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작은 누구에게나 두렵지 않나요?

조회수 2018. 8. 5. 09: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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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사연 100책
100사연 100책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합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고민과 사연.
그 사연에 맞는 책을 추천해 드립니다.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같은 일만 했어요. 얼마 전부터 몸이 너무 안 좋아지고, 이제는 일 자체가 미워질 정도라 지금이 이직의 기회라는 생각에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게 덜컥 컵이 나네요. 모든 것을 다시 해야 한다는 게 아무래도 막막합니다."
- 익명 님
'처음'이라는 말은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처음이 들어간 표현들도 하나 같이 설렘을 담고 있습니다. 첫사랑, 첫눈, 첫인상, 첫등교, 첫출근, 첫키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설렘에는 '불안' 또한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처음이라, 낯설어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지 못해서, 그 처음이 잘못된 것일지도 몰라서.

처음이 설렘을 주는 이유와 두려움을 주는 이유는 '무지' '모르기 때문'이라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다만 사람이 어느 것에 더 마음을 두는가에 따라 기대로 떨리기도 하고, 두려워 떨기도 하는 것이죠.

전공에서부터 직장까지 10년 넘는 동안 한 가지 분야에서 일을 했다면 이미 그 분야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되셨을 겁니다.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일에 익숙해지고, 많이 알게 된다는 것뿐 아니라 그 분야에 대한 신뢰와 발언권까지 얻게 됨을 의미하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전문'이라는 표현을 자신 앞에 가져다 붙이거나 붙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몸이 안 좋아진 것도 중요하지만 비슷한 정도로 일 자체가 미워진 것도 다른 일의 시작을 결심하게 한 이유라고 하셨네요. 그런데 지금 하고 계신 일에서 더 이상의 설렘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거나 '저렇게 하는 것이 낫지 않겠나'하는 이야기는 원하지도 않을 것이고, 할 수도 없기에, 할 수 있는 건 그저 선택을 응원한다는 말 뿐입니다. 어떤 것을 시작하시든 10년 넘는 시간 동안 한 가지 일을 해왔던 경험이 도움이 될 거예요.

지난 10년이라는 시간이 노력과 끈기를 증명하고 있는 셈이니까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시작하려는 분들에게 추천드리는 책, '오가와 요코'<박사가 사랑한 수식>입니다.
엉뚱한 책을 고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겠지만 '어떤 상황에 정답이 되는 책이 없는 것처럼, 정답이 아닌 책도 없는 거라고 생각하며 즐기다 보면, 또 의외로 발견하게 되는 것도 있지 않을까'하는 마음으로 고른 책이에요.

이 소설은 파견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미혼모와 그의 열 살배기 아들이 박사와 함께 지낸 시간들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박사는 수학을 전공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 박사에게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습니다. 치명적인 결함이란 1975년에 일어난 교통사고로 인해 기억이 그 날에 멈춰 있다는 것과 이후의 새로운 기억이 80분밖에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박사는 80분마다 새로운 시작과 맞닥뜨린다는 거죠.

자신의 기억에 결함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박사는 온몸에 메모장을 붙여 기억의 공백을 메꿔가며 생활하게 됩니다. 움직일 때마다 양복에서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날 정도로 많은 메모장을 붙이고 다니죠. 매일 아침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확인하는 메모는 "나의 기억은 80분밖에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기억도, 어떤 나쁜 기억도 80분이 지나면 사라진다는 것은 축복일까요, 저주일까요.
이런 상황에서도 박사는 조금도 의기소침하지 않고 꿋꿋이 자신의 생활을 이어갑니다. 그리고 그 생활의 중심에 '박사가 사랑한 수'가 있습니다. 박사는 뛰어난 수학자로 수가 품고 있는 비밀과 원리를 풀어가는 것을 일이자 생활로 하고 있었습니다. 사고 전에도 사고 후에도 변함없이요.

'나'는 박사와 생활하는 동안 수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되고, 괴팍하고, 쌀쌀한 박사의 따뜻한 마음을 알아갑니다. 그리고 박사는 그의 아들에게는 머리가 평평하다는 이유로 '루트'라는 이름을 지어줍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차별 없이 포용하는 기호라고 하면서요.

파견 가정부인 나와 아들 루트와 박사는 매일 처음으로 돌아가 새로 관계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가 삐걱거리는 것은 처음의 아주 잠시일 뿐 '수'를 매개로 세 사람은 마음을 맞추어 갑니다. 이것은 어떤 환상적인 만능의 식이 아니라 저마다의 노력이 만들어낸 결과였습니다.
새로움, 시작은 낭만적인 기대와 설렘을 주지만,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불안과 두려움은 안정된 상태에 머문 시간이 길수록 크기 마련이고요. 하지만 뚜렷한 목표와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그 두려움에 얽매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박사는 모든 새로운 기억을 잃고도 수와 수식을 매개로 삶을 견뎌내고 즐거움을 찾아냅니다. 기억의 결함을 알기에, 반복해서 묻게 될지 모를 것들은 묻지 않는다는 나름의 상대방에 대한 배려도 빼놓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메모지에 적어, 양복에 달아 잊지 않도록 하고요.

시작이 두려워서 시작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시작한다고 해도 지난 10년 넘는 시간의 경험이 '없던 것'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잊지 마세요. 그 경험들이 박사가 온몸에 달고 다니는 메모처럼, 잊어버리지 않는 수식처럼, 삶을 지탱하는 지지대가 되어줄 테니까요. 박사는 인간이 수를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존재하기 전부터, 세상의 시작에서부터 있었던 수의 비밀을 발견해 나가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답이 정해져 있는 인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처음이 나중이 되고, 나중이 처음이 되는 것을 거듭하며, 찾고 또 발견해 가는 것이 인생 아닐까요.
플라이북 에디터
서동민
captaindrop@flybook.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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