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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헌과 그가 연기한 실제인물의 놀라운 싱크로율

조회수 2020. 1. 22. 16:2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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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기전 참고하기 좋은 '남산의 부장들' 실제인물들의 정보

<남산의 부장들> 개봉일을 맞아 영화속 주요 배역을 연기한 배우들의 모습과 그들이 연기했던 역사속 실존인물들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보도록 하겠다. 영화를 보기전 좋은 차고 자료가 될 것이다.  

1.이병헌의 '김규평', 실존인물 김재규
출처: 김재규사진 (일요시사)

극중 이름은 김규평이지만, 실제 인물은 前 중앙정보부장(현재는 국가정보원) 김재규다. 1926년 생으로 (조사당시 본인은 1924년 생이라 주장) 경북 구미시 선산읍에서 태어났다. 해방 후 김천중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다가 1946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해 동기생 이었던 박정희와 인연을 맺는다. 이후 두 사람은 1954년 9월 김재규가 5사단 36연대장으로 근무할 때 박정희가 사단장으로 부임하여 상관이 되면서 재회하게 된다. 6.25 전쟁 당시에는 2대대를 지휘하여 의정부·대구·영덕에서 북한군과 혈전을 벌였고, 6.25의 전투 중 치열하기로 손꼽혔던 황간 전투에도 참여해 큰 공을 세웠다.


1957년 육군대학 부총장을 지냈고, 5.16 군사 쿠데타 당시에는 국방부 총무과장(준장)으로 있었는데, 영화속 내용과 달리 쿠데타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혁명군사령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조사에도 불구하고 부정 사실이 발견되지 않아 석방되었고, 석방 후 현역 장군으로서 호남비료 사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다 1.21사태 후 방첩부대장에 취임하여, 방첩부대를 보안사령부로 개편하고 초대 보안사령관이 되었고, 1973년 육군 중장으로 전역한 후 유신정우회 1기 국회의원이 되었다가 그 해 12월 이후락의 뒤를 이어 신직수가 중앙정보부장이 될 때 중앙정보부 차장이 되었으며 의원직을 사퇴했다.


1974년 9월 개각 때 건설부 장관이 되었다. 건설부 장관 부임 당시 8000만 달러 밖에 안되던 해외건설 계약고를 30억 달러까지 끌어올리는 공을 세워 근정훈장을 받았다. 1976년 12월 신직수의 뒤를 이어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하였다. 1977년 박정희에게 직선제를 건의하기도 했고, 1979년에는 긴급조치 9호의 해제를 건의해 박정희 유신정권의 변화를 꾀하려 했으나 번번히 실패했다. 또한 당시 연금중이던 김대중의 외출을 눈감아주어서 김대중이 김영삼측 단합대회에 참석할 수 있게 해서 김영삼의 전당대회 당선을 도와준 일화가 전해지는 등 민주화 기여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출처: 나무위키

10.26 사건 당시에 대해 그는 법정에서 "민주화를 위하여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나는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그리 한 것이었다. 아무런 야심도 어떠한 욕심도 없었다." 라고 증언하며 민주화를 위해 박정희를 암살했다고 증언했으며, "국민 여러분! 자유민주주의를 마음껏 누리십시오! 저는 먼저 갑니다!"라는 유서를 남기며 1980년 5월 23일 사형 집행을 받게되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당시 경호실장인 차지철과의 권력갈등으로 인한 우발적 행동이라 정의해, 박정희 지지자들과 일부 민주화 세력 사이의 재평가 부분에서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되고있다. 

2.이희준의 '곽상철', 실존인물 차지철
출처: 차지철 사진 출처 스페이스 22

실제인물은 차지철로 1934년 경기도 이천에서 출생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1953년 사병으로 입대하여 이후 장교로 승진하였다. 1957년 미국의 포병학교와 1960년 보병학교를 졸업하고 공수여단 대위로 있던 1961년 5·16군사쿠데타에 가담하였다. 쿠데타 이후 박치옥 공수여단장의 소개로 박정희의 경호장교로 활동한 것이 계기가 되어 박정희의 신임을 얻고 정치에 입문하였다. 1962년 육군중령으로 예편하여 민주공화당 상임위원을 지냈다.


