의 삶에 끼어들게 된 고양이가 주인과 그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며 유머와 풍자를 섞어 들려주는 일상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허세와 출세에 대한 욕망, 지극히 인간적인 삶의 고민들을 고양이의 시선에서 바라보기에 강렬하고 신선하게 느껴지죠. 이야기를 읽어나가다 보면 인간이 가치 있다고 믿고, 의미를 부여하는 많은 것이 정말 중요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자연스럽게 닿게 됩니다.

고양이 자신은 이름이 없지만 주인이나 그 지인들, 이웃 고양이들에게는 일일이 이름과 별명을 붙여 칭합니다. 완전히 단절된 존재는 아니라는 거죠. 인간의 세상에 속해 있는 것도, 인간 세상 밖의 야생에 속한 것도 아닌 중간적인 관찰자로서 두 세계의 연결고리가 되어 인식의 전환, 사고의 환기를 이끌어 내고 있는 겁니다. 고양이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이 이름 없는 고양이의 파란만장한 삶은 어떻게 펼쳐지는지 한 번 만나 보는 건 어떨까요.


<소송>은 <변신>과 함께 카프카의 잘 알려진 대표작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영문 모를 소송에 휘말려 감시를 받고, 조사를 당하고, 재판에 불려 다니죠. 재판의 방식도, 시간도 기묘하기 짝이 없습니다. 소송 당하는 이유도 알지 못하고, 언제, 어디서, 어떤 기준으로 판결이 내려질 지도 예상할 수 없는 기묘한 상황에 빠진 주인공의 혼란과 절망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소설입니다.

<소송>의 주인공 이름은 ‘요제프 K’입니다. ‘이름이 있는데?’싶으실 지도 모르지만 이 이름에서 주목해야 하는 건 K입니다. 모호함, 특정 불가능, 익명성이 담긴 이름입니다. 카프카 자신의 이름에도 K가 들어가기에 카프카의 이야기일 거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카프카의 작품을 읽을 때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그의 아버지입니다. 자수성가한 상인이었던 아버지는 한 없이 나약해 보이는 카프카를 압박하며 몰아붙였다고 하죠. 어쩌면 카프카는 ‘K’라는 익명의 캐릭터에 자신을 숨긴 채 아버지라는 거대한 부조리를 비판하려고 했던 건 아닐까요? 세계 앞에 선 왜소한 개인의 무력함과 부조리함 역시 놓치지 않으면서 말이죠.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독특한 탄생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시인인 남편 퍼시 비시 셸리, 바이런 경 등과 함께 휴가를 보내던 중 각자 무서운 이야기를 하나씩 써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던 거죠. 당시 스무 살도 안 된 나이였던 메리 셸리가 고전이 되어 다양하게 변주될 작품을 썼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그 계기가 사소한 이야기 짓기 내기라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은 생명의 창조를 꿈꾸며 연구를 하던 프랑켄슈타인이 연구를 성공시켜 생명을 만들지만 자신이 만들어낸 결과물의 추악함에 놀라 달아나면서 시작됩니다. 자신의 창조주로부터 버림받은 존재, 이름조차 없이 괴물이라 불려야 하는 존재의 참혹한 복수가 이어지죠.

앞서 적었듯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만든 이의 이름이지 괴물의 이름이 아닙니다. 괴물은 이름이 없이 괴물로 불릴 뿐이죠. 단지 이름이 없었기 때문은 아니겠지만 언어를 익히고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이후에도 사람들은 괴물을 두려워할 뿐 소통의 기회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만약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을 버리지 않았다면, 그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존재를 부여했다면 어떤 이야기가 펼쳐졌을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다양한 책을 읽습니다. 책에 관한 책을 읽기도 하죠. 하지만 책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하물며 책이 자신의 자서전을 쓸 수 있을 거라 상상하기도 쉽지 않죠. 하지만 이 책은 그 상상 밖의 일을 해냅니다. 바로 자신의, 책의 자서전을 써낸 거죠.

<책의 자서전>에는 자신이 초판본이며, 주인공이 어떤 인물이고, 어느 나라 소설이며, 자신이 꽤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였고, 자신의 작가가 노벨문학상 후보 급이라는 식의 정보가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자신의 이름, 책 제목이 등장하지 않죠. 책을 읽는 사람은 읽는 내내 지금까지 읽어본 소설 중에서 어떤 책이 이 책에 어울리는지 상상하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습니다.

책은 우리가 듣지 못하는 존재의 목소리,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합니다. 한 때는 몇 번이나 거듭 읽으며 감동을 받았지만 어느 샌가 잊혀져 결국 헌책방에서 새로운 독자를 기다리는 신세가 된 오래된 베스트셀러. 본래의 가치를 증명할 화려한 표지를 잃고, 작가의 이름은 희미해져 요즘 독자들은 알지도 못하게 된 버려진 책. 폐지가 되어 불살라질 위기에 처해 간절히 다음 독자의 손길을 기다리던 그 이야기가 꼭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았던 건 왜였을까. 곰곰 생각해 봅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비교적 덜 알려진 작품입니다. 영화화 된 <눈먼 자들의 도시> 등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주제 사라마구는 독특한 문체로 유명합니다. 우선 문단의 구분이 없습니다. 대화도 대화체로 구분하지 않고 연속된 문장으로 나열합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 등 몇 작품에는 등장 인물의 이름 자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안과 의사, 의사 부인, 맨 처음 눈이 먼 남자, 검은색 안대를 한 노인, 엄마 없는 소년 등 인물의 주변 정보가 곧 이름처럼 굳어지죠.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도 비슷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배경은 어느 도시의 등기소입니다. 사람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는 공간이죠. 이 소설에서 이름을 가진 단 한 사람, ‘주제 씨’라 불리는 말단 직원입니다. 우연히 미지의 여인의 기록을 발견한 주제 씨는 그 여인의 실체를 찾아 무모하고도 금지된 추적을 시작하죠.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군가에게서 이름을 부여 받습니다. 이름이 결코 나일 수 없음에도 나는 줄곧 그 이름으로 불리고, 기록이 되어 세상에 남겨지죠. 이름은 ‘나라는 존재’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남습니다. 실명은 있지만 등기소의 무수한 이름들의 기록 속에서 ‘나라는 존재’는 특별한 의미를 잃고 익명의 존재가 되는 거죠. 주제 씨의 시도는 그 익명의 존재에게 실체, 실존을 부여하기 위한 노력이었던 것입니다. 이름이 없는 등장인물을 통해 그 존재를 부각시키는 일, 그것이 주제 사라마구의 익명성의 효과입니다.


현대 사회는 익명의 영역으로 넘쳐납니다. 의도적으로 자신을 감춘 채 살아가죠. 하지만 그 결과는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을 낳기도 합니다. 인간의 가치, 존재의 의미가 거대한 익명성에 묻혀 흐릿해지는 거죠. 우리는 잃어버린 이름을 되찾아야만 합니다.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서로의 빛깔과 향기에 맞는 이름’을 불러줘야 합니다. 그 후에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소통과 관계,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는 것 아닐까요.
플라이북 에디터
서동민
captaindrop@flybook.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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