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점기시대 美에 진출해 스타가 된 한국인 정체

조회수 2019. 8. 14. 16: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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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특집! '도산 안창호 아들부터, 성룡의 '따거'까지..' 5인의 원조 한류 배우들

아이돌부터 배우들까지 활발한 해외 활동을 통해 한류 콘텐츠의 위대함을 전해주기 까지에는 오래전부터 입지를 닦아온 1세대 선배 배우들의 활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안타깝게도 이들의 존재를 알고 있는 영화팬은 그리 많지 않다. 이들은 한국 배우의 입지를 넘어서 아시아 배우들이 할리우드에 진출할 수 있는 선구적인 역할을 한 동시에, 자신이 갖고 있는 재능으로 세계 영화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며 지금의 한류 스타 못지 않은 강렬한 인상을 남긴 중요한 인물들이었다.


할리우드의 전성기인 1930년대에서 부터 1970년대 까지를 비롯해, 당시 최고의 인기를 자랑한 홍콩 영화계에도 왕성하게 활동하며, 존재감을 알린 한국 배우들중 큰 방향을 불러온 5인을 선정해 이들의 활약상을 다시한 번 조명하려 한다.   

1.아시아계 최초의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이자 도산 안창호 선생의 아들 필립 안

과거 MBC 예능 '무한도전'을 통해 소개된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장남으로 알려진 연기자. 방송에서는 그가 배우로 활동한 것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 했지만, 아시아 배우 최초로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이름을 남긴 역사적인 인물인 만큼 그의 연기 경력에 대해 상세하게 알 필요가 있다.


1905년 3월 29일 LA에서 태어난 그는 고등학교 시절 우연히 방문한 헐리웃 스튜디오로 부터 스크린 테스트를 받게되고, 그때부터 배우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된다.


당시, 미국내 한인들이 운영한 오렌지 농장이 폭우로 큰 피해를 입은 탓에 집안은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아버지 안창호 선생은 독립운동 활동에 집중한탓에, 필립 안이 학교 생활과 엘레베이터 보이 생활을 병행하며 집안의 경제력을 책임진 실질적인 가장이었다. 그런 아들이 연기자의 길을 가겠다는 사실에 어머니는 반대 했지만, 아버지 안창호 선생은 아들의 꿈을 허락하며 "대신, 그 분야의 최고가 되어라."라는 말을 전한다.


필립은 1934년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현재 남가주대학)의 영화학과에 입학한후, <Desirable>이라는 영화의 엑스트라로 동시에 출연하며 영화와 첫 인연을 맺게된다. 그리고 1년후 <어 스크림 인 더 나이트>와 다음해 인기스타 빙 크로스비가 주연을 맡은 <애니씽 고즈>에 조연으로 출연하며 헐리웃 내에서 본격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게 된다.


배우 활동을 시작한 시기가 2차세계 대전이 발발한 시기였기에 그가 작품속에서 맡은 역할은 악역인 일본군과 다소 어눌해 보이는 중국인 역할이었다. 그의 캐스팅과 관련한 재미있는 일화로 어렸을때 부터 미국에 거주한 탓에 필립 안의 영어 발음이 다른 동양인 배우에 비해 너무 유창했다는 점이었다. 그 때문에 제작자와 연출자들은 리얼리티한 동양인 연기를 위해 그의 캐스팅 여부를 두고 고민했다고 한다. 

<Hell's Half Acre>(1954)
TV 드라마 <쿵푸>(1972~1975)의 마스터 칸
동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 가운데가 필립 안, 왼쪽 안필영, 오른쪽 안수산

이후 <80일간의 세계일주>,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배틀 힘>, <배틀 서커스>, <전송가>에서는 한국인으로 출연했으며 대스타 험브리 보가트와 함께 호흡을 맞췄다. 로클론 스타 엘비스 프레슬리가 주연을 맡은 [파라다이스]등의 화제작에도 출연하게 되었고, 인기 TV 시리즈 <야전병원 매쉬>, <쿵푸>에 주요 배역을 맡았다. 특히 <쿵푸>에서 그가 연기한 '마스터 칸'은 미국인들에게 오랫동안 기억되는 그의 대표적인 캐릭터로 알려졌다.