1963년 민주공화당 전국구로 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66년 민주공화당 경기6지구위원장을 지냈다. 1967년 민주공화당 지역구로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이천·광주). 1969년 국회 외무위원장을 지냈고, 1970년 한양대학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국민대학교 초빙교수를 지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광주, 민주공화당), 그해 국회 내무위원장을 거쳤다. 35세이던 1969년 국회 외무위원회에서 의정사상 최연소 상임위원장이 될 정도로 박정희의 신임을 받았다.

1974년 문세광의 육영수 저격사건으로 물러난 박종규의 후임으로 대통령 경호실장이 되었다. 경호실장으로 있으면서 월권행위로 대통령 비서실과 중앙정보부와의 마찰이 잦았고 재야와 야당문제에 강경 대응했다. 김영삼 신민당 총재 의원직 제명을 주도하고, 1979년 10월 16일 부마항쟁이 일어나자 강경진압을 주장하고 공수여단 투입을 주도하였다.


박정희를 사이에 놓고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규와 대립하게 되면서 지배권력의 분열을 초래했다. 결국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하여 피살될 때 경호실장으로 현장에 있다가 함께 살해당하였다.

3.곽도원의 '박용각', 실존인물 김형욱
출처: 김형욱 사진 출처 시사저널

실제인물은 김형욱으로 박정희 정권당시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다.


1925년 황해도 신천 출생으로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였으나 이후 독학으로 1948년 8기생으로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이듬해 졸업했다.


군생활 중 김종필과 함께 정풍운동을 함께 했고 이후 1961년 5·16 군사정변에 가담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 내무분과위원장과 운영기획위원장을 지냈다. 이어 1963년 7월 김종필과 김재춘에 이어 제3대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했고 10월에 육군준장으로 예편했다. 중앙정보부장으로 1969년까지 재임하였는데 중앙정보부, 국가안전기획부, 국가정보원을 통틀어 최장수 정보기관장으로 그만큼 박정희의 신임이 두터운 최측근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애초 육사 동기인 김종필과 가까운 사이였지만 박정희와 관계를 형성하면서 최측근이 되었다.


김형욱은 1963년 제5대 대통령선거 준비단계에서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가 이끄는 중앙정보부는 야당 후보 사퇴를 막는 정치공작 등으로 대통령 선거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선거 이후에도 중앙정보부는 한국의 대표적 공작정치의 산실이었으며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정치공작과 공안사건을 통해 박정희 체제 유지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64년 8월 1차 인혁당 사건, 1967년 동백림사건과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 1968년의 통일혁명당 사건 등은 김형욱과 중앙정보부가 개입한 대표적인 사건들이었다.


1964년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대학생 시위(6.3 항쟁) 보고를 받고 "트럭 천 대만 징발해서 그놈들(대학생들) 싹 다 무인도에다 격리시켜 버리면 되잖아!"라는 말을 남긴것으로 알려져 큰 논란을 빗기도 했다.


김형욱은 박정희의 악역을 자처하면서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했기에 일반 대중과 야당은 물론 여당 내에서도 그에 대한 원성이 높았다. 결국 삼선개헌 문제가 완료된 1969년 10월 20일 박정희는 이만섭의 건의를 받아들여 김형욱을 해임시켰다. 이후 1971년 5월, 8대 국회 의원에 당선돼 활동하다 1972년 유신체제 선포로 의원직을 상실하게 되었다. 김형욱은 자신이 삼선개헌의 1등공신이면서도 중앙정보부장에서 해임되고 유신정우회 의원명단에서도 제외되자 박정희에 대해 깊은 불신과 원망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1973년 4월 15일 김형욱은 대만을 거쳐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망명 직후 박정희는 고위급 인사들을 보내 귀국을 설득했으나 실패했고 1977년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불거지면서 김형욱은 6월 2일 '뉴욕타임스'와 기자회견을 갖고, 박정희 체제의 내부비리를 폭로하였다.