동양인 배우가 많지 았던 1930년대 능숙한 영어 실력과 이해력 깊은 연기력을 선보이며, 할리우드의 동양인 전문 배우로 활동해 총 182편의 작품에 출연한 그는 1978년 72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이름을 남긴 시기는 그의 사후 6년후인 1984년 으로 그의 가족들이 대신 참석해 그의 명예를 기렸다. 그의 이름이 새겨진 별은 헐리웃 블러바드 6211번지에 위치해 있다.

2. 동양인 배우의 입지를 넓힌 오순택

1933년 목포 태생의 오순택은 한국에서 대학교를 졸업한뒤 1959년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하게 되지만, 영화에 대한 매력에 빠져 UCLA 영화학과 대학원에 진학하게 된다. 뒤늦게 배우 활동을 시작한 탓에 1960년 부터 여러 TV 시리즈와 영화의 단역으로 출연하다 1974년 <007 제 9탄 -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에서 제임스 본드(로저 무어)를 돕는 힙 경위로 출연하며 존재감을 알리게 된다.


TV 드라마 <미녀 삼총사>(1976)
<007 황금총을 든 사나이>(1975)
<비버리 힐스 닌자>(1997)
<뮬란>(1998)

동양계 배우들의 활동이 적었던 시절, 필립 안과 함께 왕성하게 활동하며 오늘날 동양 배우들의 입지를 넓히는데 크게 기여했다. 총 120여편이 넘는 헐리웃 영화에 출연했으며, 대표작으로는 TV 시리즈 <미녀 삼총사>, <야전병원 매쉬>, <하와이 파이브 오 수사대> 영화 <최후의 카운트 다운>, <대특명 2>, <데스 위시 4>가 있으며, 디즈니 애니메이션 <뮬란>에서 뮬란의 아버지 목소리를 연기한 바 있다.


이후 국내로 돌아와 연극영화과 교수직에 재임하다 2018년 향년 8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3.동양인 최초의 셰익스피어 연극 주연 배우 랜달 덕 김

1943년생으로 10대 시절부터 현지 연극 무대에서 왕성하게 활동한 베테랑 배우였다.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뉴욕 퍼블릭 시어터의 셰익스피어 연극의 주연을 맡게 된 영예를 지니고 있다. 1960년대 오순택과 함께 <하와이 파이브 오 수사대> 시리즈에서 활약했으며, 1970년대 들어서야 본격적인 영화판에서의 활동을 시작하게 되는데, 주로 단역으로 출연했다. 

<닌자 어쌔신>(2009)
<매트릭스 2-리로디드>(2003)
<라스트 에어벤더>(2010)
<드레곤볼 에볼루션>(2009)
<애나 앤드 킹>(1999)

연극 무대를 주 무대로 활동하던 그는 1990년대 부터 다시 스크린 활동을 이어나가게 되고, <리플레이스먼트 킬러>,<씬 레드 라인>,<애나 앤드 킹>,<매트릭스 2:리로디드>등에 출연하며 존재감을 알리게 된다. 대표적인 캐릭터로는 애니메이션 <쿵푸 팬더>에서 목소리 연기를 맡은 거북이 대사부 우그웨이가 있다.

4.태권도의 위력을 할리우드에 알린 이순신의 후예 필립 리

필립 리는 헐리웃의 무술 전문 영화의 제작자이자 주연 배우로 잘 알려진 영화인이자 독립 유공자의 후손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후손으로 그의 조부인 이갑성은 3.1운동 민족대표 33인에 속해있다.


태권도 6단, 합기도 3단의 무술 유단자로 1980년대 액션 영화에서 화려한 액션 연기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다 1989년 태권도를 소재로 한 액션 영화 <베스트 오브 더 베스트>의 제작, 각본, 주연을 맡게 된다. 화려한 발차기와 파괴력 넘치는 액션 연기를 선보이며 미국 내 마샬아츠 팬들을 열광시킨다.