이후에도 김형욱은 미국에서 김대중 납치사건을 비롯해 각종 비리를 폭로했고, 미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도 출석해 박정희를 강력히 비난하는가 하면, 치부를 고발하는 회고록 출간도 추진하였다. 박정희의 거듭된 회유와 귀국 권유에도 김형욱은 회고록 발간을 강행했고 양자 관계는 회복불가능할 정도로 악화되었다. 결국 1979년 10월 1일 김형욱은 중앙정보부의 공작으로 프랑스 파리로 가 중앙정보부 해외 파견요원들에 의해 납치된 이후 그의 행적은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파리 교외 살해설, 납치 귀국설 등이 제기되고 있으나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현재 그의 실종 사건은 한국현대사 최대 미스터리로 남겨졌다. 


4.이성민의 '박통', 실존인물 박정희
출처: 박정희 사진 출처 대통령기록관

대한민국 제5·6·7·8·9대 대통령. 1917년 경상북도 구미 출생 이었다.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 문경소학교에서 3년간 교직생활을 한 다음, 1940년 만주의 신경군관학교(新京軍官學校) 제2기생으로 입학, 군문에 들어갔다. 당시 군관학교에 지원하기 위하여 혈서를 썼으며, 일본인으로서 개와 말의 충성'犬馬の忠'을 다하겠다고 지원서에 썼다. 이 일은 크게 회자되어 <만주신문(滿洲新聞)>(1939. 3. 31. 7면)에 실렸다. 이 군관학교를 최우등생으로 수료한 뒤 일본육군사관학교로 전학, 1944년 졸업과 함께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관동군(關東軍)에 배치되었다.


광복 때까지 만주와 화북지방에서 일본군 장교로 전쟁에 가담했다가, 1946년 귀국하여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제2기로 졸업하고 육군대위로 임관되었다. 6·25전쟁 동안 주로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근무하다 1953년 장군이 되었다.


1954년 제2군단 포병사령관, 1955년 제1군참모장, 1960년 육군군수기지사령관, 제1관구사령관,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을 거쳐, 1961년 제2군부사령관으로 재직중, 군부쿠데타를 주도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육군본부 정보국에 근무하고 있던 1949년, 사상관련사건에 연루되어 군법회의에 회부된 적이 있었다.


당시의 신문보도에 의하면 여순반란사건 관련 공산주의 혐의자로 되어 있는데,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으나 육군본부의 동료·상사들의 구명운동으로 복역은 면제되었다. 이 때문에 한때 군인의 신분을 박탈당하였다가 6·25전쟁이 일어난 뒤 현역으로 복적되었다.


4·19혁명으로 성립된 민주당정부를 무능·부패 정부로 규정하고 쿠데타에 의해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와 그를 따르는 일단의 장교들은 쿠데타 성공 후 곧바로 계엄령을 선포, 삼권을 장악하였다. 이른바 혁명주체세력은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설치, 이를 통해 입법·행정권과 사법권의 일부를 행사하였다.


박정희는 처음에는 2년 후에 정권을 민간에 이양하겠다는 민정이양일정을 발표하였으나 1963년 1월부터 시작된 정치활동재개 이후 야당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서는 이른바 ‘2·27선언’을 통하여 자신의 원대복귀를 약속하였다.


그러나 ‘4·8조치’로 군정연장을 계획하였다가 여론의 반대에 부딪혀 철회하는 등 번의를 거듭하였다. 그 사이 군정은 이른바 ‘4대 의혹사건’을 저질러 국민들로부터 ‘구악을 뺨치는 신악’이라는 비판을 듣기도 하였다. 박정희는 1963년의 대통령선거에서 야당의 단일후보인 윤보선(尹潽善)을 근소한 표차로 누르고 당선됨으로써 제3공화국의 통치권자가 되었다. 군정기간인 1962년 부터 추진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진행하였고, 한·일국교정상화를 이끌었다.