<베스트 오브 더 베스트> 시리즈 에서

이러한 매니아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베스트 오브 베스트>는 1998년까지 4편의 프랜차이즈를 내놓게 된다. <폭주 기관차>,<스페셜 리스트>,<익스펜더블>,<다크나이트>에 출연한 에릭 로버츠가 주연으로 출연해 필립 리와 함께 호흡을 맞췄으며, <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더의 목소리를 연기한 제임스 얼 존스, 샐리 커클랜드 등의 베테랑 배우들이 출연했다.


<베스트 오브 더 베스트> 시리즈에 몰두해 1998년 이후 활동이 뜸하다 2015년 <언더독 키즈>를 내놓으며 다시금 영화 활동을 이어나가는 중이다.


5.'성룡의 따거' 발차기의 전설 황정리

추석 연휴 케이블을 통해 방영된 <취권>을 본 사람이라면 성룡에게 굴욕을 안긴 번개 다리 염철심을 기억할 것이다. 매서운 눈빛과 함께 화려한 발차기를 선보이던 그의 정체는 중국 배우가 아닌 한국 배우 황정리로 마샬 아츠 팬들에게 있어서는 전설로 추대되고 있다.


1944년 일본 오사카의 재일 교포의 자녀로 태어나 해방 후 국내로 돌아오게 된다. 태권도와 여러 무술에 능한 그는 젊은 시절 베트남전 태권도 교관으로 활동했으며, 전쟁후 이두용 감독의 오디션에 지원하며 영화계와 인연을 맺게 되지만, 단역 배우 활동만 전전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홍콩의 유명 감독 겸 제작자 오사원 감독이 한국, 홍콩 합작을 위해 방한하다 무술 고수인 황정리의 실력을 확인하게 되고, 곧바로 홍콩 영화 <남권북퇴>에 캐스팅돼 악역을 연기하게 된다.


<남권북퇴> 이후 6, 7편의 작품에 연이어 출연하며 화려한 액션을 선보이던 그는 1978년 성룡과 함께 작업해 그 유명한 <취권>,<사형도수>와 같은 전설적인 작품을 남기기에 이른다. 이후 홍콩 무술 영화의 전성기 시절인 1980년대에 수십편이 넘는 작품의 주연으로 출연하며, 전매특허인 화려한 발차기와 강력한 타격 액션을 선보여 홍콩, 한국 영화팬들을 열광시킨다. 이후에도 홍콩과 한국을 오가며 지속적으로 활동하다 1996년 이후 잠잠해지게 된다.

<남권북퇴>(1977)
<취권>(1978)
<사형도수>(1979)
2014년 '쿵푸킹덤'과 인터뷰 당시 모습

황정리는 현재도 전세계 마샬 아츠 팬들에게 있어 전설적인 존재로 알려져 있다. 특히 태권도와 쿵푸 무술의 장점을 섞은 파괴력 넘치는 독보적인 액션 연기는 그 당시 무술 영화에 있어서 신선한 충격으로 기억되며 이후의 여러 무술 전문 연기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현재도 오랫동안 함께 작업한 성룡, 홍금보로 부터 '따거'(형님)라는 존칭을 직접들을 정도로 많은 존경을 받고 있는 마샬아츠의 대가다.


그와 관련한 흥미로운 일화로 베트남전 당시 술집에서 시비가 붙다 칼을 들고 공격하는 상대를 발차기로 사망시켜 정당방위로 풀려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마샬아츠 팬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일화지만, 사실 여부를 놓고 오랫동안 논란이 된 바 있었다.


그러던 2014년, 영국의 유명 마샬아츠 전문 매체인 '쿵푸 킹덤(kungfu kingdom)'이 황정리와 인터뷰를 하게 되면서, 이 일화에 대해 묻자 황정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다"라고 말하며 소문이 사실임을 증명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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