한일회담 타결, 월남파병 등으로 미국으로부터도 신임을 얻은 박정희는 강한 권력욕을 드러냈는데, 그 결과는 1968년 3선개헌으로 나타났다. 1972년 10월 박정희는 헌법효력의 일부 정지, 국회해산, 정당활동금지의 담화를 발표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정부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하여 대통령을 선출하는 ‘유신헌법’을 제정,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한 후, 이 헌법에 따라 제8대 대통령에 박정희를 선출하였다. 이로써 제4공화국이 시작되었다.


유신체제는 사실상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가능하게 하는 체제였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의 권한을 막강한 것으로 보장해줌으로써 박정희에게 독재체제의 길을 열어주었다. 이 체제 아래서 민주주의는 크게 후퇴하였다. 유신헌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주장이 야당과 재야세력에서 광범위하게 대두하였으나, 박정희는 이를 ‘대통령긴급조치’로써 탄압하였다. 유신체제 7년간 수많은 정치인·종교인·지식인·학생들이 긴급조치에 걸려 투옥당하였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여론도 한국의 강압정치를 비난하였으나 박정희는 굽히지 않았다. 독재적인 통치에 의해 박정희정부는 이 기간 기록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연간 10%를 넘나드는 고도성장이었고 국민소득도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빈부격차를 가속화시켰고, 황금만능사상으로 사회갈등과 함께 국민정신문화를 크게 황폐화시키는 결과를 빚었다. 


박정희는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한 남북대화에 힘써 한동안 남북적십자회담·남북조절위원회회담 등을 열었고, 남북간 밀사교환을 이루었으나 대화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 박정희는 1979년 유신체제에 항거하는 ‘부마사태(釜馬事態)’가 절정을 이루던 때, 10월 26일 궁정동 만찬석상에서 측근의 한 사람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총탄을 맞고 사망했다. 그와 함께 유신체제도 끝이났다.

5.서현우의 '전두혁', 실존인물 전두환
출처: 젊은시절 전두환 사진출처 위키백과
육사시절 전두환 모습(오른쪽)

1931년 경상남도 합천에서 태어났다. 1951년 대구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5년 육군사관학교를 제11기로 졸업하였다. 1961년 5·16군사정변 직후 박정희에게 발탁되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비서관, 1963년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1969년 육군본부 수석부관을 지냈다. 1970년 백마부대 제29연대장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였고, 1971년 제1공수특전단 단장을 지냈다. 1976년 대통령 경호실 차장보, 1978년 제1사단장을 지낸 후 1979년 초 국군보안사령관이 되었다. 그해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가 사망하자 12월 12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체포하고, 신군부가 12·12군사정변을 일으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80년 중장으로 진급하고, 이어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되었다.


5·17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와 함께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강제로 진압하고 정권을 장악한 뒤, 그해 6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상임위원장이 되었다. 이어 8월 5일 대장으로 진급하고, 22일 예편하였으며,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선으로 제11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81년 1월 창당된 민주정의당의 총재가 되어 2월 개정된 새헌법에 따라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재임기간 중 군부독재라는 비판을 받았다. 1987년 6월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견디다 못해 결국 수용하였다. 물러난 뒤 광주민주화운동과 5공비리문제로 책임추궁을 당하다가 1988년 11월부터 1990년 말까지 백담사에서 은둔생활을 했다. 1996년 12·12 및 5·18사건, 비자금사건과 관련되어 사법처리되었다.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에서 무기징역 및 추징금 2,205억 원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후보의 승리로 최초의 여·야 간 정권교체가 실현되면서 나흘 뒤인 12월 22일 김영삼 정부의 특별사면으로 풀려나,1998년 복권되었다.


그는 2003년 전 재산이 29만 원이라며 추징금을 납부할 수 없다고 버티다가 533억 원이 추징되었고, 2013년 8월에는 서울중앙지검 전두환 전 대통령 추징금 환수팀이 출범하였다. 이후 수사팀의 자금 추적 등을 통해 확보된 부동산, 금융자산, 미술품 등이 공매처분 등의 방식으로 422억 원이 환수처리되는 등 2014년 4월 전체 추징금 2205억 원 중 955억 원이 집행되었다.

자료참조:한국민족문화대백과, 두산백과 

우리 영화 볼래?: <남산의 부장들> 2차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